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인천시 **동 **여인숙 ***호. 계좌 이체 안 되니 현금과 물건만
문자는 짧았다. 시간조차 없이 장소와 간단한 용건만 떡하니 적혀 있었다. 김민석은 잠시 생각하다 서창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꺼져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서창섭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핸드폰을 오래 켜 놓으면 추적당할 위험이 있을 만큼 위태로운 상황일 터였다. 누굴까. 경찰일까. 불법 도박장 따위에 경찰이 들이닥친 걸 수도 있다. 계좌 이체가 안 된다는 건, 통장에서 돈을 뽑을 여력도 안 된다는 소리다. 그야말로 철통같이 감시받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민석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서창섭의 처지가 이렇게 위태롭다면 매달릴 곳이라고는 서하윤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료를 넘기는 걸 망설이지는 않겠지.
내일 아침까지 갈 테니까 자료 다 챙겨 놔. 분명히 말하지만 자료 넘겨받기 전에 돈은 없어
김민석은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아마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핸드폰을 껐다 켰다 하고 있을 테니, 오래지 않아 문자를 확인할 거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서창섭이 자료도 없이 서하윤을 불러들이는 거다. 잡아 놓고 돈만 빼앗으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대비도 없이 갈 생각은 아니었다. 골격이 전체적으로 아담한 편이라고 해도 서하윤은 엄연한 남자의 몸이었다. 늙은 서창섭을 상대로 힘이 달리지는 않을 거다.
‘문제는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서 거기까지 가느냐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김민석은 서창섭과 주고받은 문자를 모두 삭제했다. 혹시라도 하준서가 보게 될 일을 만들면 안 되었다. 기계적으로 변기 물을 내리고 세면대 수도를 틀어 손을 씻었다. 다행히 마음은 차분했다.
애옹-
벅벅벅-
화장실 문밖에서 고양이 울음이 들리더니 곧 문 긁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철이가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애옹- 하고 울었다.
“마중 온 거야?”
김민석은 상냥하게 말하며 철이를 안아 들었다. 거실 소파를 향해 걸으려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던 순이가 쫄래쫄래 쫓아왔다.
“어서 이리 와서 앉아요. 중요한 장면이라 정지시켜 놨어요.”
하준서가 김민석을 향해 손짓했다. 김민석은 자리에 앉아 아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 향이 폴폴 풍겼다. 편안한 향기였다.
영화가 다시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눈은 영화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최상혁이 했던 말이나 하준서의 행동으로 볼 때, 혼자 외출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휙 하니 나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에 들러 지갑도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하준서를 따돌려야 한다.
‘하지만….’
김민석은 어깨에 기댄 채로 하준서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이 끈질긴 남자를 보통 수단으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다….’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던 김민석은 영화가 거의 끝나 가는 것을 보며 입을 뗐다.
“맥주, 마시면서 보면 좋겠는데. 맥주 있어요?”
슬쩍 물은 김민석은 제발 맥주가 없기를 바랐다. 그래야 저번처럼 맥주를 사러 간답시고 혼자 나갈 핑곗거리가 생긴다.
“아, 진작 말하지. 맥주 당연히 있죠.”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를 다시 소파에 끌어 앉혔다.
“아니에요. 준서 씨는 앉아 있어요. 내가 가져올게요.”
“하지만….”
“항상 준서 씨가 해 줬잖아요. 나도 맥주 정도는 찾아올 수 있어요.”
김민석은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도착한 김민석은 일단 냉장고를 열었다. 뭐든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냉장고 안은 의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는 맥주도 몇 종류가 들어 있었다.
김민석은 냉장고 안을 눈으로 빠르게 훑으며 맥주를 고르는 시늉을 했다. 냉장고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약병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에 하준서가 음료에 이완제를 타 줬던 걸 생각하면 분명 부엌에 약이 있을 터인데, 대관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맥주 두 캔을 골라서 싱크대에 올렸다. 그러면서 맥주잔을 찾는답시고 여길 열었다 저길 열었다 부산스레 움직였다. 수납장에는 그릇이나 컵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약병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윤 씨?”
