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55화 (55/125)

55화

“좋은 아침… 어, 표정이 왜 그래요?”

하준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의 다정한 물음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해졌다. 하마터면 김민석은 그대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표정이 영 안 좋았는지, 하준서는 들어오자마자 그를 다정하게 끌어안아 다독였다. 김민석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그런 하준서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왜 이래. 정말 무슨 일 있나 보네? 왜 그래요? 혹시 최상혁이 괴롭혔어요? 나랑 놀았다고 뭐라 그래요?”

“그런 거 아니에요.”

김민석은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하준서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부드러운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아주 조금이지만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하준서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김민석은 그런 하준서의 가슴을 손으로 짚어 말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같이 못 놀겠어요. 그냥 돌아가요.”

“갑자기 왜 그래요? 최상혁이 그 새끼가 진짜 나랑 놀지 말라고 협박이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오늘은 생각이 좀 많아서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래요.”

“하지만….”

“부탁이에요.”

김민석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하준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잠시 김민석을 내려다보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혼자 있기 싫어지면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나한테 전화해요. 알았죠?”

“네. 그럴게요.”

하준서가 영 아쉽고 못 미더운 얼굴로 돌아섰다. 김민석은 현관문을 닫고 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마터면 하준서에게 울면서 매달릴 뻔했다. 서하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자신의 몸을 내버려 둔 채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지금이라면 그런 서하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시간이 필요했다. 무슨 대책을 세우든 간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 분명했다. 오늘 오후 6시까지라는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김민석은 일단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바로 아파트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편의점 안쪽 구석에는 현금 지급기가 있었다. 김민석은 3장의 카드 중에서 서하윤의 이름이 찍혀 있는 체크카드를 꺼내 기계에 밀어 넣었다.

일단 잔액 확인을 눌러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화면이 떴다. 김민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일, 그러니까 곧 서하윤의 생일을 눌러 보았다.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떴다. 김민석은 다시 화면을 띄워서 태어난 해 네 자리를 입력해 보았다. 황당하게도 그 비밀번호가 맞았다.

“서하윤이 완전 바보 아니야?”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렸다. 생년을 비밀번호로 하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잔액 화면이 떴다. 김민석은 헛숨을 들이켰다. 수천만 원의 돈이 통장에 떡하니 들어 있었다.

“맙소사….”

통장 잔액이 한 번도 몇 백만 원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김민석은 어마어마한 금액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화면에 여러 단추가 떴다. 그중에는 계좌 이체 단추도 있었다. 김민석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 창을 띄웠다. 서창섭이 보낸 계좌번호가 보였다. 김민석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계좌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천만 원 금액을 입력했다. 마지막으로 이체하기 버튼이 떴다. 잘게 바들거리는 손가락이 버튼 위를 누를 듯 말 듯 헤맸다.

“……이번 딱 한 번뿐이니까. 잠깐 시간만 끄는 것뿐이니까….”

김민석은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듯 중얼거리다, 떨리는 손으로 이체 버튼을 클릭했다.

rrrrr---

핸드폰이 울렸다. 최상혁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눈매를 찌푸렸다. 하준서의 전화였다.

“뭐야.”

최상혁은 전화를 받자마자 살벌한 목소리를 냈다.

-어이, 최상혁.

하준서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용건이 뭐야.”

-내가 오늘 하윤이를 보러 갔는데 말이야.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로 표정이 그렇게 안 좋은 건 처음 봤어. 이상해서 몰래 하윤이 뒤를 쫓아 나와 봤는데, 편의점 현금 지급기 앞에서 누구한테 돈을 이체하는 것 같아. 서하윤이든 김민석이든 간에 연락할 만한 지인도 없다면서. 누구한테 돈을 보내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하준서의 목소리는 가벼운 듯하면서도 진지했다.

“돈을 이체했다고?”

-바로 옆에서 본 게 아니라 확실하진 않지만, 행동거지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뭔가 이상해.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더라고.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어.”

최상혁은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김 실장.”

“예.”

“서창섭이 조사시킨 거 준비됐나?”

“예, 준비됐습니다.”

“가지고 와.”

김 실장이 파일을 건넸다. 최상혁은 턱짓으로 김 실장을 내보내고 파일을 펼쳤다.

파일을 펼치자마자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가족사진이었다. 서하윤과 꼭 닮은 여자와 서창섭, 그리고 중간에 서 있는 어린 서하윤의 모습이 보였다. 서하윤의 표정이 지나치게 무표정한 것만 빼면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사진이었다.

최상혁은 잠시 동안 사진 속 어린 서하윤의 얼굴을 응시하다 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마약반 형사?”

