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rrrrr---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렸다. 김민석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면에 떠 있는 발신자의 이름은 서창섭이었다.
그는 오전부터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 이미 부재중 전화만 해도 십수 통이었다. 하준서를 능가하는 끈질김이었다.
김민석은 결국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꿔 버렸다. 벨 소리며 진동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불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속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이 몸을 키워 준 양아버지인데 내가 너무 박하게 구는 건가 싶었다.
한참이 더 지나서야 불빛이 끊겼다. 김민석은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어 보았다. 부재중 통화가 스무 건이나 되었다. 화면을 끄려는 순간 문자 창이 떠올랐다.
하윤아. 전화 받아라. 이 아빠를 이렇게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네가 기억이 없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너는 아빠한테 이러면 안 된다.
정 힘들면 일단 오백만 보내라. 아쉬운 대로 그걸로 어떻게 해결해 보마.
속속들이 도착하는 문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하윤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돈을 내놓으라 끈질기게 구는 서창섭이 어이없었다. 어쩌면 서하윤이 애초부터 버릇을 잘못 들인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돈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문자가 또 도착했다. 문자에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보는 순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사진을 클릭했다. 그러자마자 김민석은 헛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한 소년의 나체 사진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눈 밑에 매력적인 눈물점이 찍힌 얼굴은 유난히 예뻤다. 막 중학생쯤 되었을까 싶은 소년은 나체 상태로 촌스러운 무늬의 이불 위에 흐린 눈으로 늘어져 누워 있었다. 두꺼운 손가락을 가진 손이 그런 소년의 하얀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핸드폰이 손에서 툭 떨어졌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김민석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우욱- 욱-”
변기에 얼굴을 처박자마자 속의 것이 쏟아져 나왔다. 구토와 함께 타액과 눈물이 솟았다. 김민석은 그대로 한참이나 토악질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구역질이 멈췄다. 김민석은 힘이 풀린 다리로 비틀비틀 일어나 세면대 물을 틀었다. 그리고 세수와 양치를 했다. 거울을 보자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가만 발갛게 달아올라 유난히 색정적으로 보였다. 이 와중에도 빛나는 미모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김민석은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두드리며 심호흡을 한 후, 욕실을 나섰다.
핸드폰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김민석은 크게 호흡을 되풀이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확인한 핸드폰에는 새로운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해 있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오백만 원만 입금해라. 아니면 이 아빠도 생각이 있다.
애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협박성 문자였다. 서창섭의 협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졌다. 김민석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시 그 사진을 띄웠다.
미성년자의 나체 사진이다. 전체적으로 성적인 뉘앙스가 풀풀 풍겨 나왔다. 허벅지를 쥔 손을 봐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남자가 분명했다. 이 사진을 보낸 사람이 서창섭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사진을 찍은 남자 역시 서창섭일 터였다.
“서하윤. 너는 대체….”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렸다. 서하윤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 걸까. 어쩌다가 서창섭에게 이런 약점을 잡혔던 걸까. 애인이 미성년 시절에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걸 알면 백이면 백 기겁을 하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서하윤은 아마도 이것 때문에 서창섭에게 고분고분 돈을 갖다 바치고 있었던 것이리라.
“씨발….”
갑자기 악이 받쳐 올랐다. 꿈에서 서하윤을 안아 다독이는 서창섭을 본 후로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그나마 서하윤에게 남은 가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서창섭은 서하윤의 엄마를 능가하는 학대자였고, 수탈자였다. 사진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서창섭은 서하윤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개새끼가.”
하도 열이 올라 머리가 핑 돌았다. 사람이 열받아 뒷골 잡고 쓰러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김민석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창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몇 번 울리지 않아 서창섭이 전화를 받았다.
-하윤이냐?
“이런 니미 개씨발 좆같은 새끼가. 지금 이딴 사진 보내는 저의가 뭐야? 협박하는 거야? 내가 이 사진 들고 경찰서 잡혀가면 너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에 양아들을 성학대하면 씨발,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고!”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 욕지거리를 하고 자빠졌어? 인생 종 치고 싶어? 사진이고 영상이고 확 뿌려 줘?!
