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90화 (90/125)

90화

하준서는 한참이나 걸었다. 해변가를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준서 씨.”

김민석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준서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두 남자가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둘이 찾아와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하준서를 맞닥뜨리니 또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석 달간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둘을 만나 봐야 예전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대로 따라가면 자신은 두 번 다시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두 남자가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마크할 테니까. 그러니 도망가려면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이곳의 지리는 이제 훤히 꿰고 있다. 사람들 사이로 달려 들어가 도망치면 모텔에 잠시 들러 돈을 가지고 떠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마음을 먹은 김민석은 걸음을 느리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준서와의 거리를 벌렸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렇게 적당히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 즈음, 김민석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탁-

몸을 획 뒤로 돌리는 순간, 커다란 벽 같은 것에 거세게 부딪혔다. 김민석은 그대로 뒤로 휘청 넘어갔다가 누군가 허리를 붙잡아 준 덕에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검은 정장을 입은 최상혁이 김민석의 허리를 붙들고 서 있었다.

“상혁 씨…?”

김민석이 놀라서 부르자, 뒤에서 다가온 하준서가 어깨를 꽉 붙잡았다.

“설마 날 두고 또 도망가려고 한 거예요?”

하준서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물음이었다.

“툭하면 튀어 버리니, 몸에 칩이라도 심어 놓든지 해야지.”

최상혁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라면 진짜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일단 차에 타.”

최상혁이 김민석의 몸을 다시 돌려세워 본래 가던 방향으로 툭 밀었다. 하준서가 다정하게 손을 잡더니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그대로 손이 잡힌 채 딸려 가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떨쳐 내고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감쪽같이 숨었는데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육중한 덩치의 검은색 벤츠 앞에 도착했다. 최상혁이 뒷문을 열었다. 하준서가 김민석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자신도 뒷좌석에 올라탔다. 탁. 뒷좌석 문을 닫은 최상혁이 운전석으로 가서 올라탔다. 자동차 시동이 걸리고, 잠시 후 차 잠금장치가 소리를 내며 잠겼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목 마르죠? 이거 마셔요.”

하준서가 트레이에 포장해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를 꺼내 건네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걸 받아먹는 것도 웃겼지만, 어쨌든 목과 입이 바짝바짝 마른 건 사실이었다. 김민석은 컵을 조심스레 받아 빨대를 입에 물었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번을 크게 삼키니 갈증이 좀 가셨다. 그렇게 커피를 들이켜는 동안 하준서와 최상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이 너무나 무겁고 어색했다. 차라리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도망갔느냐고 질책이라도 해 줬으면 싶었다.

“사 오길 잘했죠?”

하준서가 웃으며 물었다.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뱉어 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 어떻게 찾았어요?”

“엄청 오랜만에 겨우 만났는데, 겨우 그게 궁금해요?”

하준서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 김민석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 상황에서 그동안 잘 있었냐고 안부 묻는 것도 웃기지.”

하준서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톡톡 두드리더니 내밀었다. 김민석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 하며 헛숨을 토했다.

그것은 소셜 미디어 화면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수천 번 공유된 사진이 한 장 떡하니 떠 있었다. 다름 아닌 일하고 있는 김민석의 얼굴이었다. 그 밑에는 희한한 이모티콘이 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해운대 카페에서 초미남 발견!!! ٩(๑>∀<๑)۶ #해운대#카페#미남#알바남#서하윤】

사진 속의 김민석은 손님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앞치마 끈에는 서하윤이라고 적힌 이름표까지 떡하니 달려 있었다. 사진을 올린 날짜는 딱 어제였다. 고작 하루 만에 수천 번이나 공유되어 인터넷에 싹 퍼진 것이다.

자신이 봐도 사진이 찍힐 만한 미모였다. 김민석은 핸드폰을 도로 하준서에게 건네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모텔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만 하고 현금만 쓰는 등, 나름 최선을 다해서 숨는다고 숨었는데. 이런 식으로 들켜 버리다니. 너무 어이가 없고 한심했다.

