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80화 (80/125)

80화

하준서가 한쪽으로 걸어가 그가 지내는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고양이 두 마리가 살랑살랑 걸어 나왔다. 철이와 순이였다. 둘은 하준서가 이곳에 가방을 들고 쳐들어온 다음 날 데려왔는데, 이삼 일간은 방 침대 밑에서 꼼짝도 안 하다가 이제는 완전히 적응한 참이었다. 하지만 최상혁이 고양이를 질색하는 바람에 그가 있는 동안에는 하준서의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덕분에 철이와 순이는 최상혁이 출근해 있는 동안만 집 안을 탐색할 수 있었다. 2층 주택이라 그런지 고양이들이 탐색할 장소는 무궁무진했다. 두 녀석은 특히 계단에서 우다다하는 걸 매우 즐겼다. 김민석은 그걸 보면서 혹시나 녀석들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는 했다.

“이리 와요. 같이 누워서 TV나 보게.”

하준서가 김민석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당분간 하준서의 방이 된 손님방에는 침대 발치 쪽 벽에 벽걸이 TV가 걸려 있었다. 거실 소파도 편하기는 했지만 도우미 아주머니의 눈이 있어 아주 편치만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최상혁이 출근하고 나면 이렇게 손님방 침대에 나란히 누워 영화 보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낮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또 예능 프로를 보다가 간식을 먹고 낮잠을 자는 식이었다.

“자, 다음 편.”

하준서가 리모컨으로 어제 정주행하던 코미디 미국 드라마 다음 편을 틀었다. 그리고 베개에 등을 기댄 채 김민석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하루하루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일단 셋이 동거하는 상황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김민석은 두 남자가 알아서 상황을 매듭지으리라 생각했지만, 둘은 의외로 이 상태를 일주일씩이나 지속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두 남자가 어떤 협의를 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서창섭의 일을 겪은 자신을 배려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김민석도 이런 상황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최상혁이나 하준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아니면 둘 모두와 헤어지고 자립하는 게 맞는 일일까?

그걸 떠나서 지금이라도 이 집을 나서서 서하윤의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더는 놀고먹을 게 아니라 일자리라도 찾아보면 어떨까?

여러 가지 고민이 산재해 있었다. 다만 그 어떤 일도 결정내릴 수 없는 것은, 자신은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서하윤이 아닌 이상, 서하윤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어떤 선택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오롯이 서하윤의 몫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두 핑계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핑계에 가깝기는 했다.

서하윤의 영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막막했고, 솔직히 자신은 이미 이 몸에 들어앉아 계속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서하윤이 나타나 몸을 내놓으라 한들 순순히 내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어쩌면 결단코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이기적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눈앞에 갈 수 있는 길은 잔뜩 펼쳐져 있는데 정작 발이 꽁꽁 묶여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계기가 생기지 않는 이상은, 묶인 발이 풀릴 길은 요원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하준서가 문득 물었다. 김민석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있는 사이 20분여짜리 에피소드가 이미 하나 지나가 있었다.

“아…. 그냥 이것저것이요.”

“흐음….”

하준서가 의미심장한 숨을 몰아쉬며 김민석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손길에는 성적인 뉘앙스가 살짝 섞여 있었지만 그 이상 나가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것도 두 남자 사이에 이루어진 협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당분간 섹스나 성적인 접촉은 금지, 라는 것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게 보여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윤 씨 표정은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하네요.”

“…그렇게 티가 났어요?”

김민석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최상혁이랑 나랑 셋이 같이 있는 게 많이 불편해요?”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난 일주일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제 슬슬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김민석은 대답을 망설였다. 한번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결론까지 도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또, 또 고민하네. 이 작은 머리통으로 뭘 그렇게 복잡하게 고민해요.”

하준서가 손가락 끝으로 김민석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준서 씨도 내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을걸요.”

김민석은 불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요? 난 전혀 고민 안 할 것 같은데. 최상혁이 좋으면 최상혁을 선택하고, 내가 좋으면 나를 선택하고, 둘 다 못 놓으면 둘 다 데리고 살고, 둘 다 싫으면 둘 다 차 버리면 될 일이죠.”

