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67화 (67/125)

67화

“우리 하윤이가 말이야. 아주 깜찍한 짓을 하려고 하던데?”

-깜찍한 짓?

“날 취하게 만들려고 용을 쓰더란 말이야. 그 전에는 부엌을 한참 뒤적이는 게 내가 썼던 약을 찾으려던 것 같았고…. 아마 약 먹여서 날 재워 놓고 어디로 튀려던 거겠지.”

-지금은 어쩌고 있어?

“취해서 잠깐 자고 있어.”

-취했다고 자리 비우지 말고 잘 지키고 있어. 서창섭이 새끼 아직 못 잡았으니까.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듯했다.

“그까짓 약쟁이 하나 못 잡아서 지금껏 헤매고 있다니 너무 한심한 거 아니야? 최상혁 이름이 울겠다.”

-새끼가 옛날에 짭새 노릇 좀 했다고 눈치가 보통이 아니야. 한번 뒈질 뻔했으니 당분간 숨도 안 쉬고 숨어 있을 거야. 대충 어느 지역으로 튀었는지는 알 것 같으니까 오래 안 걸려.

최상혁의 말에 하준서는 낮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별것도 아닌 인간 하나 잡아 족치는 건 일도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일이 이렇게 꼬일 건 또 뭐란 말인가.

하준서는 서하윤의 핸드폰에 텅 빈 문자함을 다시 켜서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 확인해 보니 하윤이가 서창섭이랑 주고받은 문자 내역을 모두 지웠어. 나 몰래 서창섭이랑 문자를 더 주고받았을 수도 있어. 도망자 신세니 제일 필요한 게 현금이겠지. 아마 하윤이는 날 재워 놓고 서창섭을 만나러 가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럼 서창섭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거군.

“그렇겠지…. 그렇다고 하윤이한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마. 내가 말했지? 우리가 아는 걸 하윤이가 알게 되면, 그 녀석 우리 옆에 안 있으려고 할 거야. 나 그 꼴은 못 봐. 그러니 서창섭 일은 네가 알아서 해결해.”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군. 서하윤한테 진짜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 상태가 저래서 만만하게 느껴지는 모양인데, 원래 보통 눈치 빠른 녀석이 아니야. 속여 먹으려다 되레 당하는 수가 있어.

최상혁의 말을 들은 하준서는 비웃음이 실린 웃음을 흘렸다.

“말은 잘하네. 그러는 너도 정작 하윤이 앞에서는 서창섭의 서 자도 못 꺼낸 주제에.”

-…….

“너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하윤이한테 알리기 두려운 거잖아. 하윤이 잃을 게 눈에 뻔히 보여서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당장 하윤이한테 전화해서 한번 얘기해 보지그래. 자는 거 깨워서 전화 바꿔 줘?”

-닥쳐. 이 씹새끼야.

최상혁이 씹어 먹듯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하준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정도로 타격이 가는 사이가 아니었다.

“닥치긴 뭘 닥쳐. 너나 입 닥치고 가서 그 새끼 빨리 잡아다 족쳐. 그 새끼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서 숨 쉰다는 게 아주 이가 갈리게 끔찍하니까.”

-이쪽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서하윤이나 잘 지켜.

“그건 걱정하지 말고……. 잠깐만.”

한창 말을 하던 하준서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숨을 죽였다.

애옹- 애옹-

닫힌 문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철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하준서, 무슨 일이야?

“쉿.”

하준서는 핸드폰에 대고 경고한 다음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준서는 발소리를 죽여 안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문 바로 앞에서 울고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이런 씨발….”

침대 위를 살핀 하준서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뭐냐고.

핸드폰 너머로 최상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서는 그대로 안방 화장실과 드레스 룸까지 속속들이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서하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관으로 달려가자 신발 역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다급히 현관을 열어 살핀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추어 있었다.

-하준서. 씹새끼야. 말 안 해?

핸드폰 너머가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 예감한 최상혁의 목소리가 험악했다. 하준서는 신발을 구겨 신으며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

“하윤이가 사라졌어.”

-뭐?! 이 새끼야. 애 하나 지키라고 했더니 그것도 제대로 못 해?!

“닥치고, 씨발. 분명히 취해서 잠든 거 확인했는데…. 그새 깨어났을 리가 없는데…. 아무튼 지금 찾아볼 거니까…. 너도 빨리 찾아!”

하준서는 거칠게 전화를 끊으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은 유난히 엘리베이터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씨발. 씨발….”

