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85화 (85/125)

85화

비틀비틀 걸어 방으로 향하려니 집 안을 배회하고 놀던 철이와 순이가 방 안으로 쏙 밀고 들어왔다. 따라 나오던 두 남자는 이제 복도 저쪽에 나란히 선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김민석은 두 남자를 한번 쳐다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 그대로 풀썩 드러누웠다.

***

‘뭘 그렇게 쳐다봐?’

비스듬히 누운 채 철이의 뱃살을 만지작거리던 서하윤이 물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서하윤을 응시하던 하준서가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둘 다 나체였고 한차례 섹스가 끝난 후였지만 어색한 기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예뻐서.’

하준서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서하윤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묘한 반발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왜요? 예쁘다는 말, 마음에 안 들어요?’

하준서의 물음에, 서하윤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난 그냥 내 얼굴이 싫어. 너무 잘나도 좋은 일 하나도 없거든.’

서하윤의 말에 이번에는 하준서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 치고는 조금만 못생겨도 오징어라면서 인상부터 찌푸리잖아요?’

‘못생긴 건 질색이니까. 특히 못생긴 것들이 들이대면 토 나온다고.’

서하윤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그 나이 또래로 보였다.

‘잘생긴 것도 싫다. 못생긴 것도 싫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하준서가 서하윤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놀리듯 말했다.

‘나는 그냥… 평범한 게 좋아.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딱 평범한 외모.’

‘흐음… 난 이미 잘생기게 태어나서 하윤이 맘에 쏙 들기는 글렀네.’

‘알면 됐고.’

하준서가 머리를 기울여 입술을 맞대었다. 둘은 가볍게 키스했다. 애옹- 배를 만지는 손이 멈춘 것이 불만스러운 듯 철이가 소리 높여 울었다.

‘오늘은 자고 가요.’

키스를 마친 하준서가 속삭였다. 속삭임에서 진한 유혹이 느껴졌다.

‘안 돼. 잠은 집에서 자야지.’

방금 전까지 달콤한 키스를 한 주제에, 서하윤은 딱 잘라 거절했다.

‘나랑 한 번도 같이 밤새 있어 준 적 없는 거 알아요?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튼 외박은 안 돼.’

서하윤은 단호했다. 하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하윤이 집에 놀러 가는 건? 그것도 여전히 안 돼요?’

‘안 돼.’

서하윤의 연이은 거절에 하준서의 미소가 옅어졌다.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보는 서하윤의 눈도 편하지는 않았다.

‘외박도 안 된다. 혼자 산다면서 집에 초대도 안 된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하윤아. 나 네 엔조이 상대야? 내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 돼?’

하준서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그동안 많이 참은 상태였다. 그걸 아는 서하윤은 이번만큼은 선뜻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까진 안 바라. 그래도 이건 물어봐야겠어. 하윤아, 너 나 좋아하긴 해? 내가 너한테 의미는 있어?’

서하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 말이나 툭툭 잘도 뱉어 대던 입이 꼼짝을 하지 않자 하준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하- 진짜….’

하준서가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때, 서하윤이 하준서의 팔목을 붙잡았다.

‘낮에는 괜찮아.’

하준서가 멈칫하며 서하윤에게 시선을 보냈다. 서하윤이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뗐다.

‘밤까지는 안 되지만 저녁까지는 우리 집에서 같이 있어도 돼. 그 이상은 곤란하지만….’

‘하윤이 집에 초대해 준다고?’

물음에 서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에 아직 미소는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내가 물은 건?’

하준서가 물었다. 서하윤이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우물쭈물하며 입을 뗐다.

‘…아해.’

‘음? 안 들리는데?’

하준서가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좋아한다고!’

서하윤이 버럭 외쳤다.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겠느냐는 얼굴이었다. 하준서의 얼굴에 금세 달콤한 미소가 맺혔다. 그걸 본 서하윤의 얼굴에 안도가 스쳐 지났다.

‘정말 내가 좋아, 하윤아?’

하준서가 재차 물었다.

‘그래. 좋아하니까 이렇게 맨날 붙어먹지. 싫어하는 놈이랑 붙어먹고 같이 뒹굴대는 취미 없어.’

서하윤의 어조는 불퉁했다.

‘내 어떤 점이 좋은데?’

하준서가 잔뜩 흥이 나서 물었다. 서하윤은 적당히 하라는 눈길을 보냈지만, 신난 하준서는 조금만 더 말해 달라며 졸라 댔다.

‘응? 그것만 말해 봐. 내 어떤 점이 좋은데?’

‘너는… 다정해서 좋아. 다정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시간만 나면 항상 나랑 붙어 있고 싶어 하고. 내 더러운 성질머리도 잘 받아 주고… 같이 있으면 그냥… 편해.’

‘게다가 부자고, 잘생겼고, 선물도 잘 사 주고, 섹스도 잘하고?’

하준서가 웃으며 제 자랑을 늘어놓았다. 서하윤이 피식 웃으며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항의하는 철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보는 하준서의 눈가에 부드러운 애정이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좋아?’

서하윤이 문득 물었다.

‘응?’

하준서가 되물었다.

‘내가 그렇게 좋으냐고. 날 그런 눈으로 보잖아. 되게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예뻐 죽겠다는 눈이 아니라 사랑스럽다는 눈길이지.’

서하윤이 철이를 쓰다듬던 손을 멈칫했다.

‘내가 사랑스러워?’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윤은 대단히 생경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아니, 그냥….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봐서.’

‘설마.’

하준서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하윤이 웃음을 멈추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짜야…. 예쁘다. 색기 있다. 꼴린다. 미인이다. 연예인 해도 되겠다. 뭐 그런 말은 항상 듣는 거지만 사랑스럽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봐.’

거기까지 말한 서하윤이 하준서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같이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데다 속물적인 인간이 왜 사랑스러워? 대체 어디가?’

‘사랑에 이유가 필요해?’

하준서의 물음에 서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하준서가 손으로 서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서하윤이 이내 입술을 비죽였다.

‘어린애 취급한 적 없어. 하윤이 같으면 어린애랑 이런 짓 하겠어?’

‘이런 짓?’

‘그래. 이런 짓.’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서하윤의 입술을 덮쳤다. 진득한 키스가 쏟아졌다. 고양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둘은 그대로 들러붙은 채 침대 위를 뒹굴었다. 혀와 혀가 얽히고, 다리와 다리가 얽혔다. 완전히 식었던 몸이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김민석은 눈도 뜨지 않은 채 그대로 팔로 눈가를 가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미쳤구나, 서하윤.”

중얼거림에 황당함이 묻어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하윤은 최상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보았을 때 분명 그랬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순간조차 최상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 꿈을 보니 또 달랐다. 물론 하준서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좋아한 것은 분명했다. 결국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진짜 마음을 준 애인이었던 것이다.

본래 이것은 서하윤의 문제이지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하윤이 누굴 진짜 좋아했든지, 바람을 피웠든 말든 그건 김민석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김민석은 사실 서하윤이었고, 따라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맙소사….”

김민석은 이것이 차라리 꿈이길 바라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이러다 꿈에서 깨고 나면 자신의 고시원에서 눈을 뜨는 거다. 그리고 유쾌하게 웃겠지. 별 희한한 꿈을 다 꾸었다고 말이다.

애옹-

하지만 고양이 울음이 현실을 일깨웠다. 침대에서 뒹구는 바람에 옆자리에서 자고 있던 철이와 순이가 잠에서 깬 것이다. 김민석은 조금 전 꿈에서처럼 철이의 뱃살을 주물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