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문을 열어 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준서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하윤 씨!!”
신발을 벗어 던지고 소파로 달려온 하준서가 김민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런 식으로 도망가 버리면 어떡해요. 무슨 일은 없었어요? 안 다쳤어요? 놀랬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놀랐어요?”
하준서가 김민석의 몸을 더듬더듬 만져 무사함을 확인하며 온갖 질문을 쏟아부었다. 하준서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고 도망갔던지라,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눈치를 슬그머니 보면서 하준서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려 달랬다.
“저 괜찮아요. 안 좋은 일 하나도 없었어요. 별로 놀래지도 않았고요.”
“그 새끼가 무슨 짓 안 했어요? 왜 그렇게 겁이 없어요.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 거길 찾아가요?”
하준서가 말하는 그 새끼란 서창섭을 말할 터였다.
“그 새끼 어떻게 됐어? 뒈졌어? 얌전히 죽여 준 건 아니지?”
하준서가 고개를 돌려 최상혁에게 물었다.
“알아서 처리했어. 네 알 바 아니야.”
최상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준서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양손으로 김민석의 볼을 잡아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래서, 이제 괜찮아요?”
차분하게 묻는 목소리에서 깊은 염려가 묻어났다. 하준서의 갈색 눈이 김민석의 얼굴이며 표정, 눈동자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김민석은 자신의 볼을 감싼 하준서의 손 위에 손을 겹쳐 쥐며 말했다.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던지 하준서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렸다.
“정말… 너무 걱정돼서 심장이 다 녹아내리는 줄 알았어요.”
하준서가 나직이 말하며 김민석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선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네….”
김민석은 하준서를 달래듯 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최상혁이 팔짱을 꼰 채 한껏 아니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김민석은 너무 난감해서 등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그래서, 그 씹새끼 담갔다는 거야, 안 담갔다는 거야. 아직 안 담갔으면 말해. 내가 담가 버리게.”
김민석을 안고 부둥부둥하던 하준서가 다시금 열이 뻗친 듯 최상혁에게 물었다.
“워- 워- 진정해요. 진정해.”
김민석은 하준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하준서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다시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김민석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도 영 안심이 안 되는 눈치였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맑은 갈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서 씨도…. 봤어요?”
김민석의 물음에 맑은 갈색 눈동자에 쩡하니 금이 갔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던 하준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고 다정하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김민석은 손으로 하준서의 찡그려진 눈매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까.”
“정말 다 괜찮아요?”
“아마 해결된 걸 알면 서하윤도 괜찮다고 생각할 거예요.”
김민석의 대답에 하준서가 가만히 응시하며 물었다.
“서하윤 말고, 지금 하윤 씨도 괜찮은 거예요?”
서하윤 말고 자신까지 걱정해 주는 하준서의 말에 김민석은 울컥했다.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됐어요.”
하준서가 드디어 빙긋 웃었다.
“다 했으면 이만 떨어져. 그리고 네 집으로 썩 꺼져.”
최상혁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말했다. 하준서가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현관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
김민석은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멀어지는 하준서를 보았다. 최상혁도 하준서의 행동이 의외였던지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철컥-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하준서가 현관문 앞에서 뭘 집어 드는 듯 허리를 숙이더니 이내 다시 문을 닫았다.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돌아오는 하준서의 손에 여행용 캐리어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윤 씨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죠? 그동안 나도 여기서 지내려고 짐 다 챙겨 왔죠.”
최상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고, 하준서가 기세등등한 미소를 씩 지어 보였다.
맙소사.
김민석은 골치가 지끈거리기 시작해 이마를 탁 짚었다.
방금 지은 따끈따끈한 흰 쌀밥 위에 막 끓인 된장찌개를 한 국자 가득 끼얹는다. 그 위에 반숙 계란프라이를 올린 다음 간장 약간과 참기름 약간, 그리고 버터 한 숟갈을 얹어 싹싹 비빈다.
김민석은 식탁에 턱을 괸 채 하준서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싹싹 비비는 것을 구경했다. 입에는 이미 침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다 비빈 밥 위에 김 가루를 조금 뿌린 하준서가 그릇을 김민석 앞에 내밀었다.
“자, 어서 먹어요.”
빙긋 웃는 하준서의 얼굴이 천사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김민석은 서둘러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고소한 버터 향이 섞인 된장 비빔밥의 맛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마이떠요.”