거기까지 말한 하준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물론 뭘 선택하든 날 떼어 내진 못할 거지만.”

“준서 씨에 대해서만은 나한테 선택권이 없다는 이야기네요?”

“아뇨. 선택권은 있어요. 하윤 씨는 선택해요. 난 그냥 그 선택이 마음에 안 들면 거부하겠다는 것뿐이에요.”

“그게 그건데요.”

김민석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준서가 작게 웃었다.

“…준서 씨.”

“말해요.”

김민석의 얼굴에 깃든 진지함을 본 하준서가 리모컨으로 드라마 플레이를 중지시켰다. 김민석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준서 씨는 서하윤을 진짜 사랑했어요?”

“그걸 꼭 물어야 알겠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못 떨어지고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거 보면 몰라요? 누가 보면 호구가 따로 없는데.”

“서하윤은 준서 씨 속였잖아요. 바람 상대로 만난 거잖아요. 애써 사 준 선물도 서창섭한테 줘 버리고…. 그런데 배신감도 안 들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정떨어지는 행동하면 애정이 식기도 하는 거잖아요. 그런 것, 없어요?”

김민석은 기왕 말이 나왔으니, 생각하며 톡 까놓고 물었다. 하준서가 손에 쥔 리모컨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생각이 많은 눈이었다. 하준서는 그렇게 김민석을 빤히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섹스 상대로 생각했어요. 내 취향을 그대로 빚어낸 것 같은 상대가 나타났으니 정신 못 차리지. 섹스도 하고 플레이도 하고…. 양껏 즐겼죠. 하윤이가 일부러 접근한 것도, 몇 가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진즉 눈치챘어요.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좋은 놀이 상대였으니까.”

“…….”

늘 서하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했던 말과는 조금 다른 스토리였다. 하준서는 지금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근데… 하윤이는 다른 사람들이랑 좀 달랐어요. 아니, 많이 달랐지. 성격도 독특하다면 독특했지만…. 이상한 아슬아슬함이 있었어요. 분명히 자존심 강하고 성격도 보통내기가 아닌데, 그리고 아직 한창일 어린 나이인데. 어느 순간, 어느 찰나에 보면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세상 전부 다 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래서 확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보는 사람 심장을 덜컹거리게 하는 그런 아슬아슬함이 있었어요.”

“…….”

“그래서 그런가. 옆에 있어도 자꾸 확인하게 되는 거야. 이 녀석 지금 괜찮나. 얼굴 표정 한 번 더 살피게 되고 괜히 손 한 번 더 잡게 되고…. 떨어져 있을 때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 녀석 지금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제는 만났지만 오늘은, 혹은 내일부터는 못 만나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하준서가 리모컨을 손에서 놓고 대신 김민석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이 신기루가 아닌지 만져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그러다 말려든 거죠, 뭐. 사랑이 별건가? 사랑에 빠지는 대단한 서사와 절차가 필요한 건가요? 그냥 상대방이 보고 싶어지고 자꾸 생각나고 헤어지기 싫고 이것저것 해 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깨닫게 되는 거죠. 아, 나 사랑에 빠졌구나.”

“하지만 서하윤은 시작부터 준서 씨를 배신했잖아요.”

“맞아요. 그랬죠. 엄연히 만나는 애인이 있으면서도 나한테 접근했죠. 병원에 호출받았다가 최상혁이랑 마주치고, 내가 바람 상대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화가 안 났다면 병신이겠죠. 화도 나고 배신감도 느끼고, 나 정도 되는 인물이 고작 바람 상대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수치심도 느꼈어요. 하윤 씨가 안 깨어나는 동안 별의별 상상을 다 했지. 깨어나면 뭐라고 할까. 뭐라고 퍼부어 줄까. 그냥 싸대기 한 대 갈기고 떠날까. 아니면 둘 중 하나 선택하라 해 놓고 날 선택하면 실컷 비웃어 주며 떠나 볼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김민석은 의외로운 눈으로 물었다. 하준서는 그런 마음을 한 번도 티 낸 적이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안 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 그러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준서는 단지 앞에서 티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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