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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48화 (48/125)

48화

최상혁의 반응은 의외로 평이했다. 그는 놀라거나 신기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전에 최상혁 씨가 했던 말이 맞더라고요. 버려진 고양이처럼 울고 있는 서하윤을 보고 꼴렸다면서요. 그 말이 곧이곧대로 사실일 줄은 몰랐네요.”

“거짓말은 안 해.”

최상혁이 잘라 말했다. 김민석은 작게 웃었다. 어쩐지 이 남자가 귀엽게 느껴졌다.

“월 천만 원이나 주면서 집안일이나 시키고, 몇 달이나 데리고 있으면서도 손끝 하나 안 대고, 집 사 달라니까 오케이하고, 생활비 달라니까 오케이하고,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니까 오케이하고. 거기다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담배까지 끊고. 제3자가 보기에는 찐사랑인데요, 그거. 완전 한눈에 뿅 가서 사랑에 빠진 거 아니에요?”

장난스레 말한 김민석은 곧 자신이 지나치게 진지한 주제를 꺼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둘러 덧붙였다.

“아니, 최상혁 씨야 워낙 부자니까 뭐… 취향인 사람 보고 그럴 수도 있는 거겠죠.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스케일이 크지만.”

그렇게 말한 김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상혁이 서하윤을 사랑한다고 인정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자신은 최상혁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차지한 채 그가 누려야 할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도둑놈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심지어 자신은 서하윤의 몸에서 이대로 살고 싶다고 욕심을 부리고 있는 처지였다.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알고 싶었다. 최상혁은 서하윤을 사랑하는 걸까?

최상혁이 서하윤을 사랑한다고 대답하면 서운하고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또한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단 말인가.

“너는 어때?”

최상혁이 되물었다.

“네? 뭐가요?”

“네가 보기에는 내가 서하윤을 사랑하는 것 같아?”

최상혁의 직설적인 물음에 김민석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들켜 버린 걸까 두려워졌다. 이 이기적이고 도둑놈 같은 마음을 말이다.

“나는… 모르겠어요.”

김민석은 중얼거리듯 대답하며 최상혁의 품 깊숙이 파고들었다. 닿아 있는 살갗의 감촉이, 그리고 살며시 풍기는 살 냄새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슬펐다. 내 것이 아닌데, 그저 잠시 누리고 있는 것뿐임을 아는데도 너무 욕심이 났다. 서하윤이 괜히 미워졌다.

“최상혁 씨.”

“말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서하윤이 이 몸에 돌아오고 김민석이 사라지면요…. 그때 가서도 내가 조금은 생각날 것 같아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아….”

김민석은 크게 실망했다. 이렇게 딱 잘라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을 거라고 할 줄은 몰랐다. 어쩐지 눈이 뜨거워졌다. 남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에 자신을 기억해 달라니. 과한 요구였던 모양이다. 김민석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눈물을 참았다. 우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김민석의 자존심이었다.

“사라져 버릴 일 없을 테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네?”

최상혁의 말에 김민석은 놀라서 어깨에 깊이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치들었다. 최상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살짝 붉게 변한 김민석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담담히 말했다.

“김민석인지 뭔지, 네가 그 몸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김민석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하윤이 그러길 바라는 모양이니까.”

“서하윤이요? 뭘 바라요?”

“지금 이 상태.”

“이 상태?”

“그래. 이 상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김민석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최상혁은 딱히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하준서 씨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요. 서하윤이 지금 행복하다고요. 예전보다 훨씬 더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그래서 서하윤이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니까 이대로도 자기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 새끼가?”

최상혁은 하준서 이름이 나온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김민석은 그런 최상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두 사람…. 서하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예요?”

“…….”

최상혁은 그답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대답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뭐예요. 왜 대답을 안 해 줘요. 말을 해 봐요. 서하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최상혁 씨!”