당혹감은 욕설이 되어 입 밖으로 연신 튀어나왔다. 하준서는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통화한 시간이 길지 않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없는 상태다. 어디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럼 역시 지갑을 가지러 집으로 먼저 갔겠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있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 집에 들른 거라면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을 수도 있다.

땡-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하준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을 누른 후 닫힘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 댔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준서는 초조한 눈으로 변하는 숫자를 보며 생각했다. 서하윤이 설마 통화 내용을 들은 건 아니겠지, 하고.

***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숨죽이고 있던 비상계단에서 조심스레 내려왔다. 그리고 변하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힐끗 한번 확인한 다음, 하준서의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애옹-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양이들이 반겼다. 김민석은 녀석들의 둥근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거실 소파 구석에 놓여 있는 하준서의 지갑을 찾아 들었다. 카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지만 그건 모두 패스했다. 하나라도 결제했다가는 하준서의 핸드폰으로 당장 알림이 날아갈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현금이었다.

다행히 지갑 안에는 오만 원과 만 원권이 고루 섞인 채 제법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오가기에 충분했다.

김민석은 현금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부엌으로 가서 과도 하나를 꺼내 재킷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그런 다음 아까 뒤지지 못했던 부엌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래쪽 서랍장을 열었을 때, 플라스틱 약병 여러 개를 발견했다.

약을 고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김민석은 약 몇 가지를 골라 섞은 다음 도마에 대고 부엌칼 뒷부분으로 쿵쿵 쳐서 가루로 으깼다. 그리고 빈 플라스틱 병 하나에 곱게 갈린 가루만 골라 쓸어 담았다. 무슨 약이 섞여 들어갔는지 몰라도, 서창섭의 힘을 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하준서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김민석.”

술에 취해 시야가 어질어질한 통에 속으로, 그리고 입으로 계속 정신 차리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머리를 맑게 하려고 애썼다. 그나마 하준서가 전화를 받으러 드레스 룸에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그를 따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김민석은 잠들려던 찰나 자신의 바지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빼 가는 하준서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술에 취해 비몽사몽이던 정신이 그 손길에 번쩍 깨어났다. 핸드폰을 빼 간 걸 보면 몰래 누군가와 연락 주고받은 걸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서창섭과 주고받은 문자를 지워 두지 않았으면 일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아무튼 덕분에 이렇게 하준서를 따돌릴 기회를 얻었다. 누구와 통화하는지 몰라도 어차피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서 김민석은 집으로 돌아가 지갑을 챙겨 도망치는 대신, 하준서 집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에 숨어 있는 것을 택했다. 자신이 없어진 걸 눈치채면 하준서는 금세 자신을 찾으러 뛰쳐나갈 것이니, 그사이에 하준서의 지갑 속 돈을 챙겨 서창섭에게 가는 것이 목표였다.

챙길 것을 모두 챙긴 김민석은 고양이 두 마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현관을 닫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지, 아니면 계단을 타고 내려갈지 고민이 되었지만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오히려 계단이 걸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았다. 정면으로 딱 마주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 엘리베이터 쪽에 걸어 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고 지하층을 눌렀다. 그리고 쿵덕쿵덕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응시했다. 숫자가 1에 가까워질수록 심장 뛰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숫자가 1이 되었을 때, 김민석은 숨을 멈추어 버렸다.

잠시 후, 김민석은 멈추었던 숨을 크게 토해 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층으로 접어들었다. 문이 열리자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이 보였다. 김민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동차 출입구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하준서는 분명 서하윤의 집과 택시를 탈 수 있는 아파트 입구를 살피고 다닐 거다. 그래서 김민석은 자동차 출입구를 통해 다른 동 입구로 나온 다음 아파트 후문으로 향했다. 후문에는 역시나 하준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김민석은 크게 안도하며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천 **동 **여인숙이요.”

택시 뒷자리에 타서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인천이요?”

“네.”

택시 기사가 내리라고 할까 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별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김민석은 좌석에 최대한 몸을 깊이 묻은 채 창밖을 주시했다. 다행히 아파트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술 한잔하셨나 봅니다?”

택시 기사가 물었다.

“네.”

멀어지는 아파트를 뒤돌아보던 김민석은 긴 한숨을 몰아쉬며 짧게 대답했다. 택시 기사가 귀찮게 이것저것을 물어올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운전하는 데 전념했다.

“인천까지 얼마나 걸려요?”

“글쎄요. 한 시간 반쯤?”

택시 기사가 대답했다. 한 시간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어쨌든 몸에 가득한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실 정도의 시간은 될 것이다. 김민석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심장이 여전히 쿵덕쿵덕 뛰고 가슴에 품은 칼날의 서늘함이 느껴졌지만, 애써 잠시라도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