92화
죄인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김민석은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최상혁이 아닌 하준서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준서의 얼굴은 예상대로 살짝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팠다. 김민석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준서에게도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서하윤이 무슨 생각으로 준서 씨에게 접근했는지는… 아직 저도 몰라요. 하지만 서하윤은 하준서 씨도…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이요.”
김민석은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민석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으로, 누군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렸다.
“그럼….”
한참 만에 하준서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말이라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움에, 김민석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럼 서하윤 말고, 지금 하윤 씨는요? 하윤 씨는 어떤데요?”
“…….”
말문이 막혔다. 하준서는 김민석이 서하윤의 인격 뒤에 숨는 걸 용납해 주지 않았다.
“최상혁? 아니면 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어느 쪽이에요?”
“저는…. 저는….”
“이리 재고 저리 재지 말고 그냥 느끼는 대로 말해.”
최상혁이 잘라 말했다. 도망갈 구석 없이 코너에 몰린 기분이었다. 김민석은 손안에 가득 찬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입술을 한번 꾹 깨문 다음, 광화문 광장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나체가 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최상혁 씨도, 하준서 씨도, 너무 좋아요.”
“…….”
“…….”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그동안 속으로 욕해 왔던 서하윤이랑 똑같은 짓을 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천 번 만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둘 다 너무 좋아요. 쓰레기 짓인 거 아는데, 그래도 좋아요. 그래서 도망간 거예요. 이런 말 하면 너무 어이없으니까, 차라리 도망가서 둘 다 안 보고 사는 게 나을 거 같아서….”
“…….”
“…….”
“정말 미안해요. 너무 어이없을 거 알아요. 그래도 나는 도저히 선택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두 사람 다 나랑 헤어져 주세요.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석 달 동안 떨어져 있어 보니까… 너무 보고 싶기는 한데, 진짜 보고 싶은데. 그래도 둘 중 하나를 택하느니 그렇게 혼자 멀리 떨어져서 멀리서 지켜보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어요. 나 너무 어이없죠? 나도 알아요. 진짜 어이없고 한심하고… 결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두 남자는 계속 말이 없었다. 김민석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두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했다.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을까. 배신당한 눈으로 보고 있을까.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을까. 아니면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눈으로 보고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 애인은 엉덩이가 가벼워서 하나로는 만족이 안 되는 모양이네.”
한참 만에 하준서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김민석은 무슨 말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둘이면 되겠어요? 설마 셋까지 필요한 건 아니죠?”
“…네?”
“설마 셋까지 필요한 거예요?”
하준서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김민석은 흠칫해서 결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 아뇨.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세 번째도 필요하다고 했으면 몇 날 며칠 동안 괴롭혀 줬을 텐데.”
하준서가 빙긋 웃었다. 김민석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다는 눈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맘 가는 대로 선택하라고. 최상혁이든, 나든, 아니면 둘 다 끼고 살든….”
그때 했던 말은 기억났다. 저기서 끝은 아니었다. 둘 다 헤어져도 된다고 말해 줬다. 물론 자신은 끈질기게 붙어 있을 거라는 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두 사람한테 못 할 짓이잖아요.”
“못 할 짓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둘 중 하나를 택하느니 다 버리겠다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둘 다 데리고 살아요. 그럼 되잖아요.”
하준서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에게 장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어이없고 미워서 놀려 먹고 있는 건가 의심이 되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돌려 최상혁을 보았다. 지금 상황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상혁 씨?”
김민석이 조심스레 부르자, 최상혁의 이마에 혈관이 하나가 도드라졌다. 상당히 열이 받았는데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서하윤.”
최상혁이 마침내 입을 열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김민석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커먼 눈이 슥 움직이더니 김민석에게 와서 꽂혔다. 그의 눈이 심한 욕을 하고 있었다. 김민석은 깨깽하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쓰레기입니다! 하고 외치고 싶어졌다.
“…좋아.”
“네… 네?”
김민석은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최상혁이 이를 부득 갈더니 씹듯이 다시 한번 내뱉었다.
“좋다고 했어.”
