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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84화 (84/125)

84화

드드드드드-

갑자기 울리는 진동음에 어깨가 움찔했다. 김민석은 자신의 귓가에서 통화 연결음을 울리는 핸드폰과,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둔해진 것처럼 쉽게 돌아가지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하준서가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김민석에게 내밀었다. 김민석은 망설이다가 그것을 받아 망가진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발신자 번호가 떠 있었다. 지금 김민석이 귓가에 대고 있는 그 핸드폰의 번호였다!

“뭐….”

김민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몸이 오싹해졌다. 서둘러 걸고 있던 전화를 끊어 버리자, 망가진 핸드폰의 진동도 뚝 끊어졌다.

“준서 씨?”

김민석은 액정이 망가진 핸드폰이 꼭 시퍼렇게 선 칼날이라도 되는 양 떨리는 손으로 잡은 채 하준서를 불렀다. 평소에 김민석이 조금만 겁먹은 표정을 지어도 바로 달래 주던 상냥한 하준서는, 이번만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핸드폰, 확인해 봐요. 그 안에 하윤이 어디 있는지 다 들어 있어요.”

하준서가 말했다. 김민석은 이번에는 최상혁을 쳐다보았다. 최상혁이 하준서의 말이 맞는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새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액정이 부서진 핸드폰을 손에 제대로 쥐었다. 그리고 화면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띄운 것은 통화 목록이었다. 발신 내역은 일절 없고 부재중 전화만이 수두룩하게 떠 있었다. 모든 부재중 전화는 같은 번호였다. 바로 김민석의 새 핸드폰 번호였다.

꿀꺽.

다시 마른침이 넘어갔다. 액정 위를 맴도는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렸다. 김민석은 이번에는 문자를 클릭했다. 수신된 문자가 쭉 떴다. 최근 수신된 문자를 띄웠다.

문자 내용을 확인한 김민석은 호흡을 멈추었다.

저는 김민석입니다. 지금 핸드폰 가지고 계신 분 연락 주세요.

핸드폰 주인입니다.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그 핸드폰 주인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누가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혹시 지금 그 핸드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하윤 씨인가요?

모두 자신이 김민석의 핸드폰으로 보냈던 문자였다. 이게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김민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 연락처와 갤러리 따위를 뒤졌다. 하지만 이건 김민석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이거… 이상해요. 내 핸드폰 아닌데, 왜 내 번호로 연결이 되는 거죠?”

김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서하윤 핸드폰이야.”

최상혁이 대답했다. 김민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망가졌다고…. 그래서 새 핸드폰을 준 거였잖아요?”

그 때 하준서가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 봐요. 핸드폰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면, 애초에 병원에서 우리한테 어떻게 연락을 했겠어요.”

하준서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랬다. 핸드폰이 작동 불능이었다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로 두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걸 왜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게 바로 망가졌다고 했던 하윤이 핸드폰이에요. 하윤 씨는 김민석 핸드폰에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번호는 서하윤의 번호였어요. 하윤 씨는 지금껏 자기 자신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준서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머리에 렉이 걸린 것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가요.”

어쩐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최상혁이 비틀거리는 김민석의 팔을 당겨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김민석은 액정에 금이 간 핸드폰을 닳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최상혁이 문득 다른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파일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김민석은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김민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육원 출신 22세 남성을 추적한 흔적이 담겨 있었다. 서류를 몇 장 팔락팔락 넘겨 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대한민국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김민석이라는 사람은 없어.”

최상혁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김민석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의사가 너에게 진단을 뭐라고 내렸지?”

최상혁이 물었다. 김민석은 병원에서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금 더 심도 있게 상담을 해 봐야겠지만 현재까지로 봐서 환자분은 해리성 인격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통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생기는 기억 상실증이나 해리성 장애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차차 좋아지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치료도 꾸준히 병행해 줘야 합니다.’

‘보통 이 정도의 해리성 장애가 오면 단기간이라도 입원 치료를 권하는데…. 이번 경우는 강한 두부 충격에 의해 발생한 케이스라, 입원 치료보다는 예후를 지켜보면서 상담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해리성… 인격 장애?”

“그래. 의사 말을 잘 들었어야지. 넌 김민석이 아니야. 서하윤이지.”

최상혁이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김민석은 바로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하준서가 한발 빨랐다.

“최상혁! 말을 좀 부드럽게 해. 또 놀라서 공황 발작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

“이 상황이 지금 말을 돌려 한다고 해결될 상황으로 보여? 굳이 알아야겠다잖아. 어차피 알아야 했을 일이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럼 너는 왜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데?”

“그러는 너는?”

둘이 말다툼을 시작했다. 김민석은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들으며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영혼이… 바뀐 게 아니라고? 진짜 해리성 인격 장애가 생겨서…. 내가 서하윤이었다고?”

김민석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자신은 김민석이었다. 정말이었다. 22년간 살아온 김민석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생생하다. 그런데 그저 서하윤이 만들어 낸 인격일 뿐이라고? 애초에 없던 인간이라고?

그사이 말다툼을 끝낸 하준서가 옆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해 봐요, 하윤 씨. 자신이 김민석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느 보육원을 나왔는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어느 고시원에 살았는지, 어디서 일했는지. 단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나는 게 있어요?”

“……없어요. 분명히 보육원에서 자랐고 고시원에서 살았고, 아르바이트했는데. 막상 생각하려고 하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떠오르지 않아요.”

“결국 김민석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건 핸드폰 번호 하나뿐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서하윤의 핸드폰이었고. 그렇죠?”

“…네.”

김민석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원리는 정확히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어요. 하윤이가 서창섭 때문에 죽을 뻔했을 때, 아마 하윤이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을 거예요. 자신의 상황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요. 그래서 김민석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냈겠죠.”

“그런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예요.”

김민석은 반박했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하지만 영화도 실제를 바탕으로 해서 만드는 거니까요.”

“그럼 왜 하필이면 저였을까요? 왜 하필 만든 게 김민석이었죠? 나는 볼품없고, 가진 것도 없고, 부러워할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이잖아요.”

가만히 있던 최상혁이 입을 열었다.

“착취하는 가족이 없고, 학대당한 과거가 없고, 남자 홀리지 않는 평범한 외모에 순결한 몸.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벌어먹고 사는 김민석이야말로 서하윤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지.”

“서하윤이 되고 싶었던 게, 고작 김민석이었다고요?”

김민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최상혁이 뭐라 입을 떼려 했다. 김민석은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그만! 그만해요, 우리. 나 지금 머리도 너무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해도 하나도 안 가고…. 그냥, 잠깐만 그만해요.”

서하윤을 찾는 것은 자신이 바랐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이해도 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았다. 그저 황당했다.

“그래요.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요.”

하준서가 다정하게 달랬다. 김민석은 책상을 짚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자신을 부축하려는 하준서를 손을 들어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요. 내 방에 가서 혼자 좀 있을게요. 괜찮죠?”

“…그래요. 방에 가서 좀 쉬어요. 한숨 자도 좋고.”

김민석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밀어 넣으며 서재 밖으로 나섰다. 그 와중에도 핸드폰 두 개를 모두 챙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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