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달칵-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하준서가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김민석을 안쪽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김민석은 자신의 뒤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두 남자를 힐끔 올려 보고는 터덜터덜 현관으로 걸어 들어섰다. 그리고 신발을 벗은 다음,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서하윤?”
“하윤 씨?”
문 너머로 황당함이 가득한 부름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하윤 씨? 하윤아. 지금 설마 화장실로 도망간 건 아니죠?”
“맞는데요!”
김민석은 크게 외치며 잠금장치가 제대로 잠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변기 뚜껑에 앉은 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한숨밖에 안 나왔다.
쾅- 쾅-
“서하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 안에 들어가 있는다고 일이 해결돼?”
“하윤 씨. 안 잡아먹을 테니까 일단 나와 봐요. 오랜만에 봤는데 얼굴도 안 보여 줄 거예요?”
화장실 문 너머로 두 남자가 김민석을 어르고 달랬다. 물론 최상혁이 작정하고 때려 부수면 금방 떨어져 나갈 문이지만, 그래도 문 하나가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과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그냥 끌고 오면 어떡해요! 내가 그 아르바이트를 얼마나 열심히 한 줄 알아요?! 모처럼 친한 사람도 생기고 단골들이랑 인사도 하고 지냈는데! 그리고 내 모텔 방에 그동안 벌었던 돈 그대로 다 있단 말이에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인데!”
김민석은 겁도 없이 문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밖이 잠시 조용해졌다. 김민석은 이때를 놓치지 말고 주도권을 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위기에 눌려 저 두 남자에게 질질 끌려가다간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몰랐다.
“다시 데려다 놔요! 아니, 필요 없으니까. 나갈 거예요. 돌아갈 거라고요!”
김민석은 이 기세를 몰아 버럭버럭 외쳤다. 저도 모르게 약간 흥분했던지 몰아쉬는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똑- 똑-
이번에는 쾅쾅 대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하준서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윤 씨, 내가 일하던 가게에 전화할게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서울에 올라왔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크게 원망 안 할 거예요. 그리고 모텔에는 사람 보내서 짐 다 챙겨 오라 그럴게요. 열심히 번 돈도 한 푼도 안 빼놓고 다 가져오라고 그럴게요. 그럼 됐죠?”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나 보내 줘요!”
문밖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내 누군가가 쾅-! 하며 문을 부술 듯 후려쳤다. 문에 바짝 붙어 바짝 동정을 살피던 김민석은 그 바람에 바닥으로 발랑 넘어져 버렸다.
“까불지 말고 문 열어, 서하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내가 고작 화장실 문짝이나 보고 있으려고 왕복 열두 시간을 운전한 줄 알아?”
최상혁이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가 화를 내고 나오니 절로 간이 쪼그라들었다.
문고리가 철컥철컥 흔들렸다. 김민석은 거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엉덩이 걸음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들어오지 마요! 들어오면…! 들어오면…!”
“들어가면 뭘 어쩔 건데.”
최상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민석은 곧장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렸지만 협박할 거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 오줌 쌀 거예요! 그러니까 빨리 절로 가요!”
김민석은 버럭 외치고는 쪽팔림에 못 이겨 얼굴을 붉혔다.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문밖이 조용해졌다.
“…그럼 오줌 누고 나올 거죠?”
하준서가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아서 나갈 거니까, 소리 들리는 거 싫으니까 빨리 절로 멀리 가요!”
김민석은 내친김에 다시 외쳤다. 그런 다음 조심조심 화장실 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댔다. 잠시 조용하던 문밖에서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민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잠시 앉아서 숨을 몰아쉬던 김민석은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났다. 그리고 변기 뚜껑을 열었다. 아까 올라올 때 아메리카노를 마셨더니 실제로 요의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소변을 보는 와중에도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한숨이 푹 나왔다.
소변을 본 김민석은 뚜껑을 닫고 물을 내렸다. 그리고 세면대 물을 틀어 손을 아주 공들여 꼼꼼히 씻기 시작했다. 나름 시간을 끄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손톱 사이사이, 손바닥 주름까지 꼼꼼하게 비벼 씻어도 그래 봤자 손 씻는 일이다.
김민석은 다시 변기 뚜껑 위에 앉았다. 이 좁은 화장실을 도피처로 삼은 채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밖에는 두 남자가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석 달이나 도망쳤는데,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정신 차리자, 서하윤.”
김민석은 손으로 볼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리며 중얼거렸다.
요즘 김민석은 자신을 서하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서하윤을 서하윤이라고 부르는 건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다. 하지만 서하윤의 이름표를 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 이름에 많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김민석은 화장실 문고리를 잡은 채 몇 번이나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냥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일단 부딪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서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멀어지는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거실 소파 따위에 앉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김민석은 민망한 마음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눈 굴리는 버릇이 생겼네요.”
하준서가 웃으며 말했다. 최상혁이 턱으로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라는 거였다.
김민석은 조심조심 걸어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1인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두 남자가 드디어 거실로 들어왔다. 남은 건 이제 긴 소파 하나였기에 두 남자가 나란히 앉게 되었다. 김민석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두 남자의 눈길에 정면으로 노출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자, 이제 왜 도망갔는지부터 말해 보실까.”
최상혁이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뜸 물었다. 기습 공격을 당한 기분이었다. 김민석은 마른침을 꿀떡 삼키고는 입을 떼어 냈다.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때는….”
더듬더듬 쓸데없는 단어만 늘어놓으니 최상혁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김민석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잘생겼다고 말이다.
“부산에 있으면서 말 더듬는 버릇이 생겼나?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왜 도망갔는지, 그거나 똑바로 말해.”
최상혁이 질책했다. 김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혼나는 학생처럼 양다리를 중앙으로 딱 모아 붙인 채 허벅지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있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느라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꽉 쥔 손안에는 식은땀이 고였다. 정말이지 너무 곤란했다.
“하윤 씨. 도망갔다고 책망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는 하윤 씨가 왜 도망가야만 했는지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방지할 수 있지 않겠어요?”
하준서가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확실히 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달라붙은 입술을 떼어 내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김민석은 잠시 숨을 색색 몰아쉬다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항상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다 서하윤의 책임이었으니까 나는 뭘 어떻게 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서하윤이래잖아요. 그럼 두 사람 사이에 낀 것도 내 책임이고, 그걸 해결해야 하는 것도 내 책임인 거잖아요.”
한번 입을 떼니 의외로 말이 술술 나왔다. 김민석은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자고 생각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기는 힘들겠으나, 일단 해 보기로 했다.
“나는 서하윤이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어요. 상혁 씨에게 많은 걸 받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웠고, 준서 씨에게도 못 할 짓을 했다고요. 그런 서하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점점 꿈속에 서하윤의 기억이 나오는 거예요. 서하윤은….”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하준서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서하윤은 상혁 씨를 사랑했어요. 마지막 날에 서창섭이 한 협박은 준서 씨와 바람피우는 걸 알리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협박은 익숙하게 받아넘기던 서하윤이 그 협박만은 못 견뎌 했어요. 그게 알려지느니 서창섭과 같이 죽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떨어지는 순간에도 최상혁 씨 이름을 부를 만큼 사랑한 건 분명해요.”
그 이야기를 하며 김민석은 자신이 아직 서하윤이 되기에는 많이 이르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은 제3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