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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75화 (75/125)

75화

정말이지 늘어지게 잤다. 자는 도중에 최상혁이 억지로 깨워 비몽사몽간에 뭔가 먹은 것도 같았다. 입안에 들어오는 걸 대충 씹어 삼키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 중간중간 물이며 음식을 억지로 먹어 가며 자고 또 잔 끝에 드디어 제대로 눈을 떴다.

김민석은 눈을 끔뻑거리며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시야가 조금씩 개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최상혁의 목과 어깨, 그리고 가슴이었다. 자기 전에 자고 일어나도 그대로일 거라고 했던 약속이 기억났다. 계속 이렇게 몸 위에 올리고 있기 무거웠을 텐데, 약속을 지켜 준 게 고마웠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남아 있던 잠기운이 숨을 통해 함께 빠져나갔다. 그가 잠에서 깬 것을 알아챈 최상혁이 손을 움직였다. 김민석의 머리칼 속에 묻은 채였는지, 손가락이 두피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김민석은 나른한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 얼마나 잤어요?”

물어보는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잘 만큼 잤어.”

최상혁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잠기운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계속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힐끗 돌려보니 커튼 너머가 컴컴했다. 방 안은 은은한 간접 조명 하나만 켜져 있는 상태였다. 아까 잘 때가 대략 낮에서 이른 오후쯤 되었을 테니… 아마도 거의 반나절을 푹 잔 모양이었다.

“안 무거웠어요?”

김민석은 눈앞에 보이는 근육질 가슴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네가? 이 비리비리한 몸이 무거워? 바랄 걸 바래라.”

최상혁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김민석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이래 봬도 나도 남잔데요.”

김민석의 말에 최상혁이 코웃음을 쳤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가슴을 찰싹 때렸다. 그러자 최상혁이 복수하듯 김민석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헐. 지금 나 때렸어요?”

“너 엉덩이 맞는 거 좋아하잖아. 한 대로 모자라면 더 때려 줄 수도 있고.”

“그런…!”

최상혁이 뻔뻔하게 말했다. 사실은 사실이었기에 김민석은 반박하지도 못하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최상혁이 그런 김민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코웃음을 쳤다.

계속 올라타 있으면 무거울 것 같았지만, 최상혁의 몸 위에서 내려갈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김민석은 손가락 끝으로 최상혁의 근육질 가슴과 단단한 어깨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분위기는 매우 편안하고 평온했다. 덕분에 김민석은 편한 마음으로 불편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나 어떻게 찾았어요? 핸드폰도 안 가지고 있고, 현금만 써서 이동했는데.”

“감히 네가 날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아? 너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야.”

최상혁은 그를 찾은 방법은 쏙 빼놓고 말하며 김민석의 이마를 손끝으로 콕콕 찔렀다.

“서창섭… 죽은 거 아니죠? 나 기억이 희미하긴 한데….”

“스크래치나 좀 내고 말았어. 죽이려면 제대로 쑤셔 버리든지.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휘두른다고 사람이 죽겠어?”

최상혁은 서창섭이 죽었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가슴에 볼을 댄 채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머리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온갖 생각들이 스멀스멀 중앙으로 기어 나왔다.

“그럼 서창섭은….”

“안전한 곳에 처박아 놨어. 입도 틀어막아 놨으니 쓸데없는 말을 나불거리지 못할 거야.”

최상혁은 마치 김민석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

김민석은 잠시 숨을 몰아쉬며 할 말을 찾았다. 해야 할 말이 많기도 했고, 반대로 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기도 했다.

“서하윤.”

“왜요.”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마.”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까지 다 들리는데.”

“…….”

김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최상혁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싸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네 눈에는 대체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거야.”

최상혁이 문득 말했다. 김민석은 그가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인지, 아니면 그냥 한 말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대자, 최상혁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혁 씨는…. 잘생기고, 키도 키고, 근육질이고, 돈도 많고…. 워커홀릭에 무뚝뚝하고…. 서하윤에게 호구 잡혀 살고….”

