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47화 (47/125)

47화

장면이 바뀌었다.

서하윤은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설거지래 봐야 접시 몇 개가 전부였다. 금방 설거지를 끝낸 서하윤은 터벅터벅 걸어 거실로 갔다. 거기에는 최상혁이 다리를 꼬고 앉아 진지한 눈으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힐끗 서하윤을 쳐다보더니 다시 태블릿으로 돌아갔다. 서하윤이 옆자리에 털썩 앉는데도 최상혁은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야, 최상혁.’

서하윤이 다짜고짜 불렀다. 아무래도 부르는 폼을 보아하니 항상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말해.’

최상혁이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서하윤은 갑자기 최상혁 손에서 태블릿을 획 빼앗아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내 이름 불러 봐.’

‘뭐?’

‘내 이름 불러 보라고.’

‘뭐 하자는 거야, 서하윤.’

최상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하윤이 콧방귀를 뀌었다.

‘알기는 아네. 나는 벌써 몇 달째 이름 한 번 안 부르고 쳐다도 안 보길래, 내 존재를 까맣게 잊은 줄 알았지.’

‘까불지 말고 그거나 이리 내.’

‘싫은데?’

서하윤은 태블릿을 든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최상혁을 약 올렸다. 최상혁이 눈매를 살짝 찌푸리더니 손을 서하윤의 등 뒤로 넣었다. 그 순간, 서하윤이 최상혁의 목을 감싸 안으며 입술을 맞댔다.

‘뭐 하는 짓이야?’

‘뭐긴 뭐야. 키스지. 싫어?’

‘서하윤. 까불지 마.’

최상혁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말했다. 오금이 저릴 정도의 눈빛이었는데 서하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당신 나한테 꼴린다며. 근데 왜 쳐다도 안 보는데?’

‘쳐다봐 줬으면 했나 보지?’

‘나 정도 되는 인물을 집에 들어앉혀 놨으면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보는 게 당연한 거란 얘기지.’

서하윤은 참으로 당돌했다.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집, 사 줄 수 있어?’

그가 최상혁에게 대뜸 물었다.

‘뭐?’

최상혁이 눈매를 찌푸렸다.

‘좋은 집 말이야. 새집에다가 크고 한강 보이는 그런 거.’

‘서하윤.’

‘용돈 말고, 생활비도 줄 수 있어? 많이.’

‘까불지 말라 그랬지.’

‘그렇게 해 주면 당신이랑 자 줄게.’

최상혁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크게 담배를 빨아들이는 최상혁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심란해 보였다. 서하윤은 최상혁이 딱 한 번 빨아들인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비벼 꺼 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마. 냄새 질색이니까.’

‘몇 달간 얌전히 잘 지내다가 갑자기 왜 이래?’

‘몇 달간 당신 지켜봤으니까 그러는 거야. 난 어차피 평생 남자든 여자든 파리처럼 꼬일 팔자야. 더럽게 못생긴 변태 새끼들한테 시달리며 사느니 차라리 당신을 선택해 주겠다고.’

서하윤이 마치 대단한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기가 찰 정도였다.

‘어차피 당신도 월 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액수 줘 가며 집에 들어앉혀 둘 정도로 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었어? 당신, 나한테 꼴린다며. 나 좋아하잖아.’

최상혁이 말없이 서하윤을 빤히 응시했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눈이었다. 서하윤이 최상혁의 반응을 기다리며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할 건지 말 건지 빨리 대답해. 싫다면 나도 다른 사람 찾으러 여기 뜰 거니까.’

서하윤이 대답을 재촉했다.

‘서하윤. 너한테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신이 아는 거지. 최상혁 당신은 어떤데. 당신한테 난 그 정도 가치가 있어?’

최상혁의 눈이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최상혁이 서하윤의 허리를 휘감아 바짝 잡아당겼다. 당장 키스를 할 것처럼 입술이 가까워졌다. 그 상태로 서하윤이 속삭였다.

‘말해 봐. 최상혁. 나한테 그 정도 가치가 있어?’

최상혁은 말없이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서하윤은 양손을 뻗어 최상혁의 목을 휘감은 채 그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풀썩-!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한 채 소파 위에 쓰러졌다. 한참이나 뜨겁고 열정적인 키스를 하던 중, 서하윤이 문득 속삭였다.

‘그리고 나 구속하려고 하지 마. 난 당신이랑 섹스하는 거지 당신 노예가 되는 게 아니니까.’