“너야말로 인생 종 치고 싶냐? 이 사진 가지고 뭐 어쩌려고. 뿌리려고? 한번 뿌려 봐. 사진이든 영상이든, 네가 네 양아들 학대한 증거 한번 막 뿌려 보라고. 나는 얼굴 가리고 살면 그만이지만, 너는 철창에 갇혀서 무슨 좋은 꼴이라도 볼 것 같아?! 니기미 씨발 개좆같은 새끼야!”
-하! 이게 기억이 날아가더니 겁대가리도 같이 날아갔네. 서하윤. 네가 어릴 때부터 내 좆물 받아먹으면서 산 거 기억 안 나니까 내가 우습지? 네 자지에 털 날 때부터 제 아비한테 뒷구멍 뚫려 가며 살았던 거 알면, 네 애인 놈이 그래도 그 더러운 몸뚱이를 거둬 먹여 살려 줄 것 같아? 그런 더러운 창년이랑 상종하고 싶어 할 인간이 있겠어?
서창섭의 말이 김민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열이 뻗쳐서 욕을 퍼붓기는 했지만, 막상 최상혁이나 하준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저 이 사진 한 장이면 어떻게 얼버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창섭이 들고 있다는 사진과 영상의 수위는 어느 정도일까. 하는 말로 봐서는 서하윤은 어려서부터 서창섭에게 강간당하며 산 것이 틀림없었다. 성인이 돼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한 수년간, 서창섭은 어떤 사진과 영상을 찍었을까.
-잔말 말고 6시까지 천만 원 입금해. 아니면 이 사진을 네 아파트 입구에다 뿌려 줄 테니까. 기억해라. 6시까지다.
뚝-
전화가 끊겼다. 김민석은 숨도 쉬지 못한 채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화가 났다. 살의가 일었다. 당장 부엌에서 칼을 꺼내 달려가 서창섭의 배때기를 쑤셔 버리고 싶었다. 멋대로 지껄이는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두려웠다. 김민석이든 서하윤이든 간에, 지금 자신에게는 최상혁과 하준서밖에 없는데. 그 둘에게 이 더럽고 치욕스러운 과거를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벌벌 떨렸다.
“서하윤…. 너는 이걸 어떻게 견뎠어? 이런 걸 견디고 산 거야?”
김민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서하윤에게 중얼거렸다. 서하윤을 부러워하고 질투한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가 미워질 정도였다.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가락 끄트머리를 물어뜯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 말만이 입 안에 맴돌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가해자에게 돈을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 봐야 끝없이 돈을 요구받게 될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최상혁과 하준서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완전히 망가져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이 설사 그 사실을 알고도 품어 준다 한들, 자신이 어떻게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그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느니 차라리 빈손으로 멀리 떠나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김민석은 문득 지갑을 찾아 들었다. 지갑을 열자 나란히 꽂혀 있는 카드 3개가 보였다. 2개는 각기 최상혁과 하준서의 신용카드였고, 나머지 하나는 서하윤의 체크카드였다.
지금 서하윤의 통장에는 얼마쯤 들어 있을까. 최상혁이 생활비를 준다고 했으니 천만 원 정도는 모여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걸 줘 버리면 어떨까. 그걸 줘 버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김민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애초에 비밀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돈을 빼겠는가. 게다가 이런 식으로 돈을 주기 시작하면 요구하는 빈도와 금액만 점점 늘어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유일한 답이라 해 봐야 서창섭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인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 이제 와서 설득을 한다고 설득되어 줄 리도 없었다.
딩동-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김민석은 벼락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를 흠칫했다. 혹시 서창섭이 찾아온 게 아닌지 두려웠다.
딩동-
다시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확인하니 하준서였다.
지금은 하준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얼굴로 그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딩동-
끈질기게 울리는 벨 소리에 김민석은 결국 현관으로 나갔다.
달칵-
문을 열자 하준서가 늘 그렇듯 밝고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