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얼마나 통곡했는지 최상혁의 앞섶이 흠뻑 젖어 버릴 정도였다. 최상혁은 괜찮다고 사양하는 김민석을 굳이 공주님 안기로 안아다가 차에 실었다. 차가 달리는 동안, 김민석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티슈로 닦으면서 코를 훌쩍였다. 너무 울어서 그런지 머리가 좀 멍하긴 했지만 굉장히 후련한 기분이었다.
도착한 곳은 서하윤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아파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고급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동네의 2층짜리 주택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꿈속에서 보았던 최상혁의 집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소파, 꿈속에서 보았던 가구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괜히 신기했다. 김민석은 팅팅 부은 눈으로 집 안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 바빴다.
“가서 세수랑 양치 하고 와.”
최상혁이 그런 김민석의 엉덩이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눈물 콧물을 잔뜩 뺐으니 얼굴이 엉망인 것이야 당연했다.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을 보자마자 기겁하고 말았다.
“세상에… 이 꼬락서니로….”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상 예쁘기 그지없는 서하윤의 얼굴이라지만, 눈물 콧물 바람에 눈이 팅팅 붓고 코는 빨갛게 변한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 않았다. 그래 봐야 김민석 본판 얼굴에 비하면 연예인급인 건 여전했지만, 어쨌든 보기 흉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김민석은 정성스레 세수하고, 양치하려다 멈칫했다. 세면대 위에는 양치 컵 두 개와 칫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최상혁과 서하윤의 것이 분명했다. 회색과 파란색. 두 개의 칫솔 중에 무엇이 서하윤의 칫솔인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김민석은 파란색 칫솔을 들어 양치를 했다.
세수에 양치까지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찬물로 한참 마사지를 한 덕분에 팅팅 부었던 눈두덩이도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욕실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자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최상혁이 다가와 생수병을 내밀었다.
“어….”
김민석은 편한 바지와 셔츠 차림이 된 최상혁을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정장 차림이던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편안한 차림을 한 모습을 보니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꿈에서의 최상혁도 항상 정장 차림이거나, 혹은 나체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편한 옷차림한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었다.
“너도 옷 갈아입어. 먼지 묻었다.”
최상혁이 어딘가에서 꺼냈는지 모를 바지와 셔츠를 내밀었다. 몸에 맞춰 보니 사이즈가 딱 맞았다. 하긴, 도우미 노릇을 하는 동안 함께 살았으니 서하윤의 옷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김민석은 다시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나오니 최상혁이 쓸데없이 내외한다는 눈길을 보냈다.
“좀 앉아서 쉬지.”
최상혁이 거실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까딱까딱 손짓했다. 김민석은 고분고분하게 가서 그의 곁에 앉았다. 최상혁이 자연스럽게 김민석의 어깨를 감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를 베게 했다. 키 차이가 제법 나는 데다 기댄 어깨가 워낙 넓고 단단해서 그런가, 머리를 대고 있으니 안정감이 느껴졌다.
거실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둘은 굳이 일부러 입을 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이 시간이 편안했고, 상대의 존재가 편안했다. 김민석은 몸을 옆으로 틀어 최상혁의 가슴을 끌어안고, 양다리는 최상혁의 다리 위에 걸쳐 올렸다. 세상 편했다.
최상혁과 그렇게 달라붙은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김민석은 문득 서하윤을 떠올렸다.
서창섭의 일은 너무나 간단히 해결되었다. 서하윤이 학대당한 끔찍한 시절과, 그 기억으로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협박당해 왔던 시간들, 최상혁에게 알려질까 봐 두려워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서하윤은 그 긴 시간 동안 혼자 끙끙 앓았다.
서하윤이라고 해서 최상혁이 나서면 이리 쉽게 해결될 것을 몰랐겠는가. 빤히 알면서도 숨기고 또 숨겨 왔을 것이다. 뻔뻔한 성격의 서하윤이 최상혁에게 그리 필사적으로 숨긴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에게 그런 과거를 들키느니 끙끙 앓으며 사는 것을 택할 만큼, 서하윤은 최상혁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서하윤은 최상혁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왜 바람을 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최상혁 역시 서하윤을 사랑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금 끌어안고 있는 이 강인하고 든든한 남자는 서하윤의 남자였다.
