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상혁 씨. 저예요.”
김민석은 핸드폰을 귀에 대자마자 말했다.
-…뭐야, 왜 토해? 괜찮아? 공황 발작 같다며. 갑자기 왜 그런 거야. 그 새끼가 뭘로 놀래켰는데?
최상혁이 질문을 쏟아냈다. 항상 침착하기만 한 그답지 않게 많이 놀란 기색이어서 어쩐지 웃음이 났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좀 그랬는데 이제 다 괜찮아졌어요. 둘이 싸우지 마세요.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너무 민망하고 미안해요.”
-이런 건 싸우는 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지금 집으로 갈 테니까….
“아뇨. 안 와도 돼요. 일 바쁘잖아요. 마저 하고 와요. 여기 아주머니도 있고 준서 씨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내가 집에 갈 때까지 꼼짝 말고 누워 있어.
“네. 알겠어요. 끊을게요.”
-그래.
김민석은 혹시 핸드폰을 돌려주면 또 둘이 싸울까 싶어 얼른 전화를 끊었다.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들어와 자신의 핸드폰을 가지고 나갔다.
하준서가 물수건을 반대로 뒤집어 주었다. 이마가 다시 시원해졌다.
“미안해요. 그 얘기에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요.”
하준서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사과했다.
“아니에요. 준서 씨 잘못도 아닌데요. …그래서, 서하윤은 지금 어디 있어요?”
김민석은 다시 서하윤의 행방에 대해 물으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공황인지 뭔지, 다시 울컥 올라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몸이었고,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더는 추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일단 한숨 자요.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요. 좀 쉬고 나서 다시 얘기해요.”
하준서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려 주며 말했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알고 싶어요.”
“지금은 나도 못 알려 줘요. 당장은 나도 확인시켜 줄 방법이 없어요. 대신 한숨 푹 자고 나면 하윤이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요. 어때요?”
“…정말이죠?”
“그럼요. 정말이죠.”
“알겠어요.”
“이제 눈 감아요. 눈 감고 한숨 자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하준서가 얼른 감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눈 위를 덮었다. 조금 전의 일로 안 그래도 무겁던 눈꺼풀이 스르륵 내리 감겼다. 속의 것을 다 토해 내면서 고민과 고뇌까지 같이 토해 낸 걸까. 지금 이 순간만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김민석은 하준서가 가슴을 가볍게 도닥여 주는 것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어쩌면 서하윤의 몸에서 겪는 마지막 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슨 일이야. 직접 보자고 하고. 얼마 전에 돈 보내 줬잖아.’
서하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창섭이 뿌옇게 변한 눈으로 서하윤을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음험함이 존재했다. 서하윤은 그의 눈길과 그의 얼굴, 그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 그리고 그의 존재 그 자체에 진저리를 쳤다.
‘볼 때마다 예뻐지네. 애인이 많이 예뻐해 주나 보지?’
서창섭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 토할 것 같으니까. 나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그날로 돈이고 뭐고, 너 죽고 나 죽는 날인 줄 알아.’
서하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서창섭이 양손을 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예민하게 굴 것 없다. 오늘은 그냥 보여 줄 게 있어서 부른 거야.’
‘뭔지 빨리 말해. 시간 없으니까.’
서창섭과는 1초도 더 있기 싫다는 듯 서하윤이 재촉했다. 서창섭이 재킷 안쪽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서하윤이 주춤거리자, 서창섭이 빨리 받으라는 듯 봉투를 흔들었다.
결국 서하윤이 봉투를 낚아챘다. 봉투를 열자 안에는 크게 인화된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들어 차례로 넘겨 보는 서하윤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뿌득. 이 가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뭐야. 뭐 하자는 거야. 이딴 건 왜 찍은 건데?!’
서하윤이 사진을 박박 찢으며 외쳤다. 마구잡이로 찢기는 사진 속에는 하준서와 서하윤이 다정하게 데이트하는 모습, 호텔에서 나오는 모습, 키스하는 모습 등이 찍혀 있었다.
‘네가 요즘 애인 하나로 모자랐는지 하나 더 만들어 끼고 다니길래 한번 찍어 봤다. 이 아빠가 전직 형사였잖니. 척하면 딱 아니겠냐.’
서창섭이 으스댔다. 그리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자박자박 다가오더니 말했다.
‘네 애인이 이걸 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응?’
‘이 씨발 새끼야! 돈 달라는 대로 다 줬잖아! 근데 왜 이런 것까지 캐내서 지랄이야?!’
‘보내는 돈이 점점 줄어드니까 하는 짓 아니겠니.’
‘그래서 그놈의 돈 만들어 주려고 이러고 다니는 거 아니야!’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네가 요즘 딴생각하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서하윤. 너 나 없애 줄 사람 찾으려고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다녔다며? 이 아빠를 담가 버리려고?’
뜻밖의 말에 서하윤이 이를 악물었다. 비실비실 웃던 서창섭의 얼굴이 순식간에 난폭하게 변모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키워 줬더니. 이 쌍년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날 담가 버리려고 해?!’
