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서하윤의 몸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진 탓일까. 아니면 꿈을 통해 서하윤의 기억을 몇 번이고 엿본 탓일까. 김민석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마치 서하윤인 것처럼 느껴졌다. 서하윤이 되어 최상혁의 자책감을 모두 걷어 내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상혁 씨가 그런 생각 하는 거 알면, 서하윤이 엄청 속상해할 거예요.”
“속상해?”
최상혁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김민석은 손을 뻗어 최상혁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속상해요.”
김민석은 서하윤의 기분을 대변하는 대신 자신의 기분을 말했다.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맞물렸다. 김민석은 기분 좋게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내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츄웁- 츕-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였다. 성적인 뉘앙스는 모두 배제된 담백하고 감미로운 키스였다.
짧은 키스를 마친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을 빈틈없이 맞대고 상대방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쿵쿵 뛰는 최상혁의 심장 박동이 닿은 몸을 통해 전해지며 몸과 마음에 스며들었던 어둠을 밀어냈다.
김민석은 이 강인한 남자에게서 그의 강함을 조금만이라도 나눠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도 좀 더 용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서창섭 핸드폰에 있는 자료랑 클라우드 자료는 삭제했어요. 그런데 클라우드 계정이 몇 개가 더 있을지 모르니까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민석은 최상혁에게 나눠 받은 용기를 실어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 새끼 핸드폰이라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어. 하지만 켜 봤더니 지문으로 잠금이 걸려 있더군. 서창섭에게 직접 가져가야 잠금을 풀고 안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최상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서창섭 이야기에 김민석이 패닉에 빠지거나 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꽉 끌어안은 몸을 놔주지 않았다.
“그럼 우리 서창섭한테 가 봐요. 가서 핸드폰도 확인해 보고, 혹시 다른 곳에 자료를 남겨 두지 않았는지도 확실히 확인해 봐야죠.”
“…괜찮겠어? 나 혼자 가서 해결해도 될 일이야.”
최상혁이 걱정스레 말했다. 김민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이 세상에 그 자료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같이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
최상혁이 김민석의 정수리에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김민석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며 가슴속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호텔을 나서서 간 곳은 근처의 식당이었다. 지금 뭐 먹으면서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였다. 음식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급작스레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은 허기가 몰려왔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한 허기였다.
김민석은 음식을 시킨 뒤에도 그게 빨리 나오길 바라며 안절부절못했다. 최상혁이 이미 젓가락을 쥐고 있는 김민석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안정시켰다.
“너무 배고파서 미칠 것 같아요. 갑자기 왜 이러죠?”
김민석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여 물었다.
“약 때문에 그래.”
최상혁이 마찬가지로 나직이 속삭여 대답해 주었다.
그 말에 김민석은 자신의 상태를 납득했다. 약 때문에 이렇게나 허기가 지는 모양이었다. 약을 하면 짐승처럼 변한다더니, 섹스에 식욕에…. 어쨌든 약이란 게 사람 할 짓은 아니었다.
마침내 음식이 나왔다. 김민석은 음식이 자신의 앞에 놓이기 무섭게 미친 듯한 속도로 먹어 치웠다. 얼마나 열심히 먹었는지 주변의 손님들이 신기한 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한 그릇을 거의 다 먹어 가고 있으려니 최상혁이 알아서 한 그릇을 더 시켜 주었다. 김민석은 고맙다고 할 사이도 없이 새로 온 한 그릇마저 와구와구 먹어 치웠다.
“또 올챙이배가 됐겠군.”
잔뜩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얕게 호흡하고 있으려니 최상혁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김민석은 그제야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최상혁도 그사이 한 그릇을 깨끗이 먹은 후였다. 하긴,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섹스를 해 댔으니 그도 허기가 지긴 졌을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에야 둘은 서울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서창섭은 이미 서울로 옮겨져 있다고 했다.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를 가는 동안, 둘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김민석은 최상혁의 손을 잡은 채 떨리지 않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낡은 건물의 지하 창고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선 지하 창고는 시커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최상혁이 옆으로 손을 뻗어 불을 켜자, 낡은 형광등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넓은 지하 창고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채 자잘한 쓰레기만 뒹구는 창고 한가운데, 낡은 철제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창섭은 거기에 묶여 있었다.
팔과 다리, 몸통이 칭칭 묶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서창섭이 밝아진 주변을 느끼고 꿈틀거렸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왔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혹은 묶이는 도중에 적잖이 반항했던 듯 얼굴이 엉망으로 터져 있었다.
불빛이 적응이 안 되는 듯 실눈을 깜빡이던 서창섭의 시선이 최상혁과 김민석에게 닿았다. 그의 핏발 선 뿌연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읍…! 읍읍읍!!!”
