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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65화 (65/125)

65화

최상혁이 일어난 것은 오후 2시 즈음이었다. 몇 시간 자지 않고 일어났음에도, 샤워를 하고 나온 그는 생생하고 강렬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또 출근해야 해요?”

김민석은 안방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오는 최상혁을 보고 물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모자라 철야를 하고 다시 출근이라니. 너무 과로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누구누구 씨를 먹여 살리려면 부지런히 벌어야지.”

최상혁이 무뚝뚝하게 농담을 했다. 아니, 어쩌면 진담일지도 몰랐다. 그때 그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크고 단단한 손으로 김민석의 머리를 헝클었다. 까치집이 된 머리가 영 희한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준서 집에 가서 놀고 있어.”

최상혁이 뜬금없이 말했다.

“네?”

김민석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래요. 철이랑 순이도 계속 집에 혼자 둘 수도 없고, 우리 집에 가서 놀아요.”

하준서가 신나서 말했다.

김민석의 머릿속에 하준서 집에 있는 방 하나가 떠올랐다.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아, 하윤 씨 팔에 소름 돋았네. 무슨 상상을 했기에 이렇게 닭살이 됐어요. 혹시 우리 집에 있는 그 방이라도 생각한 거예요?”

하준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었다.

“애 놀래키지 말고 얌전히 데리고 놀고 있어.”

최상혁이 하준서를 향해 눈으로 욕을 하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 방은 당분간 봉인해 두는 거로 하지 뭐. 그러니 걱정 말고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최상혁도 가라잖아요. 그러고 보니 철이랑 순이 밥도 지금쯤 다 떨어졌을 것 같은데.”

갈 생각이 없었는데 하준서의 마지막 말에 김민석은 살짝 마음이 약해졌다.

“괜찮으니까 그 집에 가서 놀고 있어. 퇴근할 때 전화할 테니까.”

최상혁이 거듭 말했다. 김민석은 그가 어제부터 영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대뜸 왜 그러냐고 묻기에는 또 애매했다.

“갈 거죠?”

하준서가 물었다. 최상혁이 앞에 우뚝 선 채 빤히 응시하며 김민석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쏠리자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김민석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어서 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요. 말 나온 김에 얼른 가게.”

하준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촉했다.

“지금? 바로요?”

김민석은 당황한 얼굴로 하준서를 보았다.

“철이랑 순이 쫄쫄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니까요? 불쌍하지도 않아요?”

하준서가 보채고 들었다. 최상혁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라는 뜻 같았다. 김민석은 결국 소파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옷을 대충 골라 갈아입었다.

드레스 룸에서 나오자, 거실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키도 훌쩍 크고 체격도 좋은 두 남자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두 사람은 김민석이 드레스 룸에 있는 동안 뭔가 대화를 주고받은 분위기였다. 본처와 첩이 나눌 화제가 남편 이야기밖에 더 있겠는가. 김민석은 둘이 자신에 대해 어떤 대화를 했을지 대단히 궁금했다. 하지만 차마 물을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가운데 선 김민석과, 그를 중심으로 양옆에 선 두 남자.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세 사람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이 두 남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상이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땡-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자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밖으로 이끌었다.

“다녀오세요.”

김민석은 몸을 돌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최상혁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최상혁이 답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준서의 집에 들어간 순간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밥그릇 앞에서 목이 터져라 애옹애옹 울고 있었다.

“이런….”

하준서가 혀를 차며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서더니 사료 통을 꺼내 고양이 밥그릇을 채워 주었다. 고양이 두 마리는 하준서와 김민석을 본체만체하며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집도 바로 옆인데 잠깐 들러서 밥이라도 주고 오지 그랬어요.”

김민석은 사료를 거의 흡입하는 두 마리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일부러 제법 주고 왔는데도 그래요. 길에서 굶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둘 다 식탐이 강하거든요.”

하준서의 말이 빈말은 아닌 듯, 사료를 흡입하는 두 마리의 몸집이 제법 퉁퉁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고로 통통해야 귀여운 것 아니겠는가. 김민석은 조심조심 고양이들 뒤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서 고양이들의 등을 쓰다듬었다. 사료를 냠냠 먹는 고양이들 등이 그르릉 진동하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쓰다듬어 주는 것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었다.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부드러운 감촉에 마음이 보들보들해졌다.

