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68화 (68/125)

68화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손님. 손님.”

택시 기사가 부르는 소리에 눈이 뜨였다. 김민석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창밖을 보았다. 불빛들이 번쩍거리는 요란한 유흥가 거리 한가운데였다.

“다 왔어요.”

“아, 네. 잠시 잠들었네요. 얼마예요?”

김민석은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문을 열고 내려서자 택시가 금세 부릉거리며 멀어졌다. 김민석은 북적이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바로 앞에 있는 좁은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번쩍이는 불빛이 없는 어두컴컴한 골목 사이에 싸구려 여인숙 간판이 보였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이 효과가 좀 있었는지 술기운은 어느 정도 가신 상태였다. 하지만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은 여전했다. 김민석은 일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숙취 음료 하나와 소주 여러 병, 종이컵과 안줏거리를 몇 개 샀다.

편의점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김민석은 숙취 음료를 까서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봉지를 뒤적여 종이컵을 꺼냈다. 소주에 약을 타면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서창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신이라면 믿지 않는 상대가 이미 뚜껑을 딴 술을 내밀면 필히 의심할 것이다.

김민석은 품에서 플라스틱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주변의 눈치를 살핀 후, 종이컵 안쪽에 곱게 갈린 가루를 뿌려 살살 흔들며 바닥에 얇게 깔았다. 다행히 약이 하얀색이라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몇 번이고 확인한 김민석은 종이컵을 겹쳐서 봉지 속에 집어넣었다. 위에 컵이 약이 깔린 것, 그리고 밑에 컵이 약이 안 깔린 것이었다.

일을 마친 김민석은 테이블에 엎드리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감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술이 조금 깨었다고는 해도 취한 상태인 건 여전했다. 이대로 서창섭을 만나도 될까? 아니면 근처에 방을 잡아서 몇 시간쯤 자고 일어나 만나러 갈까. 내일 아침까지 간다고 해 뒀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하던 김민석은 이내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아침까지라고 했으니 서창섭은 서하윤이 제법 늦은 밤이나 새벽쯤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 거다. 차라리 지금 이 시각에 가서 허를 찌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취한 상태라 다행이었다. 제정신으로 역겨운 얼굴을 대면한다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래. 가자. 가서 그 새끼 확 조져 버리고 오자.’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다시는 서창섭에게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김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당당한 보무로 편의점을 나서서 여인숙으로 향했다.

여인숙은 싸구려 외관만큼이나 실내도 싸구려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이삼십 년은 족히 운영한 듯 오래된 목조 건물의 느낌이 났다.

딩-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김민석은 붉은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서창섭이 있는 방 앞에 섰다. 방문은 요즘 숙박업소답지 않게 페인트칠이 된 나무문이었다. 벨을 누르려고 했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노크를 했다.

똑똑- 똑똑-

몇 번 두드리고 나자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서창섭은 아무래도 상당히 위태로운 처지에 있는 듯, 문을 벌컥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누구세요.”

문 안쪽에서 서창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서하윤.”

김민석이 짧게 대답하자 그제야 문이 달칵 열렸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김민석의 모습과 주변을 훑은 서창섭이 그가 혼자 온 것을 확인하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김민석은 악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으로 오래된 티가 풀풀 나는 여인숙 방으로 들어섰다.

서창섭은 재킷까지 모두 갖춰 입은 상태였다. 눈이 벌건 것이 잠을 잔 지가 제법 되어 보였다.

“술이랑 안주 좀 사 왔어.”

김민석은 꿈에서 보았던 서하윤의 말투를 흉내 내며 봉투를 서창섭에게 건넸다. 봉투 안을 뒤척이던 서창섭이 소주병을 하나씩 들어 뚜껑을 유심히 살폈다. 그걸 보는 순간 김민석은 속이 서늘해졌다. 진짜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서창섭은 의외로 만만찮은 상대였던 모양이다.

“앉아라.”

서창섭이 말했다. 김민석은 침대 발치에 있는 낡고 작은 테이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래된 의자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슬쩍 살핀 방 안의 분위기는 매우 칙칙했고, 코끝으로 짙은 담배 냄새와 오래 묵은 먼지의 쿰쿰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핸드폰은?”

“못 가져왔어. 몰래 나오느라.”

핸드폰 쓸 일이 있었던 듯, 서창섭이 쯧 하며 혀를 찼다.

“돈은?”

서창섭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그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아 보였다. 가뜩이나 홀쭉하고 초췌하던 안색은 시커멓게 죽어 있고, 얼굴에는 주름이 잔뜩 도드라져 있었다.

“내가 돈을 여기 가져올 만큼 바보로 보여? 당신이야말로 자료는? 지금 도망치고 있는 모양인데 자료를 챙길 시간은 있었어?”

김민석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하자 서창섭이 돌연 흐흐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내가 나이 좀 들었다고 무시하지 마라. 그런 중요한 걸 내 몸에서 떼어 놓고 다닐 만큼 멍청하지 않아. 자료는 전부 여기 있는 내 핸드폰에 저장돼 있어.”

