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06.
햇살에 눈이 부셨다. 김민석은 꿈의 여운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꿈속 서하윤의 말에 너무 웃겼다. 세상에 최상혁한테 반말을 찍찍 하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호구 새끼라니. 정말 대담한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그렇게 웃어?”
최상혁이 물었다.
“아… 호구가….”
무의식중에 그 물음에 답하던 김민석은 곧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옆에 최상혁이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하준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구가?”
최상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김민석은 아차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니, 아니. 말이 잘못 나왔어요. 그런데… 설마 밤새워 일하고 이제 온 거예요? 엄청 피곤해 보여요.”
김민석은 최상혁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항상 말끔했던 남자의 모습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위쪽 단추를 풀고 소매를 접어 올린 와이셔츠하며 살짝 흐트러진 머리, 그리고 얼굴에도 피곤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아…. 하준서 씨는….”
김민석이 하준서를 찾자, 최상혁이 몸을 홱 돌려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김민석은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곱게 개켜진 잠옷과 속옷이 놓여 있었다. 이불을 젖혀 보니 팅팅 부은 젖꼭지하며 몸 여기저기 찍힌 키스 마크가 눈을 어지럽혔다. 김민석은 서둘러 속옷과 잠옷을 껴입었다.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안방 문을 나서기 무섭게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났다.
“아, 일어났어요?”
부엌 싱크대 앞에 서 있던 하준서가 상큼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직 안 갔어요?”
김민석은 거실 창 너머 훤한 하늘을 보다 말했다.
“우리 하윤 씨 밥 먹여야죠.”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도마 위의 두부를 송송 썰어 냄비 속에 쏟아 넣었다.
꼬르륵-
배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울렸다. 고소한 된장찌개 냄새를 맡으니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생리 현상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배를 문지르자, 식탁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최상혁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 주었다. 앉으라는 말인 것 같았다.
김민석은 식탁에 앉은 채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 하준서를 보았다. 그는 요리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그렇게 하준서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사실 신경은 온통 최상혁에게 쏠려 있었다. 대체 언제 돌아온 건지. 어디까지 본 건지. 너무 궁금했다. 설마 나체로 하준서와 엉켜 자고 있는 것까지 본 걸까? 그렇다면 정말… 한숨만 나왔다.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다가 어느 순간 최상혁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딸꾹-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딸꾹- 딸꾹-
한번 시작된 딸꾹질은 쉽게 멈추질 않았다. 김민석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최상혁이 작게 혀를 차더니 생수통을 까서 내밀었다. 김민석은 그걸 받아 꿀꺽꿀꺽 삼켰다. 한 통을 다 비우고 나자 다행히 딸꾹질이 멈췄다.
“그렇게 눈치를 볼 거면서 저 새끼랑 붙어먹긴 왜 붙어먹어.”
최상혁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하준서가 하도 본처랑 첩 얘길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이입되어 버린 것 같았다. 김민석은 바람피우다 본처에게 들킨 남편 심정이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안절부절못했다. 힐끗 시선을 올리니 최상혁은 다리를 꼰 채로 김민석을 향해 눈으로 욕을 던지고 있었다.
“미안… 아니 죄송….”
김민석이 웅얼거리고 있으려니, 하준서가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 냄비를 가져와 식탁 중앙에 올렸다.
“인상 좀 적당히 쓰지? 하윤 씨가 곤란해하잖아. 나랑 밤새 같이 두면 붙어먹을 거 뻔히 알고 간 거 아냐? 자리 깔아 주고 가 놓고 그 위에서 재밌게 놀았다고 구박하면 어떡해.”
“자리 깔아 준 적 없어. 쟤 엉덩이 가벼운 걸 왜 나를 탓해.”
졸지에 엉덩이 가벼운 사람이 되어 버린 김민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준서는 그 말의 뭐가 우스운지 작게 웃으며 밥을 퍼다 날랐다. 김치와 김, 두부 부침과 된장찌개가 오른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김민석에게는 충분한 진수성찬이었다.
