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60화 (60/125)

60화

“서창섭이면 하윤이 양아빠 아니야?”

“…맞아.”

“뒷조사해 봤어?”

하준서가 일부러 말을 시키는 걸 눈치챈 최상혁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을 펼쳤다. 그가 씹어 뱉듯이 대답을 내뱉었다.

“약쟁이 나부랭이야. 약만 준다고 하면 제 똥도 퍼먹을 인간이야.”

거기까지 말한 최상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른 다음 귀에 가져다 댔다.

“…나야. 아까 조사시켰던 서창섭이. 지금 당장 잡아서 창고에 처박아 놔. …그래. 어차피 뒈질 놈이니까 거칠게 다뤄도 상관없어. 처박아 놓고 연락해.”

“어쩌려고?”

하준서가 물었다.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지.”

나지막한 목소리에 하준서가 진중한 어투로 말했다.

“사진 보낸 걸 보면 이런 게 더 있을 거야. 어릴 때부터 학대해 왔으니 족히 몇 년은 됐겠지. 그동안 사진이든 뭐든 얼마나 될지…. 그거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돼.”

“걱정하지 마. 제 놈 내장 속에 숨긴 것까지 다 토해 내게 할 테니까.”

씹어 먹듯 말하는 최상혁을 향해 하준서가 당부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됐다는 거, 하윤이는 절대 알면 안 돼. 알지?”

“아니지. 알려야지. 그 새끼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면 안심할 거야. 아니면 영원히 불안에 떨며 지내겠지.”

“내 생각은 달라. 서하윤은 지금까지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애야. 너한테 도움을 요청했으면 단번에 해결됐을 일이야. 그런데도 끝까지 숨겼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죽어도 너나 나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쩌면 이번 사고도 그래서 벌인 걸 수도 있고.”

“그래서 차라리 서하윤이 평생 불안에 떨며 살게 하라고? 잠시 아프고 나면 평생이 편해질 일이야. 서창섭 숨통 끊어지는 걸 보고 나면 그까짓 트라우마든 뭐든 다 사라질 거라고.”

“그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생각해 봐, 최상혁. 하윤이 자존심에 자기 그런 과거를 안 우리 곁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할 것 같아? 만약 나라면 그렇게 못 해. 자존심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달린 일이야. 절대 알게 하면 안 돼.”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가지 말 모두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국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너는 이 와중에도 서하윤을 놓치는 걸 제일 걱정하는군. 서하윤이 평생 불안에 떨며 살든 말든, 네 곁에만 묶어 둘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거지?”

최상혁이 책망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너는, 하윤이 놓을 수 있어? 나랑 붙어먹는 거 알고서도 뺨 한 대 못 갈기고 고이 품고 사는 호구 새끼 주제에 하윤이를 놔줄 수 있다고? 너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해. 절대 못 놔. 내가 자존심이 없어서 하윤이가 너랑 붙어먹는 거 뻔히 보면서도 이렇게 안 떠나고 있는 줄 알아? 손에서 놓느니 그 꼴을 보고서라도 잡아 놓고 싶어서 구질구질하게 버티고 있는 거야.”

“…….”

“좀 불안해하면 어때. 시간 지나도 서창섭한테 아무 연락이 없으면 차차 안심하게 될 거야. 그러다 적당히 이유 붙여서 부고라도 날리지 뭐. 교통사고든, 아니면 약 맞다가 뒈졌다고든 간에. 그 새끼가 죽고 나면 그때는 마음 놓지 않겠어?”

“그럼 트라우마는 평생 갈 거야. 그 새끼 비참하게 뒈지는 꼴을 봐야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거라고.”

최상혁은 강경했다. 하준서가 그런 최상혁을 빤히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게 해. 서창섭 비참하게 뒈지는 꼴 보여 줘. 그리고 네 얼굴 보고 살 자신 없어진 하윤이 고이 떠나보내 봐. 대신 나는 거기서 빼 줘. 나는 서창섭이랑 하윤이 과거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는 거야. 그럼 널 떠난 하윤이가 어디로 올 것 같아? 내 품밖에 더 있겠어? 나야 이득이지.”