시간을 너무 끈 건지 하준서가 불렀다.
“아, 다 됐어요. 지금 가요.”
김민석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대답하고는 유리잔과 맥주 두 캔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맥주 캔을 따서 유리잔에 따른 김민석은 하준서에게 잔을 하나 건네며 물었다.
“준서 씨는 주량이 어떻게 돼요?”
“나요? 별로 세지는 않아요. 그냥 사람들이랑 적당히 어울릴 수 있을 정도?”
하준서가 정말이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김민석이 잠시 망설이자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자, 건배하죠.”
챙-
유리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일단 최대한 안 마시면서 최대한 먹여 보자.’
김민석은 그렇게 마음먹으면서 맥주를 한 모금 꼴깍 마셨다.
“후우….”
서하윤은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살짝 비틀비틀하는 것이 단단히 취한 게 분명했다.
“하윤 씨. 괜찮아요? 너무 많이 마셨나?”
하준서가 등을 쓰다듬으며 묻자, 서하윤이 얼굴을 번쩍 들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이렇게 주량이 세요? 왜 나만 취해요?”
서하윤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하준서는 거실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빈 맥주 캔들을 힐끗 훑었다. 그가 작정을 하고 자신을 취하게 하려는 거야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은 최대한 안 마시면서 하준서만 양껏 마시게 만들려는 작태에 적당히 어울려 주었다. 문제라면, 하준서는 맥주 정도로는 단 한 번도 취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잘 안 취하네. 하윤 씨는 좀 취한 것 같다. 그죠?”
하준서는 서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며 말했다. 어깨에 기댄 서하윤의 숨결에서 알코올 냄새가 폴폴 풍겼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듯이, 서하윤의 술주정은 취하면 잠드는 것이었다.
“피곤하겠다. 피곤하죠? 한숨 자는 게 어때요.”
“으음…. 싫어요…. 아직 밤도 아닌데.”
서하윤은 말로는 싫다면서도 몸으로는 하준서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준서는 작게 웃으며 그런 서하윤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그를 침대에 눕힌 다음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철이와 순이가 쫄래쫄래 따라와 침대 위로 폴짝 점프했다. 서하윤이 잘 것을 눈치챈 녀석들은 각자 그의 머리맡과 다리 사이에 이리저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안 잘 거예요. 안 잘 건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막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요. 혹시 나 또 약 먹였어요?”
서하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하준서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술이랑 약이랑 같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우리 하윤이 몸에 안 좋을 일을 내가 왜 하겠어요. 그러지 말고 한숨만 자요.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술이 좀 깰 거예요.”
“그치만….”
끔뻑끔뻑 감기는 눈을 애써 부릅뜨려 노력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내가 깨워 줄게요. 그럼 됐죠?”
하준서가 말하자 서하윤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고서는 길게 하품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지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도롱도롱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준서는 그런 서하윤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다가 귓가에 속삭였다.
“하윤 씨.”
“…….”
서하윤은 대답이 없었다. 볼을 콕 찔러 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깊이 잠든 걸 확인한 하준서는 슬그머니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서하윤의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잘 자요.”
뺨에 살짝 입을 맞춘 하준서는 발소리를 죽여 안방을 나섰다. 문을 닫으며 본 침대 위에는 서하윤과 고양이 두 마리가 옹기종기 누워 잠들어 있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하준서는 서하윤의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최근 통화 목록엔 서창섭 이름이 떠 있었지만, 서창섭과 주고받은 문자는 모조리 삭제되어 있었다.
“흐음….”
하준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하윤의 핸드폰을 내렸다. 대신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올려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
벨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뭐야.
최상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준서는 손에 쥔 서하윤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하윤이가 말이야. 아주 깜찍한 짓을 하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