“그게 전부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돈 되는 자료가 그 핸드폰에만 들어 있을 리가 없잖아. 백업은 어디 해 뒀어?”

김민석의 날카로운 물음에 서창섭이 피식 웃었다.

“하긴 넌 멍청한 머리는 아니지. 물론 클라우드에도 저장돼 있어. 돈만 넘기면 이 핸드폰이랑 클라우드 계정까지 다 넘겨줄게. 그러는 너는. 돈은 어디에 있어. 계좌 이체는 안 돼. 현금이나 바로 처리할 수 있는 물건으로 줘야 해. 그 정도 알아서 챙겨 올 눈치는 있지?”

서창섭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선물받았던 시계, 액세서리, 그리고 현금 3천 조금 넘게 가져왔어. 제값만 받아서 처분해도 2억은 충분히 될 거야.”

“넌 분명 3억이라고 했잖아.”

따져 묻는 서창섭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건 현금으로 줄 때고. 나라고 통장에 현금이 몇 억씩 쌓여 있는 줄 알아? 그동안 당신이 긁어 간 돈이 얼만데. 현금 3천이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지. 그리고 그 외에 돈 될 만한 건 시계랑 금붙이뿐이야. 그거라도 받든가. 아니면 자료 다 뿌리고 어디 가서 뒈지든가. 알아서 선택해.”

김민석은 난폭한 눈으로 말하고 봉지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런 다음 종이컵을 꺼내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안주를 뜯을 새도 없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서창섭이 꿀꺽 군침을 삼켰다. 척 봐도 도망 다닌 몰골이다. 이 여인숙을 겨우 잡아 처박힌 게 최선이었을 테니 술이라고 제대로 마셨겠는가. 소주가 당길 게 분명했다.

김민석은 서창섭의 술잔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명이 침침한 게 다행이었다. 종이컵이 제법 크고 깊으니 1/4 정도 채운 정도로는 약가루가 떠다니는 것이 보이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들킬까 봐 심장이 쿵쾅거렸다.

“씨발.”

서창섭이 욕설을 내뱉으며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선 단번에 내용물을 비웠다. 그 모습을 숨죽인 채 지켜보던 김민석은 속으로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에 긴장이 풀리고, 소주로 인한 취기가 살짝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성에 안 차지만 지금 상황이 급하니까 그거라도 받아 주지. 돈은 어디 놔뒀어?”

“자료 먼저 보여 줘. 클라우드 계정도 보여 주고. 그 전에는 죽어도 안 가르쳐 줘.”

“가지고는 왔어?”

“가지고 왔어. 근처에 숨겨 놨어.”

김민석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했다. 진실을 가늠하듯 숨을 색색 몰아쉬며 그를 응시하던 서창섭이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사진첩을 열어 김민석에게 내밀었다.

“확인 빨리해. 오래 켜 놓으면 잡힐 수도 있으니까.”

서창섭이 재촉했다. 김민석은 사진첩에 줄줄이 떠 있는 사진과 영상을 쭉 훑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영상 두 개와 사진 열댓 개였다. 김민석은 곧장 모두 선택해서 그것을 삭제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서창섭에게 내밀었다.

“클라우드 띄워.”

김민석이 요구하자, 서창섭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지. 핸드폰 자료는 삭제했으니 이제 네가 돈을 꺼낼 차례지.”

“돈 있는 장소만 알고 튈지 내가 어떻게 알아. 클라우드 먼저 확인시켜 줘. 싫으면 말고.”

김민석이 강경하게 나가자 서창섭은 쯧, 혀를 차더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다시 핸드폰을 내밀었다. 방금 보았던 사진과 영상들이 저장된 클라우드 자료실이 보였다. 김민석은 서창섭의 마음이 변할세라 서둘러 그것들을 삭제했다. 모두 삭제되었다는 문구가 뜨는 순간,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됐지? 빨리 돈 있는데 불어.”

서창섭이 핸드폰을 빼앗아 서둘러 전원을 꺼 품에 넣으며 말했다.

“클라우드가 한두 개가 아닌데 그게 전부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김민석은 트집을 잡으며 시간을 끌었다. 슬슬 약 기운이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서창섭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았다. 초조함이 밀려왔다. 설마하니 만에 하나를 위해 가져온 과도까지 꺼내야 할 상황이 될까 싶어 등에 진땀이 솟았다.

“씨발, 그까지 해 줬으면 됐지 뭘 더 확인하고 자시고 하겠다는 거야? 너 이 새끼, 진짜 돈 가져온 건 맞아?”

서창섭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소주병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여차하면 그걸로 김민석을 후려칠 생각까지 하는 것 같았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제발. 제발. 약 기운이 빨리 돌기를! 김민석은 속으로 신이란 신에게 다 기원했다.

“서하윤. 대답 안 해?! …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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