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란히 씻고 욕실을 나선 둘은, 또 나란히 서서 몸을 닦고 로션을 바른 다음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말리는 것도 최상혁이 해 주어서, 김민석은 마치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서 가서 누워.”
머리를 다 말려 준 최상혁이 침대를 턱짓했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머리를 말려 준다고 하고 싶었으나, 키 차이가 워낙 나서 그것은 힘들어 보였다. 때문에 순순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맞고, 싸고,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절정에 오르고, 놀라고, 울고, 씻고…. 여러 가지를 해서 그런지 침대의 포근한 감촉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몸을 뒤척거리며 편한 자세를 잡고 있으려니, 어느새 머리를 말린 최상혁이 옆자리로 올라왔다.
“일하러 안 나가요?”
김민석은 자신의 옆에 누운 최상혁을 슬그머니 쳐다보며 물었다. 그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후였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최상혁의 패턴에 맞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
최상혁이 나지막이 말하며 침대 옆 협탁에서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그것을 두드리고 문지르며 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민석 때문에 집을 떠나지는 못하고 대신 재택근무를 택한 모양이었다.
최상혁은 금세 일에 집중했다.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눈이 자못 진지했다. 그 모습이 괜히 멋있었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고마워요, 최상혁 씨.”
김민석은 뜬금없이 인사를 건네었다. 최상혁이 눈을 돌려 김민석을 쳐다보았다.
“이젠 고맙다는 말을 막 하는군.”
“네?”
“오늘만 해도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아…. 그래도, 고마우니까요. …물론 오늘은 섹스 안 할 거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해 달라고 졸라도 안 해 줄 거니까 착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
최상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김민석은 어쩐지 입이 불퉁해졌다. 획 옆으로 돌아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뒤에서 잠시 시선이 느껴지더니 곧 사라졌다. 태블릿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등 뒤에 최상혁이 있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든든해졌다. 김민석은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겨 주는 누군가의 존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건 이렇게나 따뜻한 일이었구나. 김민석은 그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며 노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술집이었다. 젊은이와 중년이 적절히 섞여 있는 호프 같은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자신이 술집 테이블 사이를 부지런히 거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이, 알바생.’
스쳐 지난 테이블에서 누군가 불렀다. 시야가 뒤로 휙 돌아갔다. 까딱까딱 손짓하는 테이블 손님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테이블로 걸어가는 듯 거리가 가까워졌다.
‘뭐 필요하세요?’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하윤의 목소리였다. 김민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은 서하윤의 기억이었다.
‘응. 필요해. 이리 와서 술 한 잔 따라 봐.’
얼큰하게 취한 남자가 손을 뻗어 다짜고짜 서하윤의 몸을 잡아당겼다. 취한 놈이 힘이 얼마나 센지 몸이 휙 딸려가 남자 옆에 앉게 됐다. 그가 한 손으로는 술잔을 내밀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서하윤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며 키들거렸다.
‘사내새끼 주제에 생겨 먹은 건 완전히 텐프로 에이스 저리 가라네. 너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이, 새끼야. 그러다 게이가 되는 거야. 조심해라, 새끼야.’
남자의 말에 똑같이 얼큰하게 취한 그의 동행이 야유했다.
‘야, 그래도 이 얼굴이면 할 만하지 않냐? 어이, 알바생. 너랑 한 번 하는데 얼마 주면 되는데?’
‘놓으세요.’
‘빼지 말고. 생겨 먹은 것 보니까 누구한테 따먹혀도 벌써 따먹혔을 것 같은데. 이십만 원 어때? 아니면 한 번 빨아 주는 데 십만 원 줄게.’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이 점점 교묘해졌다. 서하윤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남자를 팍 밀쳐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딜 주무르는 거야, 이 변태 새끼가. 더러운 새끼야. 꼴리면 자위나 해. 생긴 것도 더럽게 생겨 먹은 게. 그런 오징어 같은 상판대기로 감히 누굴 넘봐?!’
남자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제법 앙칼졌다.
‘뭐? 이 새끼가, 알바생 주제에…! 여기 주인 어디 있어! 주인 나오라 그래!’
남자가 술잔을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외쳤다. 바닥에 떨어진 술잔이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서하윤과 남자를 향해 쏠렸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주방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고, 손님. 왜 그러십니까?’