호구 잡혀 산다는 말에 최상혁의 한쪽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멋지고… 능력 있고…. 그런 남자?”

김민석이 좋은 말로 마무리를 짓자 최상혁이 애쓴다는 듯 손가락으로 김민석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그런 나라고 바닥에서 뒹굴던 시절이 없을 것 같아?”

묵직한 목소리였다. 최상혁의 말끝에 깃든 옅은 어둠에 김민석은 멈칫하고 말았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처박혀 뒹굴어 본…. 비참하고 처량하고 수치스러워서 차마 남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은 비루한 과거 따위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보지?”

최상혁의 말을 잠시 곱씹던 김민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상혁 씨는… 최상혁 씨잖아요.”

“그래. 나 최상혁이야. 그런데 그런 나한테도 비루한 과거쯤은 있어. 사람이라면 작든 크든 간에 다 하나쯤 갖고 있지 않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그런 과거 정도는.”

“상혁 씨….”

김민석은 어둡게 반짝이는 최상혁의 눈을 보다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쿵. 그의 심장은 견고하고 강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강철같이 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남자가 자신 앞에서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의 흔적을 내보이고 있다. 아마도 김민석의 수치심을 옅게 만들어 주기 위함일 것이다.

“……봤군요?”

김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를 보았다는 건지, 최상혁은 물어보지 않았다.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게 바로 대답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몸을 옅게 떠는 김민석을, 최상혁은 달래 주거나 위로하는 대신 묵묵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그 차분한 눈길이 마음속에 일던 거친 파도를 잠잠하게 잠재웠다. 김민석은 크고 느리게 호흡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최상혁이 사진과 영상에 대해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양부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한 과거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언제부터 알았어요?”

“그게 중요해?”

최상혁이 묵묵한 눈으로 물었다. 김민석은 잠시 그 눈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아니지만, 서하윤한테는 중요할 거예요.”

“며칠 안 됐어.”

최상혁이 짧게 말했다.

“그럼…. 서하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군요?”

“그래. …멍청했지.”

대답하는 최상혁의 검은 눈에 옅은 죄책감이 떠올랐다. 2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하면서 비참한 과거를 필사적으로 숨겨야 했던 서하윤도 아팠겠지만,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최상혁의 마음에도 생채기는 생겼을 것이다.

“그건 상혁 씨 잘못이 아니에요. 서하윤이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했으니까, 알아챌 수 없었던 건 당연해요.”

김민석은 최상혁의 손 위에 손을 겹치며 위로하듯 말했다.

“구속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구속하지 않으려고 했지. 나한테만 묶여 있기에는 아직 어린 녀석이야. 언젠가 떠나겠다고 해도 홀가분하게 보내 주자고 마음먹고 있었어. 일부러 간섭도 구속도 참견도 일절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을 줄이야.”

최상혁은 서하윤의 말대로 일절 구속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서하윤이 서창섭에게 협박받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그것이 서하윤의 요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민석은 깨어나기 전까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최상혁과 서하윤은 서로 스스럼이 없는 연인 관계였다. 최상혁은 귀찮을 만도 한 서하윤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 주었고, 서하윤은 최상혁이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상호 간에 깊은 애정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에는 서하윤에게 있어 최상혁이 어떤 존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서하윤은 최상혁의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고, 서창섭에게 돈을 갖다 바쳤다. 최상혁을 두고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꿈에서의 서하윤은 마치 최상혁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서하윤은 도저히 최상혁에게 서창섭과의 일을 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그 더럽고 역겨운 과거를 알지 못하길 바랐으니까. 그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으니까.

“서하윤은 죽으면 죽었지, 상혁 씨에게 서창섭과의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나 보지.”

최상혁의 목소리에는 옅은 자책이 섞여 있었다. 김민석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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