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서창섭이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이었다. 벌떡 일어난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며, 그가 쥐고 있던 소주병이 테이블 위에 텅 소리를 내면서 넘어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서창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서창섭이 김민석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옆으로 스르륵 무너졌다.
“…서창섭. 서창섭!”
김민석은 서창섭의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하지만 서창섭은 실눈만 겨우 뜬 채 바닥에서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다 옷걸이를 하나 빼 들어 서창섭을 쿡쿡 찌르자 그가 뭐라 뭐라 웅얼거렸다. 하지만 워낙 작은 소리라 뭐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민석은 잠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장 중요한 건 서창섭을 혼내 주는 일이 아니다. 자료를 깨끗이 삭제하는 거다. 그러려면 서창섭의 핸드폰을 다시 훑어볼 필요가 있었다. 만약 아까 삭제되지 않은 다른 클라우드가 있다면 앱이 깔려 있을 것이다.
김민석은 조심스레 서창섭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서둘러 서창섭의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핸드폰이 잡혔다. 그것을 잡아 재빠르게 끄집어내는 순간, 허벅지가 따끔했다.
“뭐, 뭐야!”
김민석은 쪼그린 자세 그대로 뒤로 후다닥 물러서며 외쳤다. 방금 전까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던 서창섭이 상체를 비틀비틀 일으키고 있었다.
“이 창년 새끼가. 감히 나한테 약을 써?”
서창섭이 씹어 먹을 듯 말하며 손에 든 것을 김민석을 향해 집어 던졌다. 하지만 약 기운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그것은 김민석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둘 사이 중간쯤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주사…기?”
김민석은 서창섭이 집어 던진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그것은 아주 얇게 생긴 주사기였다. 김민석은 조금 전 따끔했던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서창섭이 흐흐거리며 웃었다.
“감히 약쟁이한테 약으로 덤벼? 너 오늘 뒈진 줄 알아라, 이 창년아.”
서창섭이 그렇게 말하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약 기운이 돌기는 돌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김민석은 달랐다. 뭔가 강제로 주입당했다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시야가 구겨진 종이처럼 우그러들었다.
“이게… 뭐….”
김민석은 바닥에 그대로 주르륵 늘어지며 중얼거렸다.
“뭐긴 뭐야. 약이지. 이거 한 대가 얼마나 비싼 건 줄이나 알아? 뽕 알지? 뽕? 사람을 뽕뽕 가게 해 주니까 뽕이라고 부르는 거야.”
서창섭이 비틀비틀 걸어 김민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김민석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김민석은 서창섭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약에 취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정신이 점점 멍해져 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내가, 씨발. 어릴 때부터 거둬 키운 정을 생각해서 돈만 좀 받아먹고 떨어져 줄까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 말이야.”
서창섭이 말을 주절거리며 김민석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었다. 김민석은 흐물흐물 늘어진 채 서창섭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약 기운 때문에 침대 위에 올리기는 힘들었던 듯, 침대 옆에다가 김민석을 끌어 놓은 서창섭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셔츠를 벗더니 바지까지 벗기 시작했다. 보기 싫을 정도로 깡마른 몸과, 그리고 정반대로 툭 튀어나와 늘어진 아랫배가 눈을 찔렀다. 꿈속에서 헉헉대던 서창섭이 기억났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비틀거릴 때마다 침대를 짚어 가며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서창섭이 김민석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씨발, 좀 크고 나서는 하도 앙탈을 부려서 못 따먹었는데. 기억을 잃었다고? 오냐. 내가 오늘 내 좆맛을 다시 알려 주마.”
“좆… 까….”
김민석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욕을 했다.
철썩-!
“윽….”
서창섭이 바로 따귀를 날렸다. 옆으로 돌아간 얼굴이 불이라도 난 듯 화끈거렸다. 서창섭은 곧장 김민석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 냈다. 다리를 움직여 반항해 보려 했지만 그 짧은 사이 약을 얼마나 주사한 건지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하체가 서늘해졌다. 김민석은 서창섭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씨…발놈….”
철썩-!
욕을 하자 여지없이 따귀가 날아왔다. 눈가가 뜨겁게 타올랐다. 두렵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분해서였다.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모를 살의가 느껴졌다.
