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역시나 돈 문제였다. 김민석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창섭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지금은 무슨 중독자 같은 행색을 한 채 아들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모양이지만, 어릴 적의 서하윤에게는 매우 잘 대해 주었던 것 같았다. 서하윤은 서창섭에게 나름의 정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돈은… 줄 돈이 없어요. 저 백수예요. 서창…, 아빠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손 떼고 정당하게 일해서 먹고살아요. 저한테 돈 달라는 얘기 하지 마시고요.”
말을 하면서도 사실 마음은 살짝 약해져 있었다. 꿈속에서 서하윤을 부드럽게 달래고 품어 주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너…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기억,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 다 잊어버린 거야? 내가 널 어떻게 키워 줬는데!”
“그랬나요? 그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없는 돈을 만들어서 드릴 수는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김민석은 서창섭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과거야 어쨌든 간에 지금의 서창섭은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너무 역해서,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하윤아. 하윤아!”
서창섭이 다시 붙잡고 늘어졌다. 이래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김민석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그만하시라고요.”
강경하게 말하자 서창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파트 관리인 둘이 이미 밖으로 나와서 간섭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서창섭이 다급하게 말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럼 연락처라도 가르쳐 다오. 이제 세상에 둘밖에 안 남은 가족 간인데 연락처는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응? 그래야 서로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연락이라도 가지.”
김민석은 잠시 망설였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마법처럼 김민석의 몸을 묶었다. 김민석의 마음이 약해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서창섭이 김민석의 주머니에 손을 댔다. 멋대로 핸드폰을 꺼내더니 거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자 서창섭 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이제 가세요. 그리고 돈 달라는 연락 하려면 아예 연락하지 마시고요. 전 줄 돈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그래. 일단 오늘은 이만 가 보마. 내가 연락할 테니까….”
번호를 따는 데 성공한 서창섭이 어쩐지 기쁜 얼굴로 멀어졌다. 그의 초췌하고 초라한 행색이 멀어지는 걸 지켜보던 김민석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맥주를 고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에게 번호를 주면 안 되는 건데, 괜히 귀찮은 짓을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서하윤에게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 아니던가. 학대받던 서하윤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을지도 모를 양아버지다. 연락조차 끊어 절연하는 건 너무 심하다 싶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아파트로 돌아가자 하준서가 아예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석은 맥주 봉지를 하준서에게 내밀고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게….”
입은 떼긴 뗐는데. 정작 서창섭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는 게 나을지, 안 하는 게 나을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그게 뭐요?”
하준서가 재촉했다. 김민석은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그냥 편의점 구경하다 보니 늦었어요.”
“흠. 그런 것 치고는 술만 딱 사 왔네요? 안주도 좀 사 오지.”
“아, 그러네요. 깜빡했어요.”
“괜찮아요. 집에 있는 거로 간단한 안줏거리는 만들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하준서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술상 차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통화 내역에 떠 있는 서창섭의 번호를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김민석은 일단 그 번호를 ‘서창섭’이라고 저장했다.
그사이 하준서는 거실 테이블을 꽉 채워 놨다. 물 꺼낼 때 외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던 부엌에는 뭔가 이것저것 많이 쟁여져 있는 모양이었다. 치즈며 수제 햄, 마른안주, 그리고 과일까지. 제법 푸짐한 안주상이 되었다.
하준서가 맥주 캔을 따서 유리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륵 잔에 채워진 맥주 위로 하얀 거품 모자가 생겼다. 오랜만에 맥주를 보니 입에 군침이 돌았다. 하준서가 자신의 잔까지 채우고 나자 김민석은 얼른 잔을 들어 내밀었다.
“건배해요.”
“그래요. 건배.”
챙-!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김민석은 얼른 맥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거품이 입술이 닿는가 싶더니 곧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넘어갔다.
“캬아-….”
김민석은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감탄했다.
“그렇게 좋아요?”
하준서가 웃으며 물었다. 김민석은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완전 좋아요.”
“아, 귀여워.”