“내가 너한테 서하윤을 뺏길 것 같아?”

최상혁이 하준서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하윤이가 날 선택하면 게임 끝나는 거지. 우리가 뺏고 뺏기는 게 아니야. 하윤이가 선택하는 거야. 애초에 그렇게 협의한 거 아니었어?”

하준서가 싸늘한 눈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하. 넌 애초에 그렇게 협의하면서도 하윤이가 네가 아닌 날 선택할 거라고는 절대 생각 안 했겠지.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내 제안을 승낙했던 거야. 하지만 시간 좀 지나 보니 다르지? 하윤이가 내 옆에 있을 때 얼마나 편안해하는지, 나한테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하겠지.”

“하준서. 이 씹새끼가.”

“내가 씹새끼인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하윤이 잃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 서창섭에 대해 알리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해. 대신 나는 빼놓고 말이야.”

하준서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통이 졸린 하준서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질 때였다.

달칵-

문고리 잡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거의 동시에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서하윤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최상혁과 하준서가 숨을 멈추었다.

“최상혁 씨? 하준서 씨?”

김민석은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두 사람을 불렀다. 좀처럼 들어가는 일이 없는 컴퓨터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문을 연 건데, 안에는 뜻밖에도 두 사람이 같이 있었다.

최상혁과 하준서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멱살을 잡고 있는 최상혁의 손을 보았다. 그러자 최상혁이 곧바로 하준서의 멱살을 내팽개치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둘이 싸워요?”

김민석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생각에 최상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준서와 섹스하지 말라고 분명히 당부했는데, 오늘 경황이 없는 와중에 일을 쳐 버렸다. 최상혁이 하준서의 멱살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일 터였다.

“최상혁 씨, 나는…. 미안해요.”

김민석은 최상혁을 볼 낯이 없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머리 위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실린 것처럼 무거운 한숨이 푹 떨어졌다. 김민석은 슬며시 눈을 올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최상혁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 버렸고, 하준서는 굳은 듯 아닌 듯 묘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두 사람이 싸운 것은 분명했다.

“어떡할 거야, 최상혁?”

하준서가 최상혁을 향해 물었다.

“아가리 닥쳐.”

최상혁이 험악한 눈으로 내뱉었다. 험한 말을 들은 하준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최상혁 씨, 나는….”

뭔가 핑계라도 대려고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최상혁 품에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rrrrr-----

단순한 핸드폰 벨 소리일 뿐인데 최상혁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졌다. 하준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민석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 때문에 바쁜 최상혁은 놔두고 우리 가서 뭐 좀 먹든지 하죠. 어때요?”

김민석은 자신을 부드럽게 잡아끄는 하준서에게 얼결에 딸려 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최상혁이 핸드폰을 든 채 김민석을 새카만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대단히 무거워 보이는 눈이었다.

달칵-

문이 닫혔다. 최상혁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내가 딸기 우유 갈아 줄게요. 여기 앉아요.”

하준서가 김민석을 식탁에 이끌어 앉히며 물었다. 어쩐지 조금 조급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김민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딸기와 우유, 믹서기를 꺼냈다. 그리고 재료를 집어넣은 다음 갈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믹서기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그…!! …놓…!!”

시끄러운 믹서기 소리만 울리는 와중에 최상혁이 있는 방 쪽에서 뭐라 뭐라 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믹서기 소리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최상혁이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려니 하준서가 갑자기 믹서기 레벨을 올렸다.

위이이이이잉-!!!!

믹서기가 세상을 다 갈아 버릴 것처럼 엄청나게 요란한 소리를 냈다. 딸기를 가는 게 아니라 무슨 벽돌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방 밖까지 새어 나오던 큰 소리는 요란한 믹서기 소리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하준서가 믹서기를 끄고 유리잔에 딸기 우유를 부어 주었다.

“자고 일어나서 갈증 날 텐데 얼른 마셔요.”

하준서가 유리잔을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네. 고마워요.”

김민석은 유리잔을 들고 딸기 우유를 꼴깍꼴깍 삼키면서, 한편으로는 최상혁이 있는 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전화 통화가 끝난 듯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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