서창섭이 헐벗은 김민석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채 자신의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그 침을 윤활유로 이용하여 자신의 성기를 펌프질했다. 역겹게 생긴 성기가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성기가 발기되자, 서창섭은 곧장 김민석의 다리를 벌려 잡았다.
뻑뻑한 뒤에 성기 끄트머리가 닿았다. 김민석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강간당한 기분이었다. 김민석은 부들거리는 손을 품속에 넣었다. 감각조차 둔해진 손에 뭔가가 착 하고 감겼다.
“뒈져!!!”
김민석은 고함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서창섭을 향해 휘둘렀다.
서하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바로 서하윤의 집으로 달려간 하준서는 그가 집에 없는 것과 차 키와 지갑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 목적지는 아파트 입구였다. 어딘가로 가려고 하면 택시를 타고 갈 터였다. 하지만 달려간 아파트 입구에 서하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혹시 얼굴 하얗고 키 요 정도 되는 남자 한 명, 택시 타는 거 못 보셨어요? 방금 전, 5분도 안 됐을 거예요.”
하준서는 경비실에 얼굴을 들이밀며 다급히 물었다. 경비 두 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한참 전부터 택시 타는 사람은 없었어요.”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한 하준서는 아파트 입구 앞에서 거리를 둘러보며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씨발, 씨발, 소리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다 하준서는 문뜩 멈칫했다.
서하윤은 분명 잔뜩 취했다. 술 먹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그건 분명했다. 그 취한 몸으로 이렇게 빨리 없어졌다고? 게다가 집에는 지갑과 차 열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았던가. 택시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무슨 돈으로 택시를 타려 했지?
거기까지 생각한 하준서는 골이 띵해졌다. 그는 바로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거실 소파에 내팽개쳐져 있는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지갑을 펼쳐 보자 카드는 모두 그대로 있고 현금만 몽땅 사라져 있었다.
“하- 기억을 잃었어도 하윤이는 하윤이라 그거지.”
하준서는 헛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서하윤은 막무가내로 도망간 게 아니었다. 이 집 안 어디 구석이나, 혹은 비상계단 따위에 숨어 있다가 하준서가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기어 나온 거다. 그리고 하준서의 지갑에서 현금만 빼서 빠져나갔겠지. 아파트 입구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아마도 후문이나 측문으로 빠져나갔을 터였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영악한 건 여전했다.
하준서는 곧장 최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상혁도 마음이 어지간히 급했던지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곧장 전화를 받았다.
-말해.
“다 생략하고, 내 지갑에서 현금만 빼서 도망갔어. 아마 택시 타고 서창섭에게 향했을 거야. 하윤이 핸드폰을 내가 가지고 있어서 추적할 게 없어. 무슨 방법 없어?”
-…….
핸드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온갖 욕을 쏟아붓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하준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서하윤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택시 탄 건 확실해?
“확실해. 어디서 만나기로 한 건지 모르겠지만 차 키도 두고 간 데다 버스까지 찾아 탈 정신은 없을 테니 택시밖에 수단이 없어. 길어 봐야 지금부터 5분에서 10분 전에 이 아파트 측문이나 후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을 거야. 핸드폰이 없으니 콜택시는 아닐 거고, 그냥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겠지.”
-알았어. 택시 쪽으로 알아보지. 넌… 혹시 서하윤이 돌아올지도 모르니 집에 가 있어.
“무슨 개소리야. 나도 같이 찾을 거야.”
-얼굴도 알려질 만큼 알려진 새끼가 거리 누비고 다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래? 서하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 너까지 끼어서 세상에 홀딱 까발리기라도 하려고? 멍청한 새끼야.
최상혁이 거친 말투로 말했다. 하준서는 반박하지 못했다. 최상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리만 돌아다녀도 사진을 찍히는 판이다. 괜히 서하윤이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는데 자신이 끼어들었다가는…. 서하윤의 약점을 온 세상에 들추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씨발… 일 진행될 때마다 문자라도 날려. 연락 안 해 주면 나도 눈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진행 상황은 알려 줄 테니 얌전히 있기나 해.
뚝. 전화가 끊겼다. 하준서는 핸드폰을 잠시 응시하다가, 욕설을 지껄이며 허망한 눈으로 차들이 오가는 거리를 응시했다. 방금까지 서하윤을 손안에 쥐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손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이렇게 쉽게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서야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