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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83화 (83/125)

83화

“…최상혁….”

김민석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눈을 뜨자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하윤.”

옆에서 최상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리자 와이셔츠 차림의 최상혁이 보였다.

“하윤 씨. 괜찮아요? 한참 잤어요.”

반대쪽에서 하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돌리자 침대에 걸터앉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하준서가 보였다.

“…괜찮아요.”

김민석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시선을 방 천장으로 돌렸다. 꿈의 여운이 너무 진해서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이번 꿈은 조금 달랐다. 평소 꿈속에서 김민석은 제삼자의 기분이었으나, 이번에는 완전히 서하윤에게 동화되어 있었다. 서하윤이 느꼈던 깊은 절망과 두려움, 분노가 너무나 강렬해서 가슴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특히 옥상에서 떨어지던 순간 느낀 회한의 감정이 온몸을 무겁게 지배했다.

김민석은 그대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물만 줄줄 쏟았다.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김민석의 손을 붙잡은 채 가만히 시선을 보내왔다.

“서하윤….”

김민석은 한참 만에 눈물을 멈추고 입을 뗐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한 짝씩 잡은 두 남자의 손을 꽉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서하윤은 건물에서 뛰어내린 게 아니었어요.”

“뭐?”

“뭐라고요?”

두 남자의 기세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서하윤은 그날 서창섭에게 불려 가서 평소처럼 협박을 당했어요. 서창섭이 말한 조건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고…. 자신이 절대 서창섭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서하윤은 차라리 놈이랑 같이 죽으려고 했어요.”

“…….”

“그렇게 몸싸움이 일어난 와중에 추락한 거예요.”

“그 씹새끼가….”

최상혁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김민석의 손을 한번 꽉 잡아 주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가 뭘 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김민석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서창섭은 세상에서 사라져 마땅한 쓰레기였다.

“하윤이한테도 좋은 날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항상 안 좋은 기억만 떠올려서 어떡해요.”

하준서가 손가락으로 눈가에 남은 눈물을 훑어 주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덕분에 서하윤이 어쩌다 건물에서 떨어진 건지 알 수 있었잖아요.”

그렇게 말한 김민석은 코를 훌쩍이며 옅게 웃었다. 하준서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김민석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잠시 그런 하준서를 응시하던 김민석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꿈속에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최상혁이 자리를 비웠으니 좋은 타이밍이었다.

“준서 씨. 서하윤은요….”

“쉿-”

하준서가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것처럼 김민석의 입을 막았다. 그의 다정한 갈색 눈에 무드 등이 반사되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런 말, 아직은 하지 마요.”

“그치만….”

“서하윤의 기억이 전부 다 난 건 아니죠?”

“네.”

“그럼 그렇게 속단하지 말아요. 사람한테는 다양한 기억이 있고, 다양한 감정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단편적인 것만 보고 그렇게 속단하면 안 돼요.”

하준서의 말을 들어 보니 그가 옳은 것 같았다. 김민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서가 빙긋 웃었다.

달칵-

타이밍 좋게 최상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 새끼랑 다시는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 일 없을 거야.”

최상혁이 단정하듯 말했다. 그가 밖에서 무슨 통화를 하고 왔는지 확실해졌다. 김민석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사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최상혁의 무섭던 얼굴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 행동에서 자책감이 묻어났다. 김민석은 생각했다. 서하윤의 어떤 점이 이 두 남자를 그렇게나 매료시킨 걸까. 솔직히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런 서하윤이 참 부럽다는 것이었다.

문득 이제 때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꿈속에서 서하윤의 마지막을 본 것 또한 아마도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준서 씨.”

김민석은 상체를 일으키며 하준서를 불렀다. 하준서가 재빨리 등 뒤에 베개 두 개를 넣어 편히 기대앉게 해 주었다.

“왜요? 목말라요? 아니면 배고파요?”

