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당연하죠. 나도 사람인데요.”
“근데 왜 깨어났을 때 그렇게 안 했어요?”
“하윤 씨가 깨어났을 때는…. 수없이 했던 상상과 너무 달랐어요. 일단 하윤 씨가 깨어났다는 사실 그 하나에 너무 안도감이 들어서… 배신이고 뭐고 그냥 살아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어요. 그 순간 깨달았죠. 아, 나도 어쩔 수 없이 호구 잡혔구나. 역시 먼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지는 거구나.”
“아무리 그래도 호구라니….”
“호구죠.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못 헤어지겠는데. 최상혁에게 빼앗기느니 아무도 못 가지게 확 망가뜨려 버리고 싶은데. 최상혁이 해 준 거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그 새끼 차 버리고 나한테 오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호구지 사람이에요?”
“…….”
김민석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래도 할 말은 좀 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최상혁과 날 눈앞에 뒀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고 싶었지.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잖아요. 누구냐고 묻는데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네…. 그때 생각나요. 깨어났을 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어요. 어쩌면 요 영악한 머리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수를 쓰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진짜 서하윤으로서의 기억이 하나도 없더라고. 그래서 생각했죠.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기회요?”
“네. 기회. 들어 보니 최상혁이랑은 2년이나 만났다잖아요. 그럼 반년도 못 만난 나는 상대도 못 되는 거잖아. 고작 언제 차일지 모르는 바람 상대일 뿐이지. 하지만 기억이 없으면 다르죠. 최상혁도 나도, 동등한 출발선에서 다시 출발하는 거예요. 나한테 불리하지 않은 게임을 할 기회를 얻은 거죠.”
김민석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하준서는 배신당한 상처보다 서하윤이 살아남아 준 것이 감사할 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이야기였다. 최상혁도, 하준서도, 서하윤을 진짜 사랑하는 거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하윤 씨. 나를 조금은 좋아하게 되었어요?”
하준서가 그윽한 눈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 가지를 덧붙였다.
“아니면 여전히 나보다 최상혁이 더 좋아요?”
“나는….”
김민석은 입술을 달싹였다. 무거운 질문 앞에서 숨이 턱 막혔다. 하준서는 그런 김민석이 입을 열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자격이 없어요.”
김민석은 간신히 할 말을 찾아 꺼냈다.
“자격이 없다고요?”
“네. 두 사람이 사랑하는 건 서하윤이지, 김민석이 아니잖아요. 누굴 사랑하는지, 좋아하는지, 혹은 헤어지고 싶은지 말할 자격은 서하윤에게 있지. 나에게는 없어요.”
하준서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김민석의 이마를 콕 찔렀다.
“며칠 동안 내내 표정이 안 좋았던 게 그것 때문이었어요? 최상혁이랑 나랑 둘 중에 누굴 고를지 고민한 게 아니라?”
“당연하죠. 내가 비록 지금 서하윤 몸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김민석이라고요. 내가 멋대로 선택했는데 나중에 서하윤이 돌아오면, 그때는 그 원망이랑 뒷감당을 어떻게 해요?”
김민석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말에, 하준서가 별안간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웃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황당한 눈으로 그런 하준서를 보았다. 남은 엄청난 고민거리를 토해 냈는데 무작정 웃어 대다니. 해도 너무했다.
“이게 웃을 일이에요? 나한테는 몸이랑 영혼이랑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요!”
김민석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준서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하준서가 그 손을 낚아채 꽉 잡더니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눈을 돌려 웃음기 가득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러게요. 내가 멍청했네요. 난 요 며칠 내내 하윤 씨가 우리 둘을 저울질하느라 고민에 빠져 있다고만 생각했지, 설마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하윤 씨 고민이 더 우선이고 당연한 건데요. 내가 그걸 생각 못 했네.”
“어떻게 그걸 생각 못 할 수가 있어요. 사람 영혼이 뒤바뀐 게 얼마나 큰일인데요. 그리고 나한테 그런 진지한 이야기 들려줘 봐야 아무 쓰잘데기 없어요. 진짜 서하윤이 들어야 쓸모 있는 이야기잖아요.”
“흐음….”
하준서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김민석을 빤히 응시했다. 살짝 가늘어진 눈 속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김민석은 이 사람이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나 싶어 눈을 흘겼다. 그 눈길을 본 하준서가 작게 웃더니 김민석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우, 사람 한참 진지한데 이런 장난 치지 마요.”
김민석이 짜증을 내며 말하자, 하준서가 머리를 흐트러뜨리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대신 김민석의 손을 잡아 쥐며 말했다.