김민석은 입안에 밥을 한가득 넣은 채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준서가 귀엽다는 듯 그런 김민석의 볼을 톡톡 두드리고는 제 몫의 밥을 먹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열심히 밥을 씹으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상혁을 힐끗 훔쳐보았다. 그는 영 마뜩잖은 얼굴로 하준서가 차린 밥을 먹고 있었다. 원래는 안 먹고 그냥 나가려는 것을 김민석이 억지로 끌어앉힌 결과였다. 그래도 싫어하는 것치고는 막상 먹기 시작하면 한 그릇은 깨끗이 비워 주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먹이는 보람이 있었다.
얼렁뚱땅 세 사람이 동거를 시작하게 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며칠간 두 남자는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십 원짜리 욕설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렸지만 지금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김민석은 중간에 끼어 숨도 못 쉰 채 두 사람의 눈치만 보기 바빴는데,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는 좀 뻔뻔해져 있었다.
처음 이틀간, 최상혁은 일하러 나가는 대신 최소한의 일만 집에서 해결했다. 하지만 그것도 금세 한계에 이르러서, 결국엔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최상혁은 자신이 없는 집에 하준서와 단둘이 남겨 두는 것을 질색했다. 결국 나온 해결책은 최상혁이 없는 동안 집을 돌봐주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상주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도우미 아주머니 퇴근 시간이 되면 딱 맞춰 귀가하는 것이, 일을 상당 부분 줄여서 하고 돌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지난 일주일간 최상혁이든 하준서든 둘 중 하나와 단둘이 집 안에 남겨지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밤에 잠을 잘 때였는데, 처음에는 서로 자신이 데리고 자겠다고 우기다가 도저히 안 되어 나온 해결책이 셋이 각자 방에서 따로 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김민석이 혼자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자려고 하니 너무나 허전하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김민석으로 살 때는 혼자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서하윤으로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어리광쟁이가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김민석은 이 집에서의 첫날밤을 새하얗게 지새우고 말았다. 퀭한 눈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나오니 두 남자 모두 김민석이 잠들지 못한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다음 날, 김민석은 더는 참지 못하고 몰래 최상혁의 방으로 기어들어 가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하준서의 품에서. 또 그다음 날에는 최상혁의 품에서 잠드는 식이었다. 나름 두 남자 사이에 싸움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두 남자는 아마도 김민석이 번갈아 가며 두 남자의 침실에서 잠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눈치였다. 틀림없이 혼자는 잠들지 못하는 김민석을 배려한 것일 터였다.
어쨌든 두 눈 벌겋게 뜨고 있는 애인들의 방을 번갈아 가며 찾아가는 것도 보통 배짱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김민석은 종일 두 남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애인이 둘인 것도 이렇게 힘든데, 여러 집 살림하는 남자들은 대관절 어떻게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녀오세요.”
김민석은 출근하는 최상혁을 향해 인사했다. 최상혁이 그런 김민석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는 뒤돌아 현관을 나섰다. 배웅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자 하준서가 이상한 주스를 건넸다. 지난 며칠간 계속 먹이는, 소위 건강 주스였다.
녹색의 꾸덕꾸덕한 액체를 본 김민석의 표정이 대번에 썩어들었다. 하지만 하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건강에 좋은 거니까 얼른 마셔요.”
하준서가 재촉했다. 어쨌든 이걸 만들기 위해 하준서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손질해서 썰고, 갈았다. 그의 정성이 들어 있는 주스이기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김민석은 어쩔 수 없이 주스 잔을 받아 들어 눈을 딱 감고 꿀꺽꿀꺽 삼켰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맛이 혀끝을 고문했다. 하준서는 아무래도 요 며칠간의 불만을 이렇게 표출하는 것 같았다.
“…다 마셨어요.”
어차피 마셔야 하는 것, 숨도 안 쉬고 한꺼번에 다 마셔 버리는 게 좋았다. 그게 요 며칠간 터득한 요령이었다. 김민석이 빈 잔을 내밀자 하준서가 기특하다는 듯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빈 잔을 가져가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아이구, 이런 건 말하면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말했다. 김민석은 제발 그래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준서를 바라보았다.
“하윤이 먹일 건데 직접 하는 게 마음이 편해서요.”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섬세한 미남의 다정한 웃음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