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부산.”
“뭐?”
하준서가 몸을 뒤로 틀었다. 최상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되풀이해 말했다.
“부산에 있을 거야. 그 이상은 나도 아직 몰라.”
하준서가 완전히 몸을 돌려 섰다. 그리고 팔짱을 끼었다. 최상혁을 뚫어져라 보는 눈 속에서 계산이 바삐 오갔다. 최상혁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지금 나랑 손잡자는 거야?”
“너랑 손 따위 안 잡아도 나 혼자 충분히 찾을 수 있어.”
“그럼 부산에 있다는 말은 왜 해 주는 건데.”
“서하윤이 왜 도망갔는지 너도 알고, 나도 아니까.”
최상혁의 말에 하준서가 입을 꾹 닫았다.
“새삼스레 서창섭과의 과거 때문에 떠난 건 아니야. 결국 남는 건 하나뿐이지. 너랑 나,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난 거야. 널 선택할 수도 없고, 날 선택할 수도 없고.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둘 다 떠나는 것뿐이었겠지. 떠나겠다고 말한다고 순순히 놔줄 인간들이 아니니 그렇게 몰래 도망가 버린 거고.”
“나는 이미 하윤이한테 이야기했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너를 택하든, 나를 택하든, 둘 다 좋으면 둘 다 끼고 살아도 나는 괜찮다고 말했어.”
하준서가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최상혁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서하윤이 날 택한다고 네가 잘도 떨어져 나가겠다.”
“그것도 말했어.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못 떨어진다고.”
“그러니 애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최상혁이 하준서를 질책했다. 그러자 하준서는 뻔뻔한 얼굴로 따져 물었다.
“그러는 너는, 하윤이가 날 택하면 순순히 떨어져 나가 줄 수 있어?”
최상혁은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이미 서하윤을 끼고 살기 시작한 그때부터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다. 언젠간 떠나고 싶어 하는 날이 오면 깨끗이 떠나보내 주자고. 하지만 막상 지금 이 순간, 최상혁은 차마 그렇다는 대답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머리가, 그리고 가슴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것 봐. 자기도 못 하는 주제에.”
하준서가 한껏 비웃었다. 최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하윤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도 그렇겠지. 그러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야. 하윤이를 공유하는 길.”
뿌득. 최상혁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아직 어린 녀석이다. 한창 나이인 녀석이 호기심에 다른 새끼랑 한두 번 붙어먹는 건, 그래…. 인내하고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서하윤의 인생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윤이가 우리 둘 중 하나를 택할 거였으면,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그렇게 도망가지는 않았을 거야. 선택받지 못한 사람 볼 낯이 없어 미안해할지언정 도망까지는 안 갔겠지. 하지만 우리 둘 다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갔어. 결국 우리 둘 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야. 나는 하윤이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에 자신이 있어. 하윤이는 절대 날 못 버릴 거야.”
“난 서하윤이랑 2년을 같이 보냈어.”
“그래. 2년. 긴 시간이지. 그 시간만큼의 지분이 있다는 거 인정해.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그러니 본처 자리는 양보해 주겠다는 거야. 나로서는 아주 큰마음 쓰는 거라니까. 나 정도 되는 인물을 첩으로 끼고 산다니, 그런 호사가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애인 관계에서 본처니 첩이니 하는 게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만, 하준서 정도의 자존심에 첩을 자처한다는 것 자체가 그로서는 엄청나게 양보를 한 거였다.
최상혁은 침묵했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하준서가 빙긋이 웃었다.
***
화창한 날이었다.
바람도 차갑지 않고 적당히 시원해서 출근하는 길부터 기분이 좋았다.
늘 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개와 코인사를 나누고 가게로 출근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매장을 한번 싹 청소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출근하고 약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요즘 들어 늘 같은 시간에 오는 아가씨 둘이 또 찾아왔다.
“아이스 아메 두 잔이요.”
늘 똑같은 것을 시키는 손님이지만, 먼저 속단하지 않고 주문하길 기다리는 것이 매너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맞으시죠?”
