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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87화 (87/125)

87화

그러고 보면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짧디짧은 김민석의 인생에는 그 두 남자밖에 없었다. 그 둘이 김민석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니 이렇게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김민석은 그렇게 카페에 앉은 채 해가 저무는 바다를 구경했다. 그러다 바다가 완전히 컴컴해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변을 벗어나 정처 없이 번화가 주변을 떠돌다 보니 모텔촌이 나타났다. 김민석은 개중 가장 최근에 리모델링한 것 같은 깔끔한 모텔을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 열흘 치 숙박료를 현금으로 계산했다. 이상하게 보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직원은 별반 특이한 일도 아니라는 듯 방 열쇠를 건넸다.

모텔을 잘 골랐는지 방은 매우 깔끔하고 모던했다. 한쪽에는 컴퓨터까지 있었다. 핸드폰이 없어서 검색도 할 수 없었던 터라 컴퓨터가 매우 반가웠다. 김민석은 곧장 컴퓨터를 켜고 일자리 사이트에 접속했다.

지역을 부산, 해운대구로 지정했다. 기왕 부산까지 내려왔으니 해운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일자리가 쭉 떴다. 의외로 상당히 일자리가 많았다. 김민석은 그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훑었다. 고졸에 경력 없음. 치명적인 이력이었지만 다행히 그래도 일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눈에 보였다. 주로 해운대에 있는 식당이나 카페였다.

당장 지원을 해 볼까…. 아니면 기왕 바닷가에 왔겠다, 돈도 있으니 며칠만 노닥거리며 바닷가를 즐겨 볼까.

이런 여유로운 고민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돈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석은 채용 공고 사이트를 그대로 둔 채 다른 사이트를 새로 띄웠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최상혁의 이름을 쳤다.

“…오오?”

김민석은 인터넷 화면에 뜨는 내용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넷에는 최상혁의 사진과 프로필이 당당하게 떠 있었다. 그는 대부업을 전문으로 하는 모 저축 은행 대표 이사였다.

관련된 기사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프로필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상당히 당당한 신분이었다.

“조폭 비스무리한 거라고 하더니. 다 구라였나.”

김민석은 화면 속 최상혁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긴, 진짜 그냥 조폭 나부랭이였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외네. 의외야.”

김민석은 연신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다른 창을 하나 띄워 하준서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전에 한번 검색해 보았던 것처럼 그의 사진과 프로필, 기사 따위가 주르륵 떴다. 최상혁과 하준서의 프로필 창을 나란히 띄워 놓고 응시하던 김민석은 문득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에게서 도망친 주제에 두 사람 얼굴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이 어쩐지 대단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말도 없이 도망친 것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당당하게, 이제 혼자 살아 보겠다고 선언하고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두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최상혁이 좋았다. 하준서도 좋았다.

꿈속에서 본 서하윤도 최상혁을 사랑했고 하준서를 좋아했다.

양다리를 걸친 서하윤을 그렇게 욕했는데, 이제는 그를 욕할 처지도 못 되었다. 결론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두 사람을 볼 낯이 없었다. 만약 두 사람이 자신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 이렇게 도망을 선택할 정도였다.

김민석은 화면에 두 사람의 프로필을 띄워 놓은 채, 침대로 기어 올라가 베개를 끌어안고 누웠다. 두 남자의 품을 내버려 두고 모텔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것이 너무 외롭고 서러웠다. 그냥 당장에라도 다시 달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양심적으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서하윤인 이상, 이제는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해야만 했다. 양쪽 중 누구를 택하든, 혹은 택하지 않든 간에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일 터였다.

***

솔직히 말해서, 서하윤의 얼굴은 면접 프리패스상이었다. 이 정도 외모의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민석은 첫 번째 면접을 간 가게에서 바로 채용되었고 당일부터 일하게 되었다. 정규직으로 채용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했다. 정규직으로 일했다가는 4대 보험이 들어갈 것이고, 그럼 최상혁의 레이더에 걸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아쉽지는 않았으므로 근무 시간은 짧게 잡았다. 김민석은 일단 지금 이 기간을 자신의 사회화 트레이닝 시간으로 정했다. 너무 과해서 질려 버리지 않을 만큼, 하지만 사회에 적응은 할 수 있을 만큼만 일하며 나머지 시간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기로 한 것이다.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매니저와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친절했고, 가끔 일이 손에 익지 않아 버벅거려도 마음 넓게 이해해 주었다. 그 친절함과 관대함에는 서하윤의 빛나는 외모가 작용했을 터였다.

처음에는 뒤에서 음료 제조만 하다가 고객 응대까지 시작하고 나니 외모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계산을 위한 카드와 함께 연락처가 적힌 쪽지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당돌한 아가씨들은 대놓고 연락처를 묻거나, 이름을 물어보고는 했다. 처음에는 버벅이며 겨우 상대해 내던 김민석도 금세 요령이 생겨 웃으면서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사회 적응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일을 마치고 나면 김민석은 해운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밥을 먹고, 해변을 산책하며 소화를 시켰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혼자 바다를 보며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일까.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고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서하윤이라는 사실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만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처음 숙박한 모텔에 달방을 얻어 계속 살게 되었는데, 사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문제는 밤이면 찾아오는 깊은 외로움이었다. 김민석의 인격에게는 두 남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서하윤에게도 두 남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었던 두 남자 곁을 떠나서 매일 밤을 홀로 잠들려고 하니, 외로움이 사무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겠지….”

김민석은 컴컴한 방 안에서 베개를 꼭 끌어안고 모로 누운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가슴에 사무치는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두 남자가 자신을 찾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들었다. 그러면서도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결심은 굳건했다.

시간은 느리면서도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김민석은 첫 번째 월급을 받았고,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모텔 방에서 혼자 맥주 파티를 열었다. 가게에 오는 단골들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매일 바닷가를 산책하는 개와는 코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자주 가는 밥집 이모와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렇게 김민석은 해운대에서 작게 자리를 잡아 갔다.

물론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해운대 안쪽으로 들어가면 번화한 오피스텔촌이 있었다. 거기에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얻고 싶어서 몇 번 보고 다녔는데, 막상 계약은 하지 못했다. 서하윤의 명의로 집을 얻었다가는 최상혁의 레이더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에다. 덕분에 김민석은 여전히 모텔 달방 신세였다. 가게에서도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겠다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거절해야만 했다.

김민석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붕 뜬 상태로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남자를 대면할 용기도 없었고, 둘 중 하나를 택할 결심도 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느니, 이렇게 혼자 외롭게 독립하는 쪽이 나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좀 한심한 일이었다.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두 남자와 보낸 시간도 매우 짧았다. 차라리 이곳 해운대에서 혼자 보낸 시간이 더 길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뭐 대단한 사랑에 빠질 시간이 있었다고 이러는 걸까. 혹시 서하윤의 감정이 자신에게 전이된 걸까? 그래서 최상혁과 하준서, 둘 다 손에서 놓기가 힘든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김민석은 서하윤이 만들어 낸 인격체에 불과하니까. 본 인격의 영향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양다리는 아니라고. 이 바람둥이야.”

김민석은 자신 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서하윤에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외로움은 감당해야 마땅한 몫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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