“그렇게 귀여워요?”

뒤로 다가온 하준서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김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난 하윤 씨가 더 귀여운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꼭 고양이 취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애정을 받는 느낌이라 오히려 좋았다.

둘은 또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 둘이서 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전에 보던 공포 영화 시리즈 중 다음 편을 켰다.

어느새 철이가 다가와 ‘앩!’ 하고 희한한 소리를 내며 김민석의 무릎 위로 점프했다. 귀여워서 양손으로 폭풍 쓰다듬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이번에는 순이가 살랑살랑 걸어왔다. 꼬리를 바짝 치켜올린 채 파르륵 파르륵 떠는 게 기분 좋아 보이는 모양새였다.

“순이야. 너도 이리 와 봐.”

김민석은 조심스레 순이를 불렀다. 잠시 멈춰 서서 빤히 그를 쳐다보던 순이가 곧 소파 위로 점프했다. 그러고는 김민석의 옆에 다가와서 팔뚝에 머리를 콩 하고 부딪혔다.

“저것 봐. 밥은 내가 줬는데 애교는 하윤이한테만 부리네.”

하준서가 웃음기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철이와 순이는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그르렁거리며 온몸을 김민석에게 비비적댔다. 김민석은 그런 둘의 애정 표현이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저리하다 보니 어느새 두 마리가 그리 넓지도 않은 김민석의 허벅지 위에 낑겨 누웠다. 김민석은 두 마리가 허벅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녀석들을 받쳐 줘야만 했다. 굴러떨어지기 딱 좋은 자세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녀석은 그르렁그르렁 울며 잠을 청했다. 하준서가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본 적 있어요. 이런 장면.”

김민석은 자신 무릎 위의 두 고양이와, 옆에 앉아 있는 하준서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이런 장면이요?”

하준서가 물었다.

“네. 꿈에서요. 준서 씨랑 이렇게 같이 있는데 무릎 위에는 철이랑 순이가 낑겨 누워 있고….”

“우리 집에 오면 자주 그래요. 요 두 녀석이 하윤이만 편애해서요.”

“그러네…. 이랬겠어요.”

“그 꿈속에서 기분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나직하게 묻는 하준서의 눈빛이 그윽했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의 눈을 잠시 마주 보다가 입을 뗐다.

“좋았어요. 따뜻하고… 포근하고… 굉장히 편안한 기분이었어요. 꼭… 지금처럼요.”

하준서의 눈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김민석은 눈을 내리감으며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철이와 순이가 그르렁거리는 가운데 부드럽고 감미로운 키스가 이어졌다. 가슴 가득 느껴지는 평화로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벼운 키스가 끝난 뒤, 두 사람과 두 고양이가 소파 위에 옹기종기 모인 채 TV를 봤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어깨에 편히 기댄 채 공포 영화에 집중했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큰 소리가 나거나 긴장되는 장면에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면 속이 살짝 루즈한 상황이 되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솔솔 왔다. 배부르게 먹고 고양이들 울음소리와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있으려니 졸린 건 당연했다. 그렇게 눈을 몇 번이나 끔뻑끔뻑하고 있을 때 TV 속 장면이 확 바뀌며 유령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TV에서 나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한 번 징 울리고 꺼졌다. 김민석은 놀라서 흠칫 몸을 굳혔다가 하준서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TV에서 나온 큰 소리 때문인지, 그는 진동 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혹시 모르는 일이므로 김민석은 잠시 영화에 집중하는 체했다. 그러다 중요한 장면이 지나가고 나자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냈다.

“왜요? 불편해요?”

“아뇨. 화장실 좀 다녀오려고요.”

김민석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김민석 무릎 위에 버티고 있는 고양이들을 척척 들어 자신의 무릎 위로 옮겼다.

애옹-

철이가 항의했다. 김민석은 그런 철이의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진동으로 해 놓길 잘했다. 만약 소리가 났다면 뭔가 핑계를 대야 했을 테니까.

진동이 한 번 울리고 꺼진 것에서 짐작했듯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발신자는 서창섭이었다.

인천시 **동 **여인숙 ***호. 계좌 이체 안 되니 현금과 물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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