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잠을 얼마나 퍼질러 잔 건지, 일어나고 나고 나니 최상혁은 또 없었다. 정말이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김민석은 이불 위를 이리저리 뒹굴며 입술을 매만졌다. 어젯밤 한참이나 키스했던 입술은 아직도 퉁퉁 부은 채 불이 난 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은 따끔거리는데 아프기는커녕 괜히 웃음이 났다. 김민석은 어젯밤의 열렬한 키스를 떠올리며 이불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비식비식 웃음이 나고 마음이 간질거렸다.
한참이나 그렇게 이불 위를 이리저리 뒹굴던 김민석은 문득 핸드폰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맨몸으로 이불에 싸인 채 달랑 들려 오지 않았던가. 핸드폰은 아마도 하준서의 집에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자신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려던 김민석은 다시 이불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러면, 그래. 이대로 있어. 되돌아갈 생각도, 사라질 생각도 하지 말고 이대로 살아.”
어제 최상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더 이상 김민석의 핸드폰에 연락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서하윤으로 살면 되었다. 하준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이다.
서하윤의 인생을 산다. 서하윤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슬그머니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서하윤을 잘 알고 좋아하는 두 사람이 그래도 된다고 했으니 역시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게 아닐까. 그들 말대로 서하윤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마치 확신하듯 말했으니 아마 그럴 터였다.
서하윤이 자기 몸을 찾고 싶지 않다면 이건 자신이 가져도 무방한 몸이다. 그러니 김민석의 몸이나 인생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 인생을 한번 열심히 살아 봐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김민석은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솟구치는 욕심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할수록 그렇게 하고 싶었다. 욕심이 점점 커졌다.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아마도 하준서일 것이다. 김민석은 이불을 머리 위로 휙 뒤집어쓰며 못 들은 체했다. 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끈질겼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아… 정말….”
끊임없이 이어지는 벨 소리에 김민석은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꺼내 입는 와중에도 벨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옷을 입은 김민석은 현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문을 열었다.
“벨은 한두 번만 누르면 안 돼요? 이거 완전히 소음 공해잖아요.”
김민석은 문을 열기 무섭게 투덜거렸다.
“잠들어 있어서 못 들을까 봐 그랬죠.”
하준서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오며 말했다.
“헉….”
김민석은 하준서를 보는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하준서의 얼굴 반쪽이 완전히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그런 멍이 들어 있으니 보는 사람까지 아픈 기분이었다.
“…들어와요.”
재빨리 놀란 기색을 수습한 김민석은 퉁명스레 말하며 거실 소파로 걸어갔다.
“자요, 옷이랑 핸드폰.”
뒤따라온 하준서가 가지런히 개킨 옷과 핸드폰을 내밀었다. 김민석은 말없이 받아 들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배고프죠? 샌드위치 사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하준서가 반대쪽 손에 든 봉투를 흔들었다. 그는 자연스레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꺼내 식탁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핸드폰 화면을 켜서 물끄러미 보았다. 통화 목록에서 김민석의 핸드폰 번호를 띄웠다.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를 애매하게 오갔다. 하지만 결국 누르지는 않았다.
“이리 와서 먹어요.”
하준서가 불렀다. 김민석은 하준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멋대로 이상한 짓을 한 그에게 화가 나기는 했지만, 또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차마 싸늘하게 대하기도 뭐했다. 자신이 너무 마음이 약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준서는 서하윤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자신이 그에게 싸늘하게 구는 건 너무 각박한 짓인 것 같았다.
“아야야야야….”
식탁 의자를 빼서 앉으려던 하준서가 배를 움켜쥐며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괜찮아요?”
저도 모르게 묻자, 하준서가 셔츠를 올려 배를 까 보였다.
“헉…!”
김민석은 하얀 배에 커다랗게 박혀 있는 시커먼 멍을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어마어마하게 아파 보이는 건 둘째 치고, 내장이 박살나지 않았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병원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김민석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을 거예요. 내장이 터졌으면 아마 피똥이라도 쌌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새끼 은근히 약아 빠져서 사고 날 정도로는 안 패요. 얼마나 계산적인 새낀데요.”
하준서의 말은 괜찮아요, 로 시작해서 최상혁의 욕으로 끝이 났다. 상당히 유감이 실린 목소리였다.
“아무튼… 혹시 모르니 무슨 문제 있다 싶으면 곧바로 병원에 가요.”