“상혁 씨.”
“말해.”
“서하윤… 사랑했어요?”
김민석은 나직하게 물었다. 최상혁이 김민석의 정수리에 턱을 대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 대답이 김민석의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아팠다.
“왜요?”
김민석은 말투에 질투가 섞이지 않게 애쓰며 작게 물었다. 최상혁이 피식 웃었다.
“서하윤은… 가여운 과거를 가졌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근데 왜 사랑해요?”
“글쎄…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가?”
“…….”
“처음에는… 그래. 우는 모습이 참 예뻤어.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씹어 대는 것도 귀여웠고. 예쁘장한 얼굴로 성격 사납고 건방지게 구는 게 꼭 멋모르고 까부는 어린 고양이 같았지. 욕심 많게 구는 것도, 주제 모르고 까부는 것도 다 하찮고 귀엽게만 보였어.”
“…그런 걸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죠.”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최상혁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나른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듯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입을 떼었다.
“아직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는 건가 싶었어. 당장은 돈 쓰는 재미가 들려서 내 옆에 붙어 있겠지만 제대로 사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제 둥지를 찾아 날아갈 것 같았지. 그래서 구속도, 참견도 일절 하지 않았어. 날아가려고 하는 날이 오면 날려 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지.”
“서하윤은 아마 상혁 씨가 자신을 꽉 붙들어 잡아 주길 원했을 거예요.”
김민석의 말에 최상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녀석이 하준서와 바람을 피웠을까.”
최상혁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게. 서하윤은 대체 왜 하준서와 바람을 피운 걸까. 심지어 서하윤이 하준서를 꼬셨다고 했다.
김민석은 잠시 고민했다. 서하윤의 시점으로 꾸는 꿈속에서, 최상혁과 함께 있을 때의 서하윤은 정말 편안하고 행복해했다고… 꿈속에서 자신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고…. 그걸 말해 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기묘한 감정이 입을 막아섰다. 그것은 아마도 질투심이었다.
짧은 시간 머릿속에 치열한 전투가 오갔다. 최상혁에게 서하윤의 마음을 말해 줘야 한다는 생각과, 말해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서로 격렬하게 맞부딪혔다. 하지만 결국 김민석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인간은 누구든 이기적인 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준서 씨는….”
김민석은 대화를 하준서에게로 돌렸다. 자신이 비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이 남자를 서하윤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하준서?”
하준서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최상혁의 어투가 단번에 불쾌하게 변했다. 김민석은 그것을 뻔히 느끼면서도 모른 체했다.
“준서 씨 몰래 지갑에서 돈 꺼내서 도망쳤거든요. 아마 많이 놀랐을 텐데…. 저 이제 괜찮다고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벌써 연락했어요?”
“안 했어.”
최상혁이 잘라 말했다.
“에… 그러면 지금도 한참 걱정하고 있을 텐데. 연락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버려 둬.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안 죽어.”
최상혁이 씹듯이 내뱉었다. 김민석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때였다.
딩동-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지치지도 않고 연이어 울리는 현관 벨 소리. 어쩐지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될 새끼군.”
최상혁이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김민석을 안은 채 현관 벨 소리를 무시했으나, 십수 번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울리는 벨 소리 테러를 견뎌 내지는 못했다.
“이 씹새끼.”
결국 최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뭐야, 이 새끼야. 시끄럽잖아.”
최상혁이 인터폰 버튼을 누른 채 말했다.
-집에 있는 거 보니 하윤이 데려왔나 보네? 이 씹새끼야. 내가 바로 근황 보고 해 달라고 했어, 안 했어?
“시끄럽고, 꺼져. 애 놀래서 자고 있으니까.”
-웃기지 말고 문 열지? 열어 줄 때까지 벨 누를 거야.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하준서가 다시 벨 테러를 시작했다. 최상혁의 이마에 혈관이 뿔뚝 튀어 올랐다.
“제 경험상 열어 줄 때까지 절대 안 멈추더라고요.”
김민석은 조심스레 충고했다. 최상혁이 이를 바득바득 갈다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