“최상혁 눈치 보지 말고 얼른 먹어요. 밤새도록 뒹굴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에너지 보충해야죠.”
“하준서 씨…!”
김민석은 하준서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밤새도록 뒹굴었다니. 최상혁 앞에서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
“부끄러움이 많아져서 너무 귀엽다니까.”
하준서가 김민석의 뺨을 가볍게 꼬집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 다음 된장찌개를 그릇에 덜어 주었다.
“얼른 먹어요.”
하준서가 재촉했다. 김민석은 자신의 옆에 앉은 최상혁의 눈치를 한번 힐끗 살피다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었다. 수증기가 폴폴 올라오는 된장찌개를 한입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눈이 댕그래졌다.
“너무 맛있어요!”
김민석은 조금 전까지 최상혁의 눈치를 살피던 것도 잊고 감동을 실어 외쳤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밥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요.”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두부 부침을 간장에 찍어 밥그릇에 올려 주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투적으로 밥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결국, 김민석은 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된장찌개도 된장찌개거니와 평범한 두부 부침이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직접 만든 집밥을 맘껏 먹게 되다니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말투로 인사한 김민석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숨을 작게 할딱거렸다.
“어디 봐요. 아, 얼마나 잘 먹었는지 배가 올챙이배가 됐네.”
하준서가 손을 뻗어 김민석의 윗배를 쓰다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김민석은 자신의 윗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거기만 볼록 튀어나온 것이 진짜 올챙이배 같았다.
“놀리지 마요.”
김민석은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괜히 잠옷 자락을 잡아당겨 튀어나온 배가 안 보이게 만들었다.
옆에서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최상혁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안 먹어요?”
김민석은 반 그릇이나 남은 밥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씻고 좀 자야겠어.”
최상혁이 피곤이 묻어 나오는 얼굴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안방을 향해 걷던 그가 멈칫 멈추어 서더니, 고개를 돌려 김민석의 턱을 쥐어 올렸다.
“나돌아 다니지 말고 집에만 처박혀 있어.”
“알겠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 김민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혁이 안방으로 사라졌다. 김민석은 그가 사라진 뒤를 물끄러미 살피다 조금 전 꿨던 꿈을 떠올렸다.
꿈속의 서하윤은 여전히 싸가지가 없었다. 연상인 최상혁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 대질 않나, 대놓고 호구 새끼라고 욕하질 않나.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대단히 친밀해 보였다. 김민석은 둘 사이에 흐르던 그 진한 친밀함이 부럽고… 조금 질투가 났다.
서하윤은 생활비를 더 달라고 하면서 왜 이유를 묻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어쩌면 최상혁이 알아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서창섭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것. 그에게 일방적으로 돈을 뜯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단코 그가 몰랐으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가 알아주었으면, 도와주었으면 했던 그 이중적인 마음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한숨까지 내쉬고.”
하준서가 다가와 말했다. 그가 김민석의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며 장난을 쳤다. 어제 샤워하자마자 말리지도 않고 잤던 터라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있었다.
“그냥… 최상혁 씨가 오늘 좀 이상하다 싶어서요. 아니, 어제도 좀 이상했고.”
“왜요? 나랑 같이 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 있어서?”
하준서가 물었다. 솔직히 그 점이 계속 궁금했기에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는 둘이 같이 있으라고 했고, 오늘도 하준서 씨 보고 가라는 얘기도 안 하고…. 솔직히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이렇게 있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구멍 동서끼리 친하게 지낼 수도 있는 거죠.”
“구, 구멍…. 그런 이상한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준서 씨는 얼굴은 그렇게 생겨서 말은 대체 왜 그렇게 막 하고 다녀요.”
김민석이 질색하자, 하준서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내가 변태인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말할 때마다 그렇게 펄쩍 뛰니까 더 놀리고 싶어지잖아요.”
“아우, 진짜. 못 살아.”
김민석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둘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