“유명하던데요? 해운대 카페에 돌연 나타난 서울 말 쓰는 초미남 아르바이트생. 고백하면 핸드폰 없다는 소리로 무조건 차 버리는 차가운 미남. 해시태그에 이름까지 붙어 돌아다녀. 그냥 인터넷에 해운대랑 서하윤 이름만 넣어 검색하면 어디서 일하는지 단번에 뜨던데.”

“후우….”

김민석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쪽팔림 가득한 한숨만 내쉬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볼 낯도, 용기도 없었다.

“이렇게 인터넷 창에 검색만 때리면 나올 걸, 우리는 그동안 돈을 허공에 뿌려 가며 무식하게 찾고 있었지 뭐예요. 왜 그래요? 혹시 쪽팔려서 그래요?”

역시 하준서는 날카로웠다.

“……네.”

김민석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석은 이대로 난쟁이가 되어 차 바닥 구석 어딘가에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차 문을 열고 도망갈까.’

김민석은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슬그머니 차 문을 훑었다. 잠금장치야 당겨서 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셈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준서가 갑자기 안전띠를 당겨서 철컥 채워 버렸다. 그저 안전을 위한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감옥의 철 족쇄에 묶인 기분이었다.

“빨리 출발하자. 밥은 집에 가서 먹고 싶네.”

하준서가 말했다. 최상혁이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내 아르바이트는!”

김민석은 출발하는 차를 보며 깜짝 놀라 눈을 가린 손을 떼어 내면서 외쳤다.

“괜찮아요. 아르바이트생 하나 도망간다고 가게 망할 것도 아닌데, 뭐.”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김민석이 다시 입을 떼자, 하준서가 갑자기 커피를 들어 빨대를 김민석의 입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쉬잇- 우리, 지금 화났어요.”

그 짧은 경고에 김민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김민석은 입에 물린 빨대를 간헐적으로 쭉쭉 빨며, 그간 정든 해운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창 너머로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고 올 때는 몰랐으나, 자동차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대장정이었다. 특히나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깔린 차 안에 셋이 앉아 있는 상황에서 몇 시간을 견디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하준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원래 말수 적은 최상혁이 뭐라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김민석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서울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속으로 기원했다.

차가 출발하고 거의 다섯 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서울로 접어들었다. 슬슬 눈에 들어오는 서울 풍경에 김민석은 차라리 안도했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깔린 좁은 공간에서 한시라도 바삐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시내로 접어드니 고속도로에서는 씽씽 달리던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올라오는 동안은 일찍 도착하길 빌었는데, 막상 목적지가 가까워지니 생각이 달라졌다. 차가 도착하면 셋은 단란하게 얼굴을 맞댄 채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고… 그것만 생각하면 당장 차 문을 열고 도망가고 싶어졌다.

물론 그런 생각만 하는 건 아니었다. 밀폐된 차 안에는 세 가지 향기가 풍겼다. 하나는 아메리카노에서 나는 옅은 커피 향이었고, 나머지 둘은 두 남자의 향기였다. 최상혁의 향수 냄새가 스민 체향과, 하준서의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향기가 코끝을 어지럽혔다. 솔직히 석 달여간 밤마다 너무나 그리워했던 향기였다. 김민석은 티 나지 않게 몰래몰래 그 향기들을 깊이 들이켜며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 부끄러웠다.

차가 아파트 입구로 접어들었다. 이제 김민석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접어들어 주차를 마치자 하준서가 손을 뻗어 안전띠를 풀어 주었다. 최상혁이 먼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려.”

“…….”

김민석은 꾸물거리며 차에서 내려섰다. 그런 와중에도 어디 도망갈 구석이 없나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물론 두 남자가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김민석은 마치 체포당한 범인처럼 두 남자에게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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