하준서가 한쪽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엄지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김민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입에 안주를 넣어 주는 하준서를 보았다. 변태적인 성 취향만 제외하면 정말이지 완벽한 남자다 싶었다.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완벽한 남자가 임자 있는 사람에게 목매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만약 하준서가 없었다면? 그럼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이 남자의 다정함이 없었다면 아마 서하윤의 몸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흠, 왜 그런 눈으로 봐요?”
하준서가 물었다.
“그런 눈이요? 어떤 눈이요?”
김민석은 찔끔해서 물었다. 너무 티 나게 쳐다봤나 싶었다.
“왠지 좀…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 혹시 나한테 반했어요?”
“아니거든요!”
“에이. 맞는 것 같은데.”
하준서가 눈웃음을 살살 쳤다. 이럴 때면 꼭 백 년 묵은 여우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하윤의 몸에 들어온 후로 하준서 씨가 없었으면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요. 그러니까,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하준서는 물끄러미 김민석을 응시하더니, 빙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너무 착해져서 큰일이라니까. 이렇게 착한 성격으로는 무서운 놈들한테 애먼 짓 당하기 딱 좋아요. 알겠어요?”
“전 하준서 씨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요?”
“하하- 맞아요. 나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 의미로 건배.”
다시 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시원한 맥주가 복잡한 머리와 가슴을 뻥 뚫어 주는 기분이었다. 한 번 마시고 나면 하준서가 안주를 골라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그것을 납죽납죽 받아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싶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빈 캔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너무 많이 사 온 게 아닌가 했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였다.
“잘 마시네요.”
하준서가 빈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김민석은 살짝 어질거리는 시야를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어… 저 조금 취한 것 같기도 하고….”
김민석이 중얼거리자, 하준서가 비틀거리는 몸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취하며 어때요. 바로 옆에 침대 있는데 드러누워 자 버리면 되지. 얼른 마셔요.”
“하긴 그러네요.”
김민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맥주를 꼴깍꼴깍 삼켰다.
“자, 안주도 먹어야죠. 아- 해요.”
“아-….”
벌린 입 속으로 과일 하나가 쏙 들어왔다. 김민석은 그것을 우물우물 씹으며 마치 접대받는 사장님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민석은 치즈 한 조각을 들어 하준서의 입 앞에 내밀었다. 하준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해요.”
김민석이 말하자, 하준서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지금 나 먹여 주려는 거예요?”
“네. 나만 받아먹으니까 미안하잖아요. 어서 아, 해요.”
“아-”
김민석은 벌어진 입 속으로 치즈를 쏙 집어넣었다. 그런데 손가락을 미처 빼기도 전에 하준서의 입이 닫혔다. 보드랍고 촉촉한 혀가 김민석의 손가락을 의미심장하게 핥았다.
“아, 또 변태 짓! 남의 손가락을 왜 핥아요.”
따지고 드는 목소리가 살짝 어눌했다. 역시 취했구나. 김민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변태가 변태 짓 하는데 어쩌겠어요.”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김민석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내가 맥주 더 맛있게 먹는 방법 가르쳐 줄까요?”
“…뭔데요?”
“잘 봐요.”
그렇게 말한 하준서가 자신의 잔을 들어 맥주를 입 안 가득 머금더니, 갑자기 김민석의 뒤통수를 붙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읍…?!”
놀랄 틈도 없이 입술 사이로 맥주가 흘러들었다. 도로 뱉어 낼 수도 없으니, 김민석은 그냥 넘어오는 대로 꿀떡꿀떡 삼켰다.
맥주는 다 삼키고 나자, 맥주 때문에 차가워진 혀가 엉겨들었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려나기는커녕 뒤통수를 더욱 세게 잡아 고정한 채로 음탕하게 혀를 놀려 댔다. 이미 제법 취한 데다, 키스 자체가 기분이 좋아서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열렬히 응하기 시작했다.
츄웁- 츕-
“으음….”
키스하던 두 사람은 소파 위로 털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서로를 얼싸안은 채 키스에 전념했다. 적당한 취기에 기분 좋은 키스까지 더해지자 머리가 멍해졌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생각은 싸그리 사라지고 공중에 붕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김민석은 작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