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도대체 찾을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하준서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외쳤다. 서류를 훑어보던 최상혁은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로 찾아와 난리를 쳐 대는 통에, 하준서는 이미 이 회사에서 유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손을 써 두었으니 언론으로 새어 나가지는 않았지만.
“넌 피아니스트냐, 백수냐? 일정은 없다 치고, 연습은 안 해?”
최상혁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뭐, 이 씹팔놈아?”
서하윤이 감쪽같이 사라진 후로 점점 심성이 사나워져 가는 하준서가 곧바로 욕부터 뱉어 냈다. 저 모습을 서하윤도 봐야 하는 건데. 최상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빨리 찾아내. 빨리 찾아내라고!”
하준서가 최상혁이 보던 서류를 확 빼앗아 허공에 던지며 외쳤다. 나이가 대체 몇인데 하는 짓은 떼쓰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집에서 어화둥둥 오냐오냐하며 키운 남자 새끼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최상혁은 솟구치는 짜증에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찾고 있기는 찾고 있는 거지?”
“그렇게 못 믿겠으면 네가 직접 찾아보든가. 그 많은 돈 뒀다가 뭐 해? 흥신소에 때려 박아.”
“내가 그 짓은 안 해 봤을 것 같아? 그런데 그 새끼들 돈만 받아 처먹고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잖아. 여권도 없이 맨몸으로 사라졌어. 분명 한국 안에 있을 텐데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돼?”
“맨몸으로 사라졌으니 찾질 못하는 거야. 차, 핸드폰 다 두고 맨발로 도망갔어. 우리가 준 카드는 쓰지도 않고 있고.”
“그러니 더 걱정하는 거잖아. 돈도 없이 연고 없는 곳에서 혼자 무슨 고생을 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또 어떤 더러운 놈들이 달라붙어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하준서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입술은 여러 번 짓씹어 몇 군데나 터져 있었다. 항상 느긋하던 하준서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다니, 서하윤도 참 대단한 인사였다.
최상혁은 다시 서류를 집어 드는 대신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그라고 마냥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날, 그에게 자신이 서하윤이라고 알려 준 날.
혼자 있고 싶다고 한 서하윤은 방 창문을 통해 날아가듯 사라져 버렸다.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도망쳤다.
사라진 걸 인지했을 땐 아마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방 안에서 고양이들이 울어 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문을 열어 보니 서하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온 집 안을 뒤져 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신발조차 그대로였다. 설마 신발도 신지 않고 도망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수소문하는 것도 조금 늦어졌다.
다시 택시 회사와 콜택시 회사에 연락을 돌렸다. 그러다 겨우 비슷한 인상착의의 남자가 집 부근에서 택시를 타고 서하윤의 아파트에서 내렸다는 것. 그런 다음 다시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렸다는 소식을 입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서하윤은 똑똑하게도 두 사람 명의의 카드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서하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타인의 카드나 통장 내역을 뽑아내는 것도 요즘 세상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어쨌든 그렇게 알아낸 건, 서하윤이 부산역에서 통장에 있던 돈을 몽땅 출금했다는 사실. 딱 거기까지였다.
“까놓고 말해 봐. 너 하윤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나한테 말 안 하는 거 아니야?”
하준서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추궁했다. 그의 의심은 일정 부분은 사실이었다. 서하윤은 아마도 부산에 있을 확률이 높았고, 최상혁은 그것을 하준서에게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하준서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무작정 부산으로 향할 것이다. 매스컴을 적지 않게 탄 유명인이 부산을 싸돌아다니며 서하윤의 행방을 찾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뒤로는 서하윤을 찾으면서, 앞으로는 하준서가 사고를 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최상혁으로서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나날이었다.
친척만 아니었으면, 아니, 집안만 좀 한미한 놈이었으면 두들겨 패서 한동안 어디다 처박아 두는 건데….
최상혁은 낮게 혀를 차며 하준서를 쏘아보았다.
“왜 말을 못 해? 솔직히 너 정도 되는 인간이 하윤이 행방을 손톱만큼도 못 찾아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난 안 믿어. 너 지금 하윤이 독차지하려고, 나 하윤이한테서 떼어 내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하준서가 끈질기게 추궁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마. 머리가 다 지끈거리니까.”
최상혁은 이마를 짚으며 사납게 말했다.
하준서는 확실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온 부산 바닥을 다 뒤지게 시키면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찾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최상혁에게는 당장 서하윤을 찾는 것 자체가 급하지는 않았다. 영악하고 똑똑한 아이다. 현금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을 터였다.
