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하준서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아파트 둘레를 쭉 한 바퀴 돌았다. 혹시라도 아직 택시를 못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희망이었다. 어디에도 서하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하준서는 한참 만에 서하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다.
애옹-
집으로 들어서자 고양이 두 마리가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녀석들은 하준서의 종아리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평소라면 녀석들의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주련만, 하준서는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준서는 서하윤의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텅 비어 있는 서창섭과의 문자 메시지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들여다본다고 지워진 문자가 되살아날 리는 없었다. 하준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창섭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역시나 전화기는 꺼져 있는 상태였다.
“제기랄….”
하준서는 결국 핸드폰을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고 양손에 이마를 묻었다.
서하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택시에 타고 있겠지. 그럼 어디로 가고 있을까? 서창섭에게 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목적이 아니고서야 자신을 따돌리고 이렇게 도망갈 리가 없었다.
최상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서창섭이다. 돈 나올 구석인 서하윤을 찾을 것이야 뻔했다. 그래서 자신이 옆에 붙어 그 새끼가 잡힐 때까지 지키고 있으려 했던 건데…. 이런 식으로 방심한 사이에 쏙 빠져나가 버릴 줄이야. 서하윤을 놓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윤아….”
하준서는 서하윤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전직 경찰인 약쟁이라고 했던가. 보통 인간은 아닐 거다. 서하윤을 어릴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해 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강간과 폭행, 그리고 협박. 최상혁과의 협상 카드로 쓰려고 들 수도 있다.
서하윤이 다시 그 더러운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제발. 제발 무사히만 돌아오기를….
하준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기도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며, 오로지 서하윤을 찾았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럴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쳤다.
한편, 최상혁은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콰앙-!
책상을 부술 듯 내리치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화가 나면 매우 거칠어지는 그의 성정을 잘 아는 김 실장은 차분한 얼굴로 앞에 서 있었다. 최상혁은 이미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말을 씹듯이 내뱉었다.
“서울에 속해 있는 택시 회사에 싹 전화 돌려. 지금부터 10분쯤 **동 **아파트 인근에서 20대 초반 남성 한 명 태운 택시 찾으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창섭이 그 새끼가 어느 지역으로 튀었다고 했지?”
“인천 쪽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배 타고 중국으로 튈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럼 인천으로 애들 몇 명 미리 출발시켜. 서창섭이 핸드폰 켜지는지 신호도 계속 확인하고.”
“예.”
“모든 건 실시간으로 바로바로 나한테 보고해.”
“예. 이사님.”
김 실장이 밖으로 나갔다. 최상혁은 마음과 머리를 차분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와 분노, 그리고 불길한 상상을 제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하윤. 이 멍청한 게.”
최상혁은 의자 손잡이를 부술 듯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순순히 서창섭에게 돈이나 갖다 바치는 서하윤이 나았다. 그러면 적어도 위험한 상황에 처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미친 약쟁이 아가리로 제 발로 기어들어 가다니. 예전의 영악한 서하윤이었다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게 바로 약쟁이다. 약쟁이들은 바닥을 모른다. 특히 약에 취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예측이 안 되는 종자들이었다.
“이게 바로 네가 원한 너 자신인 거냐? 서하윤.”
최상혁은 원래의 영악한 서하윤을 향해 중얼거렸다.
학대하는 부모가 아예 없는 고아 출신. 섹스는커녕 키스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순결한 몸. 가난한 형편에도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벌어먹고 사는 씩씩한 청년. 그리고 협박에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무모한 용기까지…. 진짜 서하윤은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김민석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서하윤은, 아마도 그래서 김민석을 만들어 낸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싶어서. 그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참 멍청한 일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한마디만 했으면 되었을 것을…. 서창섭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을 처리해 달라고, 그 한마디만 했으면 서하윤은 어떠한 걱정도 할 필요 없이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하윤은 쉬운 해결책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김민석이라는 인격 뒤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자존심 세고 성질 나쁜 서하윤이 사실 그렇게나 겁쟁이였다는 것을.
똑똑-
“이사님.”
김 실장이 들어왔다.
“빨래 말해.”
최상혁이 재촉했다.
“택시 회사에 모두 전화를 돌려 확인해 봤지만, 해당 사항에 맞는 손님을 태운 택시는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 택시이거나, 개인택시일 가능성도 있어서 일단 콜 회사와 경기도 지역 택시 회사들에도 연락을 넣어 두었습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겁니다.”
김 실장은 확실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결과를 내고, 다음 방법까지 손써 두었다. 최상혁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길거리를 헤매며 서하윤을 찾고 싶은 생각을 억지로 뿌리치면서,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rrrrr-----
김 실장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때였다. 김 실장 품에 있는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김 실장이 최상혁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받았다. 그러고는 한참 말없이 상대방의 말을 듣더니 대답 없이 전화를 뚝 끊었다.
“뭐야?”
최상혁이 물었다. 김 실장이 최상혁을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찾았답니다. 개인택시 하나가 콜 회사를 통해서 자기가 태운 손님이 그 사람인 것 같다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상황은?”
“술에 취했는지 뒷좌석에 기대서 잠들어 있고, 인천 **동으로 향하는 중이랍니다.”
“…….”
최상혁은 잠시 말없이 고민에 빠졌다. 두 가지 선택지가 눈앞에 놓였다. 하나는 서하윤이 탄 택시에 연락을 넣어 서울로 방향을 돌리게 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대로 가게 둔 채 뒤를 쫓아가 서창섭을 잡는 것이었다.
“그렇겠지…. 그렇다고 하윤이한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말했지? 우리가 아는 걸 하윤이가 알게 되면, 그 녀석 우리 옆에 안 있으려고 할 거야. 나 그 꼴은 못 봐. 그러니 서창섭 일은 네가 알아서 해결해.”
“말은 잘하네. 그러는 너도 정작 하윤이 앞에서는 서창섭의 서 자도 못 꺼낸 주제에.”
“너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하윤이한테 알리기 두려운 거잖아. 하윤이 잃을 게 눈에 뻔히 보여서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당장 하윤이한테 전화해서 한번 얘기해 보지그래. 자는 거 깨워서 전화 바꿔 줘?”
하준서가 했던 말이 귓가에 쟁쟁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서하윤을 잃는 것이 싫어서 그 앞에서 서창섭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서하윤을 위한 일일까. 어두운 과거를 품은 채 내내 불안해하며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은 선택일까. 그건 자신의 이기심이 아닐까.
서하윤은, 서하윤이 만들어 낸 김민석은 서슴없이 서창섭의 아가리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다. 그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것이다. 김민석은 어쩌면 과거의 트라우마를 스스로 이겨 내기 위해 만들어진 서하윤의 무기일 수도 있었다.
“나 구속하려고 하지 마.”
최상혁은 서하윤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억지로 눈과 귀를 틀어막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구속이 될 수도 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지금의 서하윤이라면, 김민석이라면 서창섭에 정면으로 맞서서 트라우마를 이겨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그것을 돕는 선까지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까요, 이사님.”
김 실장이 물었다.
“그대로 목적지까지 가서 내려 주라고 해. 미리 인천에 보내 둔 애들한테 놓치지 말고 뒤밟아서 정확한 목적지 알아내게 하고. 우리도 바로 출발한다.”
최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복 상의를 입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