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디리릭- 철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하준서는 자신의 품에 잠들어 있는 서하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깨어난 기색은 없었다.
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안방 입구에 최상혁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의 시커먼 눈이 나체로 엉겨 있는 두 사람의 몸을 훑었다.
“쉿- 겨우 재웠어.”
하준서는 입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서하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빼낸 다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옷을 주워 든 하준서가 안방을 나서며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곤히 잠든 서하윤의 모습이 사라졌다.
“얘기 좀 하자.”
하준서는 옷을 주워 입으며 나직이 말했다. 항상 걸고 있던 다정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무표정하고 진지한 얼굴이었다.
최상혁이 앞서서 현관으로 향했다. 하준서가 그런 최상혁의 어깨를 잡았다.
“밖은 안 되고. 지금 혼자 둘 상태가 아니야. 저쪽 방에서 얘기하자.”
하준서가 안방에서 그나마 멀리 떨어진 방을 가리켰다.
방에 들어가자 하준서가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닫았다. 그러고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야?”
최상혁이 양복 상의를 벗으며 물었다. 하준서가 잠시 손으로 입가를 매만지다 입을 뗐다.
“낮잠 자는 사이에 악몽을 꿨어. 예전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는 모양인데…. 깨자마자 울고 구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몸을 벌벌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겨우 진정시켜서 재워 놓기는 했는데….”
“진정을 꼭 섹스로 시켜야 했나 보지?”
최상혁이 비꼬듯 말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질투야? 아서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평소에는 최상혁이 싫어한다고 결단코 거절하던 하윤이가 먼저 하자고 매달렸어. 잊고 싶다고. 잊게 해 달라고. 그게 뭘 뜻하는 것 같아?”
“…꿈을 꾼 것만으로도 그렇게 발작할 정도의 더러운 경험이 있었다는 거겠지.”
최상혁이 씹어 먹듯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서하윤은 그런 티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흐음- 그래? 나는 조금쯤은 예상했었는데.”
“무슨 소리야?”
최상혁이 거칠게 물었다. 하준서가 의자를 빼서 앉은 다음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마조히스트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사람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지. 서하윤 정도 자존심과 성격에 마조히스트라니 희한하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지 말고 요점만 간단히 말해.”
“뭐, 그렇게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이거야. 과거에 성적인 학대나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 중 극히 일부는 자신이 언제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완벽히 통제된 환경 속에서 과거의 경험을 되풀이하려고 하거든. 언제든 말 한마디로 종료시킬 수 있는 안정된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음으로써 과거의 무력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쾌감으로 치환하려는 거지. SM 플레이 속에서 언뜻 보면 주인공이 사디스트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거든. 플레이는 철저히 마조히스트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거야.”
“스스로 과거의 학대를 반복한다고?”
최상혁이 화를 꾹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래. 내 노예가 되고 싶다고 찾아오는 마조히스트 중에 상당수는 과거에 받았던 학대를 되풀이해 받고 싶어 하거든. 과거와 달리 자신이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플레이하면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희열을 느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궤변이군.”
“말도 안 되게 들리겠지. 나라고 과거에 학대받았다고 다 그렇게 된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다만 아주 극소수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환하기도 한다는 거지. 난 하윤이를 그런 타입이라고 짐작했고.”
“서하윤은 그렇게 약해 빠진 인간이 아니야.”
최상혁이 단언했다. 하준서는 한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 멋대로 재단하지 마. 그런 사람들도 나름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기 상처를 보듬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 보려는 거지.”
“됐고. 기억 이야기나 자세히 해 봐.”
“별거 없었어. 자세히 물을 수도 없었고. 그저… 서하윤이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만 했어. 자기가 서하윤이었다면 그 몸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거라고.”
최상혁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하준서가 그런 최상혁을 보며 입을 뗐다.
“넌 직업도 그러면서 하윤이 뒷조사도 안 해 놨어? 2년이나 같이 살아 놓고 어떻게 아는 게 없어?”
“애인 뒤나 캐고 다니는 더러운 취미는 없어.”
최상혁이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잠시 후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뒤를 캐 놓는 게 나을 뻔했군.”
최상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옅은 후회가 느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만 있어 봐.”
하준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서하윤의 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어디로 돈을 이체했다는 건 누군가에게 계좌를 받았으니 가능한 거겠지. 집까지 찾아왔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고…. 핸드폰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겠어?”
하준서가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최상혁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원래 이상한 데서 고지식하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뭐야, 애인 핸드폰에 맘대로 손대는 게 그렇게 찝찝해? 하여튼 쓸데없이 고지식한 녀석이라니까. 됐어, 나 혼자 보면 되니까.”
하준서는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켜서 이것저것 건드리기 시작했다.
“서창섭?”
통화 목록을 훑어본 하준서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최상혁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가 하준서 곁으로 다가와 붙었다. 그런 최상혁을 보고 피식 웃은 하준서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통화 목록을 끄고 문자 창을 띄웠다. 최근 수신한 문자 창에도 서창섭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오백만 원만 입금해라. 아니면 이 아빠도 생각이 있다.
협박성 문자 위로 사진으로 보이는 이미지 파일이 살짝 보였다.
“이거….”
하준서가 섣불리 문자 창을 올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올려 봐.”
옆에서 쳐다보던 최상혁이 재촉했다. 하준서가 조심스레 창을 올렸다.
핸드폰 화면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마치 수십 년 된 여인숙같이 초라한 배경 위로 눈처럼 새하얀 소년의 나체가 떠 있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멍하니 뜬 흐린 눈 아래로 매력적인 눈물점이 보였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아직 완전히 영글지 못한 치부. 하얀 허벅지를 벌려 쥐고 있는 거친 손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최상혁과 하준서는 무슨 말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핸드폰을 쥔 하준서의 손은 어느새 얕게 떨리고 있었고, 최상혁의 숨소리는 매우 거칠었다.
“이런… 씨발 새끼가.”
최상혁이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욕설을 씹었다. 그 속에는 한없이 깊고 무거운 분노와 혐오가 깔려 있었다.
하준서가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자 창을 위로 올렸다. 사진이 모습을 감추며 연이어 수신된 문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힘들면 일단 오백만 보내라. 아쉬운 대로 그걸로 어떻게 해결해 보마.
네가 기억이 없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너는 아빠한테 이러면 안 된다.
하윤아. 전화 받아라. 이 아빠를 이렇게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하준서는 핸드폰 화면을 닫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부숴 버릴 듯 꽉 움켜쥐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다 곧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버릴 듯 꽉 움켜쥐었다.
“하윤아….”
중얼거리는 하준서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연민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최상혁이 갑자기 몸을 돌려 방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준서는 얼른 손을 뻗어 그런 최상혁을 붙잡았다.
“어쩌려고?”
“깨워야지. 그 새끼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야겠어.”
“꿈꾼 것만 해도 벌벌 떨면서 속을 다 게워 내는 애야. 그런 애한테 그런 기억을 캐내겠다니 미쳤어? 겨우 재워 놨어. 일단 그냥 내버려 둬.”
최상혁의 목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의 새카만 눈이 분노로 시커멓게 불타올랐다. 꽉 쥔 주먹에 혈관과 힘줄이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졌다. 하준서는 최상혁이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곤란했다. 서하윤을 더 이상 놀라게 해선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