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50화 (50/125)

50화

둘은 잠시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어제의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분위기가 편안했다. 아마도 하준서 특유의 다정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취향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하준서가 서하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은 우리 뭐 하고 놀까요?”

“하준서 씨는 할 일 없어요?”

“스케줄 없으니까 여기 와서 노닥거리고 있죠.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가면 좋을 텐데….”

하준서가 말끝을 흐리며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이것 때문에 나돌아 다니지도 못하게 됐네요.”

김민석은 하준서의 멍든 얼굴을 보며 얼굴 뼈가 상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상혁에게 맞을 일은 절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긴, 하준서 씨는 인터넷에 이름만 쳐도 얼굴이 쫙 뜨는 유명인이니까요. 그 상태로 돌아다니다가는 이상한 소문 나기 딱 좋겠네요.”

“내 말이요. 다행히 휴식기라 망정이지, 스케줄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곤란할 뻔했다니까요.”

하준서가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고는 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도 우리 집에 놀러 가지 않을래요? 집에서 같이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철이랑 순이랑 놀이도 하고. 어때요?”

철이랑 순이랑 노는 것만은 조금 당겼다. 특히 어제 철이의 접대를 받아 본 후라 더 그랬다. 하지만 어제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준서의 집, 하면 무조건 그 방부터 떠올랐다.

“어제 같은 일은 안 할게요.”

하준서가 다시 꼬드겼다.

“싫어요. 절대 안 가요.”

“에이, 철이랑 순이 보고 싶지 않아요? 철이는 어제 하윤 씨 만난 후로 자꾸 울어요. 하윤 씨 찾는 것 같던데.”

철이가 울면서 찾는다는 말에 마음이 살짝 약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한집에 같이 살던 주인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찾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싫어요.”

“흐음….”

김민석이 딱 잘라 거절하니, 하준서가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요?”

“어제 일이 있었는데 당연히 믿음이 안 가죠. 약까지 먹였잖아요.”

“민석 씨한테는 처음일 테니, 긴장해서 몸에 힘주다 다칠까 봐 약하게 이완제를 탄 것뿐이에요. 어쨌든 허락 없이 먹인 건 사실이니까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준서가 상심한 얼굴로 진심으로 사과하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이상한 흥분제 같은 거 아니었어요?”

김민석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자, 하준서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그런 저급한 약 같은 걸 하윤 씨한테 쓸 리가 없잖아요. 그냥 근육을 릴랙스하게 해 주는 약한 이완제였어요. 설마…. 어제 잔뜩 흥분했던 게 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김민석은 살짝 당황했다. 어제 그렇게 나체로 포박당한 채로 그런 짓을 당하면서도 계속 흥분해 있었던 건 약 기운 탓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흥분제 같은 게 아니었다니. 그럼 진짜로 그 이상한 행위에 잔뜩 흥분했었다는 뜻이 아닌가!

김민석이 침묵하자, 하준서가 그의 눈 밑에 난 눈물점을 의미심장하게 쓰다듬었다.

“우리 하윤 씨 몸이 얼마나 음란한데요.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요. 하윤 씨는 확실히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다고. 어제 플레이로 잔뜩 흥분했던 거, 약 기운 때문이 아니라 하윤 씨 스스로 흥분한 게 맞아요.”

“그런 건 변태 같잖아요.”

“변태 같으면 어때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 둘이서 재밌게 노는 게 조금 변태스럽다고 해서 문제 될 게 있어요?”

“그건 그렇지만….”

“말해 봐요. 내가 사디스트인 게 그렇게 나빠요? 그래서 내가 혐오스럽거나 밉거나 멀리하고 싶거나 그래요?”

“그건 아니에요.”

김민석이 조심스레 대답하자 하준서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됐어요. 다음에는 어제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좀 더 낮은 단계부터 찬찬히 가르쳐 줄게요. 이쪽에 막 처음 발 디딘 바닐라 대하듯이 해야겠네.”

“바닐라요?”

“네, 바닐라. 그런 플레이 해 본 적 없는 일반적인 성 취향을 가진 사람을 바닐라라고 해요.”

“그럼 전 계속 바닐라 할래요.”

김민석의 선언에 하준서가 귀엽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 음탕한 마조히스트 몸으로 어떻게 바닐라로 살아요. 절대 못 할걸요.”

“그걸 어떻게 단언해요. 영혼이 바뀌면 몸도 영혼 따라갈 수도 있는 거지.”