하준서가 상냥하게 물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 이제 서하윤을 찾아야겠어요.”

“…….”

“…….”

두 남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닫았다. 하지만 김민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기 전에 준서 씨가 그랬잖아요.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상혁 씨도 전에 그런 식으로 말했었잖아요. 지금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던 거, 아직 기억해요.”

“그렇지만, 하윤 씨. 잠들기 전에 상태 안 좋았던 거 기억 안 나요? 서하윤 찾을 수 있다는 말만으로도 그랬잖아요. 굳이 지금 찾아야겠어요?”

김민석은 맑은 눈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두 사람은 찾고 싶지 않아요? 서하윤 사랑한다면서요. 상혁 씨, 서하윤 사랑해요?”

“…그래.”

“준서 씨는요?”

“…사랑해요.”

두 남자 모두 한 박자 늦게나마 대답을 했다. 두 남자 입으로 다시 한번 듣고 나니 어쩐지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래. 이렇게 사랑한다는데 서하윤 돌려줘야지. 그게 맞는 거지.

“그럼 뭘 망설여요? 사랑하는 사람 되찾아야죠.”

김민석은 또박또박 말했다.

최상혁과 하준서의 표정이 묘했다. 김민석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되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실은 두 사람 다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쭉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두 사람이 왜 서하윤 찾는 걸 마다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가요.”

“하윤 씨, 그건….”

하준서가 입을 뗐지만 막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김민석은 최상혁을 보았다. 최상혁 역시 입을 굳게 다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이해가 안 가요. 서하윤을 사랑하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그런데도 찾지 않는 것도.”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김민석의 손을 꽉 쥐었다.

“그건요, 하윤 씨. 하윤이 지금 상태가 너무 좋아 보여서 그래요. 내가 어제 말했죠? 하윤이를 보면 항상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고. 가끔 눈에 스치는 허무함이 얼마나 짙은지 보는 사람 마음이 다 무너져 내렸어요. 그런데 지금의 하윤이는 그게 없어요. 너무 씩씩해요. 예전보다 더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그대로 뒀으면 했어요. 적어도 나는 그래요.”

“서하윤이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건 아마도 서창섭 때문이었을 거예요. 과거에 학대당했고, 계속 협박당해 왔으니까 트라우마가 심했겠죠. 하지만 이제 서창섭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차차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서창섭이 사라진 걸 알면 서하윤도 돌아올 마음이 생길 거예요.”

김민석은 서하윤의 몸을 차지하고 싶은 주제에, 이렇게 두 사람을 설득하는 자신이 대단히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옳은 일을 하는 게 맞았다. 그래야 평생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최상혁과 하준서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김민석은 두 사람이 눈으로 나누는 대화를 굳이 엿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따라와.”

문득 최상혁이 말했다. 하준서가 김민석을 부축해 침대에서 일으켰다. 최상혁이 앞장서서 방을 나서고 둘이 뒤따랐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2층에 있는 한 방이었다.

최상혁이 문을 열고 조명을 켰다. 방 안은 깔끔하게 꾸며진 서재였다. 최상혁이 방 중앙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집어 꺼냈다.

탁-

최상혁이 책상 한가운데 물건 하나를 내려놓았다. 김민석은 의아한 눈으로 그 물건을 보았다.

그것은 핸드폰이었다. 액정에 여러 개의 금이 간 핸드폰은 더는 쓰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었다. 최상혁이 보란 듯이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망가진 겉모습이 무색하게도 화면이 떠올랐다.

“이게… 뭐예요?”

김민석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옆에 서 있던 하준서가 한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최상혁이 새로 사 준, 여태 김민석이 쓰던 핸드폰이었다.

“김민석 핸드폰으로 전화 한번 걸어 봐요. 혹시 받을 수도 있잖아요.”

“지금요?”

“네. 지금.”

핸드폰을 내미는 하준서의 얼굴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이게 서하윤을 찾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받았다. 그리고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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