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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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귓전을 때리는 그 소리에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김민석은 그대로 돌처럼 굳은 채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하준서가 그런 김민석의 손을 꼭 잡더니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쓸데없는 스팸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니까.”
전화를 꺼 버린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돌려 넣었다. 김민석은 벨 소리가 하준서의 것이었음을 알고 굳었던 몸을 스르륵 풀었다. 뭔가가 머리를 텅 치고 지나갔다. 그래. 지금 자신은 이렇게 하하 호호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민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파의 쿠션을 들추고 구석구석에 손을 찔러 넣어 가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뭐 해요, 하윤 씨?”
“핸드폰… 핸드폰 찾아요. 여기 어디 뒀던 것 같은데. 어디 있지.”
초조한 얼굴로 소파 구석구석을 뒤지던 김민석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몸을 멈칫했다.
설마…. 하준서가 핸드폰을 본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온몸이 차게 식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준서가 그 사진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졌다.
“혹시… 내 핸드폰 못 봤어요?”
김민석은 하준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갔다.
“핸드폰요? 못 봤는데. 하윤 씨 핸드폰 거의 안 쓰잖아요. 어제 나랑 놀 때 어디 굴러 들어간 거 아니에요?”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김민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하준서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어서,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같이 찾아 줄게요.”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소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대기까지 했다.
“그냥 제가 찾으면….”
“아, 저건가?”
바닥에 얼굴을 붙인 채 소파 밑을 살피던 하준서가 말했다. 김민석은 서둘러 바닥에 얼굴을 대고 소파 밑을 살폈다. 거기에 핸드폰이 들어가 있었다.
김민석은 하준서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기 전에 번개같이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존재 자체를 감추어 버리고 싶다는 듯 서둘러 주머니 깊숙이 넣어 버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찾았네요.”
“별게 다 고맙네요. 고마우면 같이 설거지나 해 줘요.”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김민석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부엌으로 인도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했다. 하준서가 수세미로 문지르면 김민석이 헹궈서 건조대에 올리는 식이었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면서도, 김민석의 온 신경은 주머니 속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
그사이 서창섭이 연락을 해 오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돈을 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른다. 무슨 중독인지 모르겠지만, 도박 따위라면 하룻밤 사이에 천만 원 정도는 홀랑 날려 먹었을 수도 있다. 사진 한 장으로 천만 원이나 받아 냈으니 이제는 더한 것을 문자로 보내왔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설거지를 마친 김민석은 하준서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향했다. 하준서는 별반 말없이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화장실에 들어선 김민석은 세면대 물을 틀고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띄우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 있는 게 보였다. 서창섭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는 5통.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띄엄띄엄 와 있었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 문자 창을 띄웠다. 서창섭의 문자가 3통 도착해 있었다.
하윤아. 아빠 문제가 좀 생겼으니까 전화 받아라.
서하윤. 아빠 지금 큰일 났으니까 통장으로 돈 좀 보내 봐라. 오백만 원만.
씨발년아. 전화도 안 받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전화를 받든지 돈을 보내든지 안 해?
마지막 문자는 오전 5시 반쯤에 도착한 것이었다.
김민석은 문자가 도착한 시각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밤이며 새벽 할 것 없이 전화와 문자를 한 걸 보면 서창섭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혹시 도박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던 걸까. 5시 반 이후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어딘가에 잡혔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연락할 상황이 못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었을 수도 있겠지.
연락이 끊기니 오히려 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락이 닿지 않자 빡친 서창섭이 무슨 일인가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창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현재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예상이 맞은 걸까.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김민석은 서창섭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통화를 종료했다.
“하아….”
핸드폰을 양손으로 붙든 채 이마를 묻고 있으려니 가슴이 묵직해졌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반, 어떻게든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반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림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허공에 대고 묻다 보면 무슨 대답이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최상혁에게 이 일에 대해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조폭 비슷한 것…. 꿈속에서는 사채업자 따위라고 했으니 서창섭 같은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손봐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안 돼.”
김민석은 핸드폰을 부숴 버릴 듯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최상혁에게 서하윤의 그런 과거를 밝힐 수는 없었다. 서하윤이 그렇게 뜯기면서도 결단코 지켰던 비밀이다. 타인인 자신이 멋대로 내보이는 건 안 될 짓이었다.
무엇보다…. 김민석 자신도 그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서하윤으로 살고 있다. 어쩌면 이대로 서하윤으로 쭉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서하윤의 일은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 최상혁이나 하준서에게 그런 더럽고 역겨운 과거를 들키고 싶지 않다. 설사 그들이 과거를 보듬어 준다고 한들, 자신이 그들의 얼굴을 떳떳하게 보고 살 자신이 없었다.
앞뒤가 꽉꽉 막혀 있었다.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차라리 서창섭을 만나 담판을 짓는 게 낫지 않을까.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약점을 순순히 내놓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든 사진과 영상을 몽땅 받아 내는 거다. 서창섭은 지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럴 때 제법 큰돈을 한 번에 주겠다고 하면 미끼를 덥석 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김민석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건 여전했지만, 머리 한구석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괜히 덫에 걸린 동물처럼 굴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진짜 서하윤이었다면 수년간 당해 왔던 학대에 대한 트라우마로 서창섭 앞에서 꼼짝도 못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김민석은 서하윤이 아니다. 서창섭 따위, 두렵지 않다. 더럽고 역겨울 뿐이다. 그런 놈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마음을 다잡은 서하윤은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서창섭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돈 갖다 바치는 것도 지긋지긋해. 있는 거 다 끌어모아서 1억 해 줄 테니까, 사진이랑 영상. 증거될 만한 거 몽땅 내놔. 싫으면 당신이 보낸 사진 가지고 경찰서 갈 거야. 나도 이제는 이판사판이야. 더는 끌려다닐 생각 없어. 잘 생각해서 결정해.
문자 창에 나열된 글을 몇 번이나 훑어본 김민석은 1억을 3억으로 고쳤다. 아마 1억 정도는 이미 뜯어먹었을 테니 미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3억 정도라면 서창섭이 혹할 만한 금액일 터였다.
김민석은 문자 전송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서창섭의 핸드폰이 꺼져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켜질 것이다. 그때 문자를 보면 바로 연락해 오겠지. 일단은 마음을 차분히 먹고 그때를 기다려야 했다.
김민석은 크게 호흡을 한 번 하고 핸드폰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세면대에서 시원하게 세수를 한 번 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나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 밖으로 나오니 하준서가 거실에서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 김민석은 슬그머니 하준서 옆에 가서 앉았다. 이런저런 참견이 심한 하준서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김민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예능 같은 거 별로 본 적 없는데, 막상 보고 있으니까 그럭저럭 재미있네요.”
하준서가 말했다.
“그죠? 얼마나 재밌는데요.”
김민석은 TV에서 나오는 장면에 흐흐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하준서의 어깨에 편히 머리를 기대고 몸에서 힘을 뺐다. 꼭 맞춘 것처럼 편안했다.
웃긴 장면이 나왔다. 하준서와 김민석이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부드러운 향기와 그의 웃음소리, 그리고 침실에 깊이 잠들어 있을 최상혁의 존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절대 두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