“…설마… 지금 둘 다 사귀어도 좋다는 얘기….”
“대신, 딱 저 새끼까지야.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우리 외에 다른 새끼한테 그 가벼운 엉덩이 한 번만 더 놀렸다가는….”
최상혁은 굳이 뒷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김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절대 안 그럴게요. 약속해요. 맹세할게요.”
얼마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던지 몸이 같이 휘청휘청 흔들릴 정도였다.
“자, 그럼 됐네. 이걸로 앞으로 하윤 씨가 도망갈 일은 없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
하준서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네….”
김민석은 느릿하게 대답하며 지금 무슨 일이 지나간 건지 생각했다. 뭔가 얼렁뚱땅 넘어간 느낌이었다.
“저기 근데 저는 두 사람 다 만날 생각은 없는….”
“그럼 우리 둘 다 버리겠다고요?”
하준서가 말을 자르며 물었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기묘하게 무서웠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도의상 둘 다 만나면서 지낼 수는 없다는….”
“그럼 그런 얘기잖아요. 둘 다 만나느니 둘 다 버리겠다, 그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게… 그건 맞긴 한데….”
김민석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이 핑핑 돌았다.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머리에 렉이 걸렸다. 김민석은 잠시 동안 고장 난 컴퓨터가 돼 버렸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지 못 하겠다고 하니 셋이 단란하게 잘 지내 보자는 거예요. 연애는 자유고 사생활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최상혁도 괜찮다 하잖아요. 내가 큰마음 써서 본처 자리는 양보할게요. 그럼 된 거죠?”
“어… 어….”
김민석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어….’만 반복했다.
“맹해진 모습도 귀엽다니까.”
하준서가 작게 웃으며 김민석의 코를 꼬집었다.
그 때, 가만히 앉아서 인상만 쓰고 있던 최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석은 흠칫 몸을 굳혔다.
“넌 이제 그만 가 봐.”
최상혁이 하준서에게 말했다. 하준서가 불만스레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얼굴을 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네. 첩년 따위는 일단 꺼져 드려야지요.”
하준서가 비아냥거리듯 말하더니 김민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양 볼을 부여잡고 가볍게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회포 푸는 건 본처한테 먼저 양보할게요. 대신 내일, 기대해요.”
기대? 무슨 기대? 회포를 풀어? 무슨 회포를 풀어?
아직 고장 난 컴퓨터 상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김민석은, 인사도 못 한 채 하준서를 보내고 말았다.
***
철컥-
현관문이 닫히고 거실에 최상혁과 단둘이 남았다. 순식간에 짓눌리듯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민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최상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자… 잘 지냈어요?”
머리에 렉이 걸린 김민석은 어이없게도 이제야 재회 인사를 건네었다. 최상혁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냈어요? 그게 지금 나올 말이야?”
최상혁이 삐딱하게 선 채 말했다. 김민석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미 둔해질 대로 둔해져 있는 머리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김민석은 최상혁을 응시하며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냥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끄집어냈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김민석이 용기 내 꺼낸 말에, 최상혁은 불시에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혔다. 김민석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속에 있는 용기를 더 끌어 올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상혁에게 한 발, 한 발, 느리게 다가가 마침내는 그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두 팔에 가득 들어차는 넓고 두꺼운 가슴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코끝에 스치는 최상혁의 향수 냄새와 섞인 체향이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였다. 너무나 생생한 최상혁의 존재감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모든 고민과 당혹스러움은 빠르게 희미해졌다.
“상혁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듯 물었다.
“하-”
최상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에 괜히 서러운 기분이 되었다. 김민석은 최상혁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혀 시선을 맞댔다.
“나 보고 싶었어요, 안 보고 싶었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 나한테 그걸 묻는 거야?”
최상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하지만 김민석의 간땡이는 이미 부풀 대로 부풀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석 달이나 계속 찾았다는 것. 그리고 부산까지 당장 달려 내려왔다는 것. 헤어지느니 하준서와 공유하는 걸 택했다는 것까지…. 어떻게 보아도 최상혁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