“내가 그 고민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어떻게요? 혹시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김민석은 서둘러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준서는 이전에도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최상혁도 그랬다.
“말해 봐요. 알고 있는 거예요?”
김민석은 잠시의 틈도 참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하준서가 웃음을 머금은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빙글 돌았다. 김민석은 핑핑 도는 시야에 못 이겨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거대한 해머가 연신 두드리는 것처럼 머리가 텅텅 울렸다.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덕쿵덕 뛰었다. 이러다 심장 마비라도 오는 게 아닌지 겁이 덜컥 났다. 김민석은 빙빙 돌다 못해 컴컴해지는 시야에 못 이겨 양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하윤 씨? 하윤 씨! 하윤아?”
하준서가 놀라서 김민석을 잡아 흔들며 불렀다. 하지만 정신은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까마득해졌다.
“하윤 씨. 하윤 씨!”
“…어지러워요. 토할 것 같아….”
김민석이 호소하자, 하준서가 옆에 있던 팝콘 그릇을 바닥에 뒤집어 버리고는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그래도 김민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안긴 채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앞에 앉혔다. 변기를 보는 순간 토악질이 치밀었다.
우웩- 우욱-
구역질이 연신 튀어나왔지만 어찌 된 일인지 속의 것을 쏟아내지는 못했다. 김민석은 답답함에 못 이겨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타액과 콧물만 질질 흘러내릴 뿐, 여전히 구토는 하지 못했다.
“토해야겠어요? 토하면 좀 편하겠어요?”
하준서가 등을 두드려 주며 물었다. 김민석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하고 나면 숨쉬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봐요.”
그렇게 말한 하준서가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김민석의 입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입 안에 들어온 손가락들이 목젖을 마구잡이로 건드렸다. 우욱, 깊은 구역질이 솟구치더니 곧 속에 있던 것들이 왈칵 튀어나왔다.
우욱- 우욱-
드라마를 보면서 먹었던 팝콘과 아침에 먹은 된장 비빔밥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다. 하준서는 구토하는 장면이 역겹지도 않은지, 연신 등을 두드리며 다 토해 내라고 격려했다.
폭포처럼 쏟아 낸 덕분에 속의 것을 몽땅 게워 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김민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자, 하준서가 그를 부축해 세면대 앞에 세웠다. 그리고 칫솔에 치약을 짜서 내밀었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부축을 받은 채로 양치며 세수까지 마쳤다.
하준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걷겠다는 김민석을 굳이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화장실 밖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시원한 생수병과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주고 갔다. 김민석은 생수를 반병 정도 비운 뒤에야 편안한 숨을 몰아쉬었다. 하준서가 그런 김민석의 이마 위에 시원한 물수건을 올려 주었다.
그대로 숨을 좀 몰아쉬고 있으려니 좀 살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숨 막힘도, 심장 뜀도, 두통도 누그러져 있었다.
“미안해요. 준서 씨 손… 토한 거 다 묻었죠.”
김민석이 힘없이 사과하자, 하준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문제예요? 그런 거 사과하지 말아요.”
“…네….”
“증상이 어땠어요? 체했나?”
“모르겠어요. 그냥 눈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리도 아프고, 토하고 싶었어요.”
김민석의 힘없는 대답에 하준서가 혀를 찼다. 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들어오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방금 하윤 씨가 아픈 것 같아서 이 집 주인 총각한테 전화를 했는데, 전화 바꾸라고 난리를 치네요.”
그렇게 말한 아주머니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하준서가 짧게 혀를 차더니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아주머니는 민망한 얼굴로 방 밖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최상혁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자신에게 연락하도록 단단히 일러두었던 모양이었다.
“어.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 …그냥 좀 토했어. 말하는 거로 봐서는 아무래도 놀라서 공황이 살짝 왔던 것 같아. ……. 아니, 씨발. 내가 일부러 그랬겠어? ……. 뭐, 이 씹새끼야? 내가 얌전히 첩 놀이 하고 있으니까 진짜 네 맘대로 굴어도 되는 첩년으로 보여?!”
최상혁이 대체 뭐라고 한 것인지 하준서가 한껏 화를 냈다. 최상혁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하준서가 하는 말로 둘 사이에 십 원짜리 욕이 부지런히 오고 가고 있음은 잘 알 수 있었다.
“준서 씨.”
“이 씹새끼가 진짜…. 어, 하윤 씨, 왜요?”
십 원짜리 욕을 하던 하준서가 금세 빙긋 웃으며 김민석에게 시선을 보냈다. 김민석은 힘없는 손을 억지로 들어 핸드폰을 가리켰다. 하준서가 아, 하며 핸드폰을 건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