“아니죠. 인간은 육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 영혼이 몸 따라가는 게 맞아요. 어제 일을 생각해 봐요. 그게 어디 바닐라 몸에서 나올 반응이에요? 낯설고 무서워서 그랬지, 사실 좋기는 기막히게 좋았잖아요.”

“그건….”

김민석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비죽였다. 하준서의 말이 사실이었다. 정말이지 잠시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력한 쾌감을 느꼈다. 낯설고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짜릿함과 이상한 희열을 조금쯤은 느꼈던 것도 같다. 아무래도 이 몸 안에서 사는 한은 음란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일단 세이프 워드 먼저 만드는 거예요.”

“세이프 워드요? 그게 뭐예요?”

“같이 플레이하다가 그 상황이 불편하고 싫어지면 말하는 약속된 단어 같은 거예요. 한참 플레이하다가도 무섭거나 아프거나 불편하면 약속된 단어를 말하는 거죠. 그럼 무조건 플레이를 멈추는 게 정해진 규칙이에요.”

“그냥 플레이를 안 하면 되잖아요.”

“에이, 자꾸 그러지 말고. 어떤 거로 할까요? 우리 세이프 워드.”

“서하윤은 어떤 거였는데요?”

“하윤이 세이프 워드는 ‘준서 형’이었어요.”

“준서 형?”

“네.”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석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그럼 평소에는 준서 씨를 뭐라고 불렀는데요? 보통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준서 형이라고 불렀을 법도 한데.”

“그냥 하준서라고 불렀어요.”

“에… 애인 사이라면서 그렇게 차갑게 불렀어요?”

김민석은 조금 놀랐다. 바람까지 피울 정도로 진한 사이였는데 조금 더 다정한 호칭을 쓸 만도 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이 차이도 있는데 ‘하준서’라니. 애인이 아니라 원수 사이 같은 호칭이었다.

“하윤이는 다정다감한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워낙 예민하고 까칠해서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달까….”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네요. 서하윤이라는 사람.”

김민석은 서하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희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희한한 것은 그렇게 단점이 많은데도 두 남자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성격보다는 외모가 갑인 건가….”

김민석이 중얼거리자, 하준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윤이 외모가 갑이긴 하죠. 이런 얼굴에 이런 예쁜 몸이면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것조차 예뻐 보이거든요.”

“부럽네요. 누군 외모를 타고나서 이렇게 사랑받고, 누구는 평범하게 태어나서 모태 솔로로 늙어 가고.”

김민석은 입술을 비죽였다.

“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죠. 서하윤은 도리어 김민석 씨를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하준서의 말에 김민석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하윤이 나를 부러워해요? 대체 왜요? 어떤 점에서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나는 고아에다 가난뱅이에다 모태 솔로에다 외모도 평범하고…. 아무튼 누가 부러워할 만한 점은 하나도 없잖아요.”

“뭐, 나도 하윤이 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뭔가 부러운 점이 있었으니 지금의 민석 씨가 있지 않을까요?”

하준서의 말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부러운 점이 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별소리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하준서는 거기까지 말하고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다 먹은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하준서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김민석은 조금 전 들었던 말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김민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다 문자 창을 열어 문자를 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그 핸드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하윤 씨인가요?

김민석을 완성한 문장을 눈으로 한번 훑고 발송 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떨렸다. 서하윤이 답장을 보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누구한테 문자 보낸 거예요?”

어느새 다가온 하준서가 물었다.

“아…. 제 원래 핸드폰으로요. 혹시 몰라서 매일 한 번씩 문자 하고 있거든요.”

“한번 봐도 돼요?”

하준서가 물었다. 김민석은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건네었다.

문자를 훑는 하준서의 눈빛이 진지했다. 몇 개 되지 않는 문자를 모두 읽은 하준서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예요? 김민석 몸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 사는 거 괜찮다면서요. 이대로 살라니까요.”

“저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어쩐지 서하윤을 찾기는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흐음….”

그런 김민석을 묘한 눈으로 훑던 하준서가 표정을 지웠다. 그러다 본래 표정을 되찾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요. 하윤 씨 좋을 대로 해요. 난 일이 어찌 되든 간에 하윤 씨 편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하준서는 진심인 것 같았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우리 키스 한번 할까요?”

“그건 아니고요.”

“너무하네.”

하준서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제 일이 아직 기억에 생생한지라 김민석은 단호하게 거부를 외쳤다. 다행히 하준서도 진짜 키스를 바랐던 건 아닌 듯 금세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그럼 우리 영화나 봐요.”

“좋아요.”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준서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TV를 켜서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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