서창섭이 서하윤의 멱살을 잡았다. 서창섭에게서는 퀘퀘한 담배 냄새와 역겨운 입 냄새가 풍겼다.
‘이거 놔, 씹새꺄.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 그랬지! 네 새끼가 그렇게 집요하게 뜯어내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 내가 언제까지 너 같은 놈한테 뜯어먹히며 살아야 해! 언제까지 나한테 들러붙어 있을 건데?!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서하윤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철썩-!
서창섭이 서하윤의 따귀를 한 대 갈겼다. 그리 강하지 않은 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서하윤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눈앞에 있는 서창섭의 존재가, 그의 체취가 서하윤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서하윤의 몸을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서창섭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이 창년아. 이 아비 좆물을 그렇게 받아먹으면서 컸는데, 네가 감히 나한테 덤빌 수 있을 것 같아? 한번 암캐로 길들여진 것들은 평생 암캐로 살아야 하는 거야. 앙?’
서창섭이 서하윤의 머리칼을 휘어잡아 이리저리 뒤흔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희열과 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도 자존심 강하고 싸가지 없던 서하윤이 서창섭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잡힌 머리칼을 뿌리칠 생각도 못 한 채 서창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최… 최상혁한테 알리지 마. 돈 주면 되잖아. 얼마 주면 되는데?’
‘내가 아들 손에 목이 따일 뻔했는데, 이제 와서 그까짓 푼돈이나 받아 가면서 만족할 것 같아?’
‘그럼 원하는 게 뭐냐고!’
‘네 애인이 사 준 아파트, 팔아서 그 돈 고스란히 나한테 넘겨.’
‘씨발, 그렇게까지 하면 나라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왜? 집 처분하면 차일까 봐 겁나? 너 애인 하나 더 있잖아. 그 새끼도 제법 돈 있는 집안 아들이던데, 이번 기회에 그쪽으로 갈아타.’
‘그렇게는 못 해.’
서하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창섭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는데. 너, 나 따라가서 영화 하나만 찍어.’
‘영화?’
‘그래. 그냥 옛날에 이 아빠랑 자주 하던 짓 있잖아. 카메라 앞에서 그거 한판만 하자고. 아, 아닌가. 나랑만 하는 게 아니라 몇 명 더 상대해야겠지만 어차피 너한테 뒷구멍 몇 번 대 주는 건 일도 아니잖아? 그럼 나도 그걸로 한동안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 너 귀찮게 안 해.’
서창섭의 말을 들은 서하윤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서하윤의 얼굴에서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동물의 몸부림과도 같았다.
‘싫어. 싫다고. 차라리 죽여!’
버럭버럭 외친 서하윤의 눈이 홱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시뻘겋게 눈이 변한 서하윤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창섭의 가슴을 양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안은 팔이 풀리지 않도록 양손을 단단히 깍지 꼈다.
‘그래, 차라리 너랑 나랑 같이 죽자. 나도 더는 이렇게 못 살겠으니까 차라리 같이 죽자고!’
서하윤이 살벌하게 외치며 서창섭을 안은 채 질질 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둘이 이야기하던 건물의 옥상 끄트머리였다. 낡은 옥상의 난간은 매우 낮았다. 몸이 점점 난간 쪽으로 끌려가자 서창섭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 쌍년이. 이 미친년이. 이거 안 놔? 이거 놔! 뒈지려면 혼자 죽어!’
서하윤도 눈이 돌아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상태였지만, 마약 중독자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둘은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하며 옥상 난간 끝에 도착했다. 서하윤은 진짜 서창섭과 함께 죽어 버릴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서창섭의 몸을 붙잡아 그대로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서창섭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하윤의 몸이 옥상 난간 너머로 휘청 기울었다.
‘읏…!!!’
서창섭이 서하윤의 손을 붙들었다. 서하윤은 서창섭의 손 하나에 매달린 채 아슬아슬하게 난간 끝에 서 있었다. 서창섭의 눈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집, 처분해서 줄 거지?’
서창섭이 서하윤의 생명줄을 붙잡은 채 물었다.
‘좆 까.’
‘아니면 비디오라도 찍을래?’
‘차라리 뒈질 거야.’
‘그러면 네 애인 놈한테 저 사진들 팔아넘겨도 되고. 못해도 일억을 받을 수 있을걸?’
‘…….’
서하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서창섭은 득의양양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붙어먹더니 정이 들었나 보지? 들키는 걸 무서워하고. 그럼 사진에다가 네 목숨값까지 5억만 만들어서 내놔 봐.’
서창섭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서하윤의 얼굴이 어느 순간 차갑게 식었다.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제대로 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던 얼굴이 허무하게 변했다.
‘사람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 보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지.’
서하윤이 중얼거렸다. 뭔가 안 좋은 낌새를 눈치챈 서창섭이 잡고 있던 서하윤의 손을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한 박자 늦었다. 서하윤은 잡혀 있던 손목을 틀어 그대로 빼냈다. 난간 밖으로 기울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뒤로 휘청 기울었다.
‘하윤아…?!’
놀란 목소리가 들렸지만 서하윤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최상혁….’
추락하는 서하윤이 하늘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시야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