최상혁이 대답 없이 다시 서하윤의 입술을 삼켰다. 마치 잡아먹히는 것 같은 키스였다. 그에게서 항상 풍기는 향수 냄새가 났다.

눈을 떴을 때는 컴컴한 밤이었다. 김민석은 어둠이 드리운 벽을 멍하니 보다가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곳에서는 최상혁이 아직도 태블릿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민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상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버려진 고양이 꼴을 하고 술집 골목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 생긴 건 하얗고 반반한 주제에 입으로는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주절거리며 울고 있는데 그 꼬락서니가 참…. 꼴렸어.’

그가 전에 서하윤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하윤의 기억 속에서도 둘은 그렇게 만났다.

“담배….”

김민석이 깬 것을 알면서도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던 최상혁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눈길을 보냈다. 김민석은 그와 시선을 마주친 채, 잠에서 막 깨어난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담배 피워요?”

“안 피워.”

“전에는 피웠던 거 아니에요?”

“끊었어.”

“아하.”

김민석은 자신이 방금 꾼 꿈이 서하윤의 기억이라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왜 끊었어요? 담배 끊는 거 쉽지 않을 텐데.”

“누구누구 씨가 냄새난다고 하도 지랄을 해대서 말이야.”

최상혁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서하윤을 위해 담배도 끊었다는 말이 참 달콤하게 들렸다. 다시 가슴이 울렁였다. 김민석은 울렁이는 가슴에 손을 올려 슥슥 쓰다듬었다. 기분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묘했다.

그러고 보니 침실에서 아주 은은하게 최상혁의 향수 냄새가 났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손목을 잡아당겨 코앞에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역시나, 여기가 냄새의 원천이었다. 살 냄새와 더불어 나는 향수 냄새가 너무 기분 좋았다. 김민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최상혁의 손목에 코를 박은 채 냄새를 흠뻑 들이켰다.

“뭐 하는 거야?”

최상혁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요.”

김민석은 다소 뻔뻔하게 대답했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는 최상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까불지. 서하윤.”

최상혁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가 곧바로 키스해 주지 않으니 괜히 심술이 나고 서운해졌다.

“하기 싫어요?”

김민석은 어리광 부리듯 물었다. 이제껏 살아오며 누구에게도 어리광 부릴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최상혁에게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참 낯설었다.

“한숨 자고 나니까 또 정력이 펄펄 끓나 보지?”

“그런 거 아니에요. 섹스 같은 거 말고…. 그냥 갑자기 키스가 하고 싶어요. 안 돼요?”

이 사람은 진짜 내 남자도 아닌데. 서하윤의 남자인데. 그래도 이 사람과 당장 키스하고 싶었다.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후우-”

최상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며 태블릿을 협탁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김민석을 불쑥 끌어당기더니 단번에 입술을 맞대었다. 평소와 달리 살짝 차가운 입술은 몹시도 부드럽고 감촉이 좋았다. 김민석은 최상혁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혀로 그의 입술을 핥으며 가르고 들어갔다.

“으음….”

최상혁의 입술은 기대만큼이나 달콤했다. 입술과 혀로 느껴지는 달콤함이 가슴과 몸을 푹 적셨다. 마치 꿀에 절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츄웁- 츕-

아까의 일 때문인지 최상혁은 평소와 달리 몹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키스를 이어 나갔다. 그에게 배려받는 기분이었다. 가슴의 울렁거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으음… 음….”

자연스레 달콤한 비음이 새어 나갔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허리를 끌어안은 단단한 팔뚝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고,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은 다정다감했다. 김민석은 양팔로 최상혁의 목을 휘감은 다음,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휘감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의외로 무척 부드러웠다. 그 별것 아닌 사실에도 괜스레 마음이 보송보송해졌다.

츄웁-

젖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김민석은 그대로 최상혁에게 안긴 채,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최상혁은 자신에게 기대 누운 김민석의 머리칼을 희롱했다. 김민석은 시야를 가득 채운 최상혁의 근육질 가슴의 감촉을 만끽했다.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는 시간이 이렇게 평화롭고 평온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꿈을 꿨어요.”

“무슨 꿈?”

“서하윤 꿈이요. 아마도 서하윤 기억 같았어요. 꿈속에서 서하윤이 최상혁 씨랑 처음 만나는 장면을 봤어요.”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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