그의 말처럼, 현재 최상혁에게는 서하윤을 찾는 것보다는 하준서를 서하윤에게서 떼어 내는 게 우선이었다. 서하윤을 찾아온다고 해도 하준서가 옆에 들러붙으면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 끈질긴 거머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떨어져 나가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견뎌 냈다.
하지만 이미 파악하고 있었나 보다. 하준서는 끈질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최상혁도 이제 슬슬 징징대는 하준서를 상대할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준서가 별안간 표정을 싹 바꾸었다. 초조함과 짜증, 분노가 어려 있던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을 바꾸는 수가 있어.”
“또 무슨 말을 지껄이려는 거야.”
“하윤이, 찾으면 적어도 너랑은 공유할 의사가 있었다고. 누가 뭐래도 하윤이를 먼저 발견하고 케어해 온 건 너였으니까.”
“공유?”
최상혁은 어이없는 단어에 눈매를 찌푸렸다.
“그래. 공유. 내가 팔자에도 없는 첩 노릇까지 해 주겠다고 큰마음 쓰고 있었던 거라고, 이 병신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도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하윤이 이제 내가 찾을 거야. 찾아서 내가 가질 거야. 너한테는 한 조각도 안 나눠 줘.”
“남의 애랑 멋대로 붙어먹은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지금. 하준서, 진짜 뒈지고 싶어?”
서하윤을 독차지하겠다는 당당한 선언에, 최상혁도 더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나랑 얌전히 손잡고 하윤이나 찾아내지 그랬어. 내가 못 참고 떨어져 나갈 때까지 일부러 하윤이 찾는 거 미루고 있잖아. 네 그 더러운 꿍꿍이속을 내가 모를 것 같아?”
“하준서. 지금 나랑 맞짱이라도 뜨자는 거야?”
“미쳤어? 너 같은 조폭 나부랭이랑 맞짱을 뜨게. 그딴 건 안 해. 그리고 상처 많은 하윤이한테는 너 따위보다 나같이 곱게 자란 도련님이 더 잘 어울려. 나랑 같이 있을 때 하윤이가 얼마나 편안해하는 줄은 알아? 일한답시고 하루 종일 하윤이 방치해 놓는 너랑은 차원이 달라, 나는.”
하준서의 말에 최상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일만 하지 말고 나랑도 좀 놀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이렇게 방치 플레이 할 거냐고.’
‘내가 너처럼 집에서 놀고먹는 사람으로 보여? 돈은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아? 어리광 적당히 부려, 서하윤.’
‘싫은데. 자꾸 나 이렇게 방치해 두면 나도 다 생각이 있어. 나 같은 인물을 집에만 처박아 놓고 내내 일만 하면 불안하지도 않아?’
‘불안해야 하나?’
‘당연히 불안해해야지. 나 같은 애인을 두고 안 불안해할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을 것 같아?’
서하윤의 말이 귓가에 쟁쟁했다.
알고 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다. 하지만 일하느라 바빠 매일 얼굴 보는 시간이라고는 퇴근 뒤 밤 시간뿐이었다. 항상 같이 좀 있어 달라고, 같이 놀아 달라고 졸라 댔는데. 아직 어린 녀석의 칭얼거림으로 치부해 버렸다.
“나도 못 찾는 서하윤을 네가 무슨 수로 찾아.”
최상혁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하준서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벌써 두 달이 넘었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이판사판이야. 실종자 찾는다고 현상금 걸어 전국에 전단지라도 뿌리지 뭐.”
장난처럼 말하는 것 같지만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최상혁은 골치가 아파졌다. 서하윤 정도 외모의 실종자를 찾는답시고 사진을 뿌렸다가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탈 것이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여기까진가.’
최상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초조한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예쁘장한 녀석이다.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며 살던 당시에도 허구한 날 성추행이며 성희롱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나마 성질 더럽고 앙칼지기라도 했지, 김민석이라는 인격으로는 그걸 어찌 상대해 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장 큰 것은 그리움이었다. 품에서 떠나보낸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녀석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비록 자신이 알던 서하윤은 다른 인격 뒤에 숨어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녀석은 녀석이었다. 서하윤은 최상혁의 것이었다. 최상혁이 마련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최상혁이 주는 물과 영양을 섭취하며, 최상혁의 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럼 각자 잘해 보자고.”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쌩하니 몸을 돌렸다. 최상혁은 그런 하준서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입을 열었다.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