김민석은 최상혁의 욕을 못 들은 체하며 말했다.
“그러는 하윤 씨는 괜찮아요?”
“네?”
“어제 소변을 못 봤다면서요.”
“아…. 결국 보기는 봤어요.”
“다행이네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어제는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가벼운 플레이라 워밍업 시키는 기분으로 한 건데…. 그렇게까지 겁을 먹었을 줄은 몰랐어요.”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마세요.”
하준서가 진지하게 사과를 하고 나오자, 웃기게도 겨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김민석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하준서가 기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알았어요. 할 때는 꼭 허락받고 할게요.”
“허락 안 할 거거든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고….”
하준서가 능글능글하게 말했다. 이미 다음 플레이를 기대하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하준서 씨!”
김민석이 나름 엄격하게 부르자, 하준서가 갑자기 배를 붙잡았다.
“아야야, 아무래도 내장이 상했나 봐요.”
일부러 아픈 척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김민석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러지 마요.”
“알았어요. 해야 할 때는 꼭 허락받고 할게요.”
뚝심 있는 말이었다. 그는 김민석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접시를 앞으로 밀어 주었다.
“얼른 먹어요. 배고프겠다.”
“…네.”
샌드위치는 매우 맛있었다. 어제 제대로 먹은 게 없기에 더욱 그랬다. 제법 큰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씩 베어 물어 우걱우걱 씹어 먹는데 너무 맛있어서 행복할 정도였다. 그가 먹는 모습을 식탁에 턱을 괸 채 감상하던 하준서가 문득 물었다.
“어제 최상혁이랑 뜨거웠나 봐요?”
“큽, 쿨럭…. 네?”
김민석은 씹던 샌드위치를 겨우 삼키고 되물었다. 하준서가 눈웃음을 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입술, 하도 부어서 살짝만 찔러도 터질 것 같아요. 키스를 얼마나 해 댔으면 그렇게 부은 거예요.”
“…몰라도 돼요.”
김민석은 애써 침착하게, 그리고 약간은 불퉁하게 말했다. 하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못해도 한두 시간은 물고 빨고 해야 그 정도로 부을 텐데…. 그런 것 치고는 걸음걸이가 반듯한 게 섹스를 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럼 그 최상혁이 섹스는 안 하고 입술만 몇 시간이나 물고 빨았단 말이 된단 말이죠. 아…. 이러면 나 너무 질투 나는데. 어쩌죠?”
“…샌드위치나 드세요.”
김민석은 무심한 척 말했다. 하지만 하준서에게 어제의 길고 열렬했던 키스를 들킨 것 같아 얼굴에 열이 살짝 올랐다.
“흠…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런 거.”
“부끄러워하는 거 맞네. 고작 키스 좀 한 거 들켰다고 부끄러워하기예요? 나 진짜 질투 나서 심술부릴 수도 있어요.”
하준서의 심술이라는 것을 이미 겪어 본 김민석은 그 말에 소름이 와다다 돋았다.
“부리지 마요, 심술.”
김민석이 얼른 말하자, 하준서가 귀엽다는 듯 옅게 웃었다.
“어제 그렇게 놀랐어요? 심술 소리만 들어도 기겁할 정도로?”
“당연하죠. 난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고요. 약 먹여서 강제로 묶고 거기를 막… 그러는데, 하준서 씨 같으면 안 놀라겠어요?”
“하윤이는 무서우면서도 안 무서운 척 노려보며 버텼는데, 민석 씨는 많이 다르네요.”
“서하윤이 아닌데 당연히 다르죠.”
“그러게요…. 이건 좀 슬프네.”
하준서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사랑하는 서하윤의 육체를 빼앗아 가지고 있다는 죄의식이 있던 김민석은, 하준서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다시 죄책감을 느꼈다.
“하준서 씨, 나는….”
김민석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떼자, 하준서가 갑자기 소리 내 웃었다.
“약한 소리 좀 했다고 금방 미안해하는 것 좀 봐.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아… 씨. 사람 놀라게 좀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곤란한 내 상황 뻔히 알면서.”
김민석은 원망하는 눈으로 하준서를 째려보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놀릴게요.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그런 눈으로 째려보면 내가 너무 흥분되잖아요.”
하준서가 손을 뻗어 김민석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또 놀리는 거 봐.”
김민석은 주스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하준서가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