입이 막힌 서창섭이 몸부림을 치며 뭐라 뭐라 고함을 질렀다. 거친 움직임에 맞추어 철제 의자가 덜커덕거렸다.
본래도 초췌하고 추레했던 몰골이 이제 그야말로 상거지 꼴을 하고 있었다. 홀쭉하던 볼은 한층 더 패어 얼굴 자체가 해골바가지처럼 보였고, 묶여 있는 동안 그대로 소변을 본 듯 바짓가랑이 사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김민석은 가뜩이나 그에게 느끼던 혐오감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겠어?”
최상혁이 나직하게 물었다.
“괜찮아요. 상혁 씨도 있잖아요.”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상혁이 바지 주머니에서 서창섭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김민석에게는 제자리에 있으라고 눈짓한 후, 저벅저벅 걸어 서창섭에게 다가갔다. 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서창섭의 몸부림이 거세졌다. 서창섭은 최상혁이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목숨줄 연장하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네 더러운 몸에 닿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최상혁이 서창섭의 앞에 우뚝 선 채 말했다. 그러자 서창섭의 몸부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잠금. 엄지 지문인가?”
최상혁이 물었다. 서창섭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창섭의 뒤로 돌아가 묶여 있는 그의 손가락에 핸드폰을 갖다 댔다.
“조용히 있어.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목적을 달성한 최상혁이 서창섭에게 경고하고 김민석에게 돌아왔다. 내미는 핸드폰은 잠금이 풀려 있었다. 최상혁이 핸드폰을 내미는 의미는 명백했다. 스스로 삭제하고, 모든 것이 소멸했음을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김민석이 핸드폰을 받아 들자, 최상혁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콘크리트 기둥에 가서 등을 기대고 섰다. 어떤 자료가 뜨든지 볼 생각 없으니 편하게 작업하라는 제스처였다. 김민석은 묶여 있는 서창섭을 한번 봤다가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화면을 이리저리 뒤지며 클라우드 앱을 찾기 시작했다.
깔린 앱을 속속들이 확인했지만 여인숙에서 삭제한 클라우드 앱 말고는 깔린 것이 없었다.
정말 그게 끝이었나?
잠시 생각하던 김민석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앱 스토어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앱 메뉴로 들어가 과거에 깔았던 경력이 있는 앱 목록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럼 그렇지….”
김민석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현재 핸드폰에는 깔려 있지 않지만 과거에 깔았던 클라우드 앱이 무려 3개나 더 있었다. 김민석은 그 앱들을 모조리 재설치했다.
“서하윤.”
김민석이 서창섭을 향해 걸어가자, 최상혁이 다가와 제지했다. 김민석은 괜찮다는 눈길을 보낸 다음 서창섭에게 다가갔다. 그의 입 둘레를 묶고 있는 끈을 풀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솔직히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클라우드 아이디랑 비밀번호 뭐야.”
김민석은 새로 깔린 클라우드 앱 화면을 보여 주며 물었다. 서창섭이 눈을 한 바퀴 굴리더니 씨익 웃었다.
“씨발. 보아하니 그게 이제 내 목숨줄인 것 같은데, 그걸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아? 3억. 3억 가지고 와. 현금으로. 그거 주고 중국 가는 배에 태워 주면 그때 알려 주지. 꼴랑 3억이야. 네 애인한테는 별로 큰돈도 아니잖아.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야. 안 그래?”
김민석은 이 지경까지 와서도 돈을 뜯어먹고 도망칠 궁리를 하는 서창섭을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은 양아들이라지만, 어린 시절부터 키운 자식이다. 그런 자식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 사진과 영상을 찍고, 그걸 빌미로 돈을 뜯어먹어 왔다. 세상에 이런 인간쓰레기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상혁이 몸을 돌려 지하실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오래전에나 쓰던 철제 사무용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최상혁은 책상 서랍을 당겨 열었다. 오래되어 아귀가 잘 맞지 않고 녹이 슬었는지 끼이이-, 불쾌한 소음이 울렸다.
최상혁이 서랍 속에서 무언가 하나 꺼내 들고 다가왔다. 가까이 온 최상혁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니 커다란 니퍼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녹이 잔뜩 슬은 니퍼엔 정체를 짐작하고 싶지 않은 흑갈색 얼룩이 잔뜩 묻어 있었다.
“씨발, 뭐 하려는 거야! 뭐 하려는 거냐고!”
커다란 니퍼를 본 서창섭이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며 몸부림쳤다. 최상혁이 서창섭 앞에 선 채 니퍼를 들어 몇 번 세게 쥐어 보였다. 쇳덩이로 만들어진 공구는 사람 손가락 하나 정도는 손쉽게 끊어 먹고 남을 것처럼 보였다.
“뭐 하려는 것처럼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