주인이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알아? 변태 새끼에 더러운 새끼라고 욕이란 욕은 다 했다고! 이런 데서 술을 어떻게 마시라는 거야! 씨발. 나는 그딴 소리 들어가면서 술값 못 내! 알았어?!’
‘아니, 손님. 하윤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아마 피곤해서 잠시 짜증을 부린 모양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 내 친구도 다 들었는데. 내가 귓구멍이 막힌 줄 알아?! 씨발, 그럼 경찰 불러, 경찰! 이거 모욕죄야!’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가며 주정을 부리자, 다른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서하윤의 팔뚝을 잡아끌어 남자 앞에 세웠다.
‘얼른 죄송하다고 사과드려.’
‘사장님. 저 새끼가 제 엉덩이 만지면서 성추행하고 자 주면 돈 준다고 지껄였다고요.’
‘취한 사람 한두 번 겪어 봐? 그냥 눈 딱 감고 사과해. 이러면 장사가 안 되잖아.’
사장이 초조한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싫어요. 못 해요.’
서하윤이 잡힌 팔뚝을 털어 내며 잘라 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사장이 서하윤의 뺨을 철썩 때렸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겁니다, 손님. 술값은 안 받을 테니까 얼른 집에 가서 쉬십시오.’
주인이 정중히 말했다. 서하윤이 뺨을 후려 맞는 걸 본 손님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욕설을 지껄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씨발, 지금 나를 때렸어요?’
‘야, 술 취한 손님 한두 번 겪어 봐? 적당히 구워삶아서 넘어가면 그만이지 왜 이 사달을 만들어. 너 때문에 오늘 장사 조진 거 안 보여? 네가 물어낼 거야?’
‘좆같은 소리 하네. 일해 달라고 해도 내가 안 해.’
앙칼지게 쏘아붙인 서하윤이 손을 휘둘러 사장의 뺨을 철썩 갈겼다. 그리고 앞치마를 벗어 사장 얼굴에 집어 던진 후 몸을 돌려 가게를 뛰쳐나갔다.
빠르게 달리는 서하윤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온갖 네온사인이 이리저리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서하윤이 숨이 찬 듯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을 스쳐 지나는 인파 사이에 멍하니 서 있다가 어느 순간 근처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니미, 씨발. 더러운 세상. 좆같은 새끼들. 개같은 새끼들. 인생 좆창 났다 생각하고 그냥 칼로 다 쑤셔 버리는 건데. 염병할 새끼들.’
온갖 욕설을 쏟아 내는 서하윤의 시야가 눈물로 출렁거렸다. 서하윤은 차가운 골목 벽에 기대앉은 채 눈물을 쏟으며 세상을 저주했다.
그렇게 얼마나 욕설이란 욕설을 다 내뱉고 있었을까.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까만 구두가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담배를 문 채 서 있었다. 눈물로 흥건한 시야 때문에 선명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김민석은 그 남자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최상혁이었다.
‘뭐야, 씨발. 사람 처우는 거 처음 봐?’
‘같이 갈래?’
남자, 최상혁이 뜬금없이 물었다.
‘뭐래. 너도 나한테 꼴리냐? 변태 새끼야?’
‘그래. 꼴리는군.’
‘씨발. 오늘 운수 좆같네.’
욕설을 지껄인 서하윤이 팔뚝으로 눈가를 슥 문지른 후, 한층 밝아진 눈으로 최상혁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의 검은 정장이나 검은색 코트, 손목에 살짝 보이는 시계와 반짝거리는 검은 구두까지. 얼핏만 보아도 그는 몹시 부유해 보였다. 심지어 그의 뒤에는 조금 떨어진 채 서서 대기하는 덩치 큰 남자 몇이 있었다.
‘당신 부자야?’
‘그래.’
‘같이 가면, 어떻게 되는데?’
‘일자리를 주지.’
‘일자리는 나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월 천.’
‘…천…만 원?’
‘그래.’
‘무슨 일인데. 난 호스트 같은 건 안 해. 더럽게 생겨 먹은 것들이랑 붙어먹는 상상만 해도 토 나와.’
‘내 집에 도우미가 마침 그만둬서. 집안일 해 줄 사람이 필요해.’
‘…진짜 집안일만 시키는 거 맞아? 그 핑계로 나 건들려는 거 아니야?’
‘강제로 하는 취미는 없어.’
‘진짜로 그런 거라면… 좋아.’
최상혁이 손을 뻗었다. 서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