최상혁은 서창섭의 뜻밖의 과거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약반 형사로 지내다 애 딸린 고급 룸살롱 아가씨와 결혼. 몇 년 지나지 않아 부인은 자궁암으로 사망. 그 후로 쭉 양아들과 함께 살며 생업에 종사. 여기까지는 그래,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하지만 문제는 서하윤이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약쟁이들을 잡다가 약에 홀린 건지, 서창섭은 말 그대로 약쟁이가 되었다. 그럭저럭 살던 집의 재산을 약 사는 데 몽땅 날려 먹는 것도, 직업을 잃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 후로 서창섭의 인생은 나락 그 자체였다. 가족사진 속에서는 제법 잘생겼다 할 만한 했던 외모가 최근 사진에서는 폭삭 늙고 초라해져 있었다.

고아가 된 서하윤을 거둬서 끝까지 키워 준 약쟁이 서창섭. 어떤 빌미로든 아들의 돈을 갈취해 약하는 데 쓰고 있었던 것이야 뻔한 일이다. 다만 문제는 서하윤 정도 되는 성격에 왜 순순히 돈을 내어 주었느냐인데….

몇 가지 가정이 머리를 스쳤다. 어떤 것도 좋은 상상은 아니었다.

최상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서하윤이 죽을 각오로 건물에서 뛰어내린 것. 사고 후 김민석이라는 자신과는 정반대되는 인격체 뒤로 숨어 버린 것. 어쩌면 서창섭이 그 모든 것의 원인일지도 몰랐다.

최상혁은 책상 위에 있는 전화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김 실장이 들어왔다.

“서창섭,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봐.”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눈치 빠른 김 실장이 제자리에 선 채 어딘가로 전화를 돌렸다. 그는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고 입을 뗐다.

“조금 전에 현금을 잔뜩 뽑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이동 중이랍니다. 아마 중독자이니만큼 약을 사러 가는 중으로 추정됩니다.”

“현금을 잔뜩 뽑았다?”

“예.”

타이밍 좋게 서창섭이 현금을 인출한 걸 보면 서하윤이 돈을 이체한 상대가 서창섭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서하윤으로서의 자각도 없는 김민석이, 대체 왜 자신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큰돈을 서창섭에게 이체한 걸까. 지금까지 지켜본 김민석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했다. 서창섭에게 무언가 협박이나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김민석을 그렇게 겁에 질리게 만든 요소는 대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던 최상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액정이 깨진 서하윤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씹새끼’로 저장되어 있는 서창섭의 문자 창을 켰다.

하윤아. 이번 달 생활비가 안 들어왔다. 말도 없이 이러면 곤란하지.

하윤아. 급하니까 일단 천만 원만 보내 줘라.

서하윤. 왜 전화도 안 받니. 지금 이 아빠를 피하는 거니? 보는 즉시 연락해라.

서하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후회하는 수가 있어. 당장 연락해라.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진짜 연락 안 해? 너 이러면 확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

저번에 읽었던 부분까지 다시 훑은 최상혁은 문자 창을 계속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연락을 자주 했는지 창이 끝도 없이 올라갔다. 어르고 달래며 돈을 요구하는 문자가 대부분. 중간중간 협박성 발언이 끼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그놈이 널 끼고 살아 줄 것 같냐? 시간 끌지 말고 돈이나 송금해라.

최상혁은 그중 문자 한 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그놈은 분명 최상혁 자신일 것이고…. 그럼 ‘그 사실’은 무엇일까. 혹시 하준서와 바람을 피우는 걸 서창섭이 알게 되어 그걸로 협박한 걸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김민석이 서창섭에게 돈을 보낼 이유는 없다. 김민석은 자신이 양다리 걸치다 들킨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협박거리가 못 된다.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서창섭을 다시 파 봐. 이런 표면적인 것 말고, 가령 양아들과의 관계라든지, 사생활 같은 것 말이야.”

“알겠습니다.”

김 실장이 짧게 대답했다. 최상혁은 손짓으로 그를 내보냈다. 갑자기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어졌다. 최상혁은 서랍을 열어 구석에 처박힌 지 오래된 담뱃갑을 보았다.

“월 천만 원이나 주면서 집안일이나 시키고, 몇 달이나 데리고 있으면서도 손 끝 하나 안 대고, 집 사 달라니까 오케이하고, 생활비 달라니까 오케이하고,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니까 오케이하고. 거기다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담배까지 끊고. 제3자가 보기에는 찐 사랑인데요, 그거. 완전 한눈에 뿅 가서 사랑에 빠진 거 아니에요?”

서하윤이 재잘거리던 말이 기억났다. 최상혁이 서랍 속에 보관된 담배를 꺼내려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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