매뉴얼대로 주문을 확인하고 카드를 받아 계산했다. 그런 다음 안쪽으로 주문 용지를 건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금방 나오므로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저기….”
“네?”
계산을 마친 손님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김민석은 방긋 미소를 유지한 채 손님이 뒷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곳에서 일한 이후로 소위 말하는 작업을 걸어 오는 손님이 워낙 많았으므로, 이제는 대처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혹시…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잘생기셔서… 연락하고 지내고 싶어요.”
“아,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네?”
아가씨가 눈을 댕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살짝 부끄러움이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타이밍 좋게 커피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김민석은 언제 번호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냐는 듯 상냥하게 말하며 커피를 건넸다. 여자 손님 둘은 커피를 가지고 빠르게 멀어졌다.
“또 찼어?”
제법 친해진 같은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찬 건 아니고. 그냥 번호 알려 달라기에 핸드폰이 없다고 한 것뿐이야.”
김민석은 멀어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조금 미안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게 찬 거지 뭐. 요즘 세상에 핸드폰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하는 게 훨씬 나았을걸?”
“없는 걸 없다고 하지 그럼. 거짓말할 필요는 뭐야.”
“어쨌든. 저 손님들 또 당분간 안 오겠네.”
김민석의 말에 아르바이트생이 혀를 차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낮이 되자 손님이 적잖이 몰렸다. 정신없이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한낮의 햇살 때문에 들이치는 역광 탓에 손님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주문받은 음료를 내준 김민석은 다음 손님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이요.”
손님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김민석은 기계적으로 주문 창을 두드리다가 멈칫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손님을 쳐다보았다.
역광 때문에 실루엣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 많은 해운대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신에 넓은 어깨가 인상적이었다. 머리에는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글라스 아래 드러난,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입매는 숨길 수 없었다.
“…!!!”
김민석은 멍청하게도 몸을 감춘답시고 자리에서 확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 뭐 해요? 눈만 가리면 다 감춰진 줄 아는 낙타 흉내 내는 거예요?”
다정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빼꼼 들었다. 하준서가 가게 창 너머로 고개를 뺀 채 김민석의 행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안쪽에서 주문받은 음료를 제조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의아한 눈으로 다가왔다.
“아, 아는 사이라 잠시 인사하는 중이었어요.”
하준서가 아르바이트생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는 가게 창틀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빨리 계산해 줘야죠?”
김민석은 떠나온 지 두 달… 아니 거의 석 달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마주친 하준서의 태평한 행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감쪽같이 숨어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자신을 어떻게 찾았을까. 혼자 온 건지, 아니면 최상혁과 같이 온 건지…. 어쨌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동안 일에 길들여진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하준서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 결제했다. 카드를 다시 내밀자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돌려받았다. 김민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게 안쪽과 하준서를 번갈아 보았다. 하준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커피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서 있었다. 뒤에는 다른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워낙 존재감 짙은 하준서가 주문 자리에서 비키질 않으니 무슨 일인가 싶어 힐끔힐끔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나왔습니다. 트레이에 담아 드릴까요?”
김민석은 안쪽에서 만들어진 커피를 받으며 기계적으로 물었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세 잔을 트레이에 담아 내밀자 하얗고 예쁜 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게 창 안쪽으로 고개를 불쑥 들이밀더니 안쪽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하윤 씨 잠깐 빌려 가도 되죠?”
하준서의 뜬금없는 물음에 안쪽에서 지켜보던 아르바이트생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지금 바빠요. 뒤에 손님 많아요.”
김민석은 서둘러 말했다. 하지만 하준서는 김민석이 나올 때까지 비키지 않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버티고 서 있었다.
“야, 그냥 잠깐만 나갔다 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지 아르바이트생이 허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김민석은 결국 가게 밖으로 나가 하준서에게로 향했다.
“좀 걷죠.”
하준서가 말했다. 김민석은 한창 바쁜 가게를 힐끗힐끗 뒤돌아보며 하준서를 따라 걸었다. 석 달이나 그리워한 하준서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관절 현실감이 들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