김민석은 최상혁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최상혁이 손가락으로 김민석의 눈 밑 눈물점을 어루만졌다. 생각에 빠진 눈이었다. 그렇게 잠시 눈물점을 만지던 최상혁이 느릿하게 입을 뗐다.

“서하윤은 내가 절대 못 찾을 곳에 숨어 버렸어. 서하윤 스스로가 나타나지 않는 한, 영원히 못 찾겠지.”

“최상혁 씨가 못 찾을 곳이요?”

“그래.”

“그치만… 최상혁 씨가 못 찾을 곳이 있어요?”

“보통이라면 없지. 그러니 서하윤이 영악하다는 거야. 이런 나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을 찾아 잘도 숨어 버렸으니.”

“…잘 이해를 못 하겠어요.”

“너는 이해할 필요 없어. 거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최상혁이 김민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한걸요. 서하윤이 돌아오면 이 몸을 되돌려 줘야 하니까…. 내 인생도 달린 문제라고요.”

김민석이 강경하게 나가자 최상혁이 그에게 빤한 시선을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눈이었다.

“넌 지금이 싫어?”

최상혁이 물었다.

“그건….”

“요 며칠간이 영 싫었어? 빨리 김민석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는 거야. 쓸데없는 말 붙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그렇게 묻는 최상혁의 눈이 진지했다. 그와 시선이 얽힌 채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김민석은 잠시 숨을 색색 몰아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싫지 않았어요. 오히려… 좋았어요.”

겨우 더듬더듬 말한 김민석은 다시금 뜨거워지는 눈가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런 걸 가져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고아고, 제대로 된 친구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누구한테 사랑이나 애정을 받아 본 적도 없어요. 만약에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죽는대도 장례식 치러 줄 사람도 없어요. 슬퍼해 줄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서하윤은 다르잖아요. 서하윤은 집도 있고 가족도 있고 돈도 있고 그리고… 최상혁 씨도 있고…. 내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거, 서하윤은 전부 다 가졌잖아요. 어떻게 지금이 싫을 수가 있겠어요.”

결국, 눈물이 솟아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울보가 돼 버린 기분이었다. 최상혁이 엄지로 눈가를 부드럽게 훑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그래서 욕심이 나요. 내 것도 아닌데… 이건 전부 서하윤 건데… 이 몸조차 내 것이 아닌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괜히 욕심이 나요. 내 몸으로 돌아가는 쪽이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요. 그리고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미워요.”

“…….”

최상혁은 뭐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닫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김민석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지금이 행복하다는 거야?”

“……. 네.”

김민석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그래. 이대로 있어. 되돌아갈 생각도, 사라질 생각도 하지 말고 이대로 살아.”

“하지만 그러면 서하윤은….”

“그 새끼 말이 맞아.”

“네?”

“하준서 말이 맞다고. 서하윤은 지금이 훨씬 행복한 모양이니까, 넌 지금 그대로 살면 돼.”

김민석은 최상혁과 하준서가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김민석은 서하윤의 행방에 대해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캐묻고 싶지 않았다.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라도 찾아가게 될 테니까. 그에게 몸을 돌려줘야만 할 테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하기로 했다.

“내가 이대로 서하윤으로 사는 거…. 최상혁 씨도 괜찮아요? 최상혁 씨 서하윤 사랑하잖아요. 적어도 좋아는 하잖아요. 그런데도 괜찮은 거예요?”

“그러니까 괜찮은 거야.”

최상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김민석은 그 대답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여 주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 점이 중요했다.

“고마워요. 최상혁 씨.”

“고마우면 자꾸 울지 마. 꼴리니까. 고맙다는 말도 자꾸 하지 마. 꼴려.”

최상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김민석은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우는 사람 보고 꼴리고 고맙다는 말에 꼴린다니, 최상혁 씨도 조금은 변태 기질이 있는 거 아니에요?”

“까불지.”

최상혁이 말하며 김민석의 뒤통수를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야성적인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목을 휘감으며 그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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