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이 애가 철이죠?”
김민석은 처져 있던 마음을 걷어 내며 조금 밝아진 톤으로 말했다.
“기억이 나요?”
하준서가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사진 속의 고양이가 젖소 무늬랑 삼색이었잖아요. 삼색 고양이는 원래 다 여자 고양이래요. 그러니까 젖소 고양이가 남자인 철이, 삼색 고양이가 여자인 순이겠죠.”
“잘 아네요.”
“원래 고양이를 좀 좋아해서요.”
하준서와 대화하느라 잠시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었다.
애오옹-
그러자 철이가 마치 항의하듯 길게 울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는 얼굴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아우, 너무 귀엽다.”
김민석은 치솟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양손으로 고양이 머리통을 잡은 채 볼때기에 뽀뽀를 쪽쪽 했다. 보통 고양이라면 기겁할 만도 하건만, 철이는 워낙 익숙한지 그냥 뽀뽀를 잘도 받아들였다.
“순이는 안 나오네요?”
“순이는 원래 야생성이 좀 강해서요. 새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예요. 기다리다 보면 나올 테니까 우리 할 일이나 하고 있죠.”
“네.”
그 후로도 철이는 한참이나 김민석 품에서 비비적거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김민석은 그게 너무 좋아서 광대가 승천할 지경이었다. 하준서는 옆에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요사를 부린 끝에 철이가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미련 없이 방 안으로 슬렁슬렁 걸어 들어갔다. 고양이의 애교에 푹 젖어 버린 김민석은 그 여운을 만끽하며 소파에 깊이 기대앉았다. 기분이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어때요? 놀러 오길 잘했죠?”
“네. 연주 듣는 것도 너무 좋았고 고양이도 봐서 너무 좋아요.”
김민석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준서가 손을 뻗어 김민석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성적인 뉘앙스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순이는 꼭 하윤 씨랑 닮았어요.”
“순이가요? 어디 가요?”
“경계심 많고 앙칼지고 제멋대로에 성격 나쁘고….”
“저기….”
“그런 주제에 외로움은 또 많이 타서 저 좋을 때만 와서 어리광 실컷 부리는 것도 똑같고. 특히나….”
하준서가 귓가에 입을 대고 나머지 말을 속삭였다.
“엉덩이 때려 주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김민석이 밀어내며 나무라자, 하준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인 걸 어쩌겠어요. 솔직히 엉덩이 맞으면서 좋았잖아요. 너무 좋아하던데.”
“아무튼요!”
하하- 하준서가 소리 내 웃었다.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기분 좋아하는 모습에 김민석은 괜히 흐뭇해졌다.
“무슨 생각 해요?”
하준서가 물었다.
“그냥… 좋다는 생각이요.”
“뭐가요?”
“하준서 씨가 그렇게 웃으니까…. 물론 평소에도 잘 웃지만, 지금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아서요.”
“맞아요. 나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내가 집에 놀러 와서요?”
“네. 하윤 씨가 내 구역에서 이렇게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 보니까 너무 좋네요. 꼭 내 사람 같잖아요.”
“최상혁 씨 집에서는 마음이 불편했어요?”
“음…. 본처 집에 숨어 들어가 있는 첩 마음이 어디 편할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말한 하준서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방금 최상혁 이야기한 거 알아요?”
“네?”
“내가 아까 그랬잖아요. 오늘은 더 이상 최상혁 이름 꺼내지 말라고.”
“아…. 미안해요.”
“흠….”
사과하면 늘 금방 받아 주던 것과 달리, 하준서는 가는 눈으로 가만히 김민석을 응시했다.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주스, 더 안 마셔요?”
그렇게 잠시 쳐다보던 하준서가 주스 잔을 내밀었다.
“아, 마셔야죠. 직접 짜 준 건데 남기면 미안하잖아요.”
김민석은 마침 잘됐다 싶어 주스 잔을 받아 꿀꺽꿀꺽 삼켰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비우고 나자, 하준서가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최상혁은 잘해 줘요?”
하준서가 갑자기 물었다. 먼저 최상혁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기분이 풀렸다 싶어 안도가 들었다.
“음… 잘 모르겠어요. 항상 내가 자고 있을 때 출근하고 밤늦게야 퇴근하니까 얼굴 보고 있을 시간이 거의 없거든요.”
“같이 있을 때는 섹스한다고 정신이 없을 테고.”
“…….”
정확히 사실이었기에 김민석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최상혁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그 집에 계속 있는 거 보면.”
“그건… 딱히 선택권이 없으니까요.”
“선택권이 왜 없어요? 내가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잖아요. 아니면 내가 집을 하나 사 줄 수도 있고.”
하준서가 통 크게 나왔다. 김민석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건 좀….”
“그럼 계속 이렇게 살 거예요? 최상혁 애인으로?”
“…그건…. 일단 이게 내 몸이 아니니까 뭔가 마음대로 변화를 주기는 좀 그래요. 서하윤이 돌아왔다가 갑자기 상황이 완전히 변해 있으면 당황하지 않겠어요?”
“만약 서하윤이 돌아오지 않고 이대로 계속 살게 되면요? 그래도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살고 싶어요?”
하준서는 늘 정곡을 찌르는 재주가 있었다.
김민석도 때때로 하는 고심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모르겠어요. 지금 상황 자체가 전부 혼란 그 자체라서 뭐 하나 고민되지 않는 게 없어요. 게다가 이러다 어느 순간 눈 떠 보면 김민석으로 돌아가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뭘 한들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성실하고 씩씩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왜 이렇게 비관적이고 기가 죽어 있어요.”
“상황이 그러니까요….”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김민석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두워진 기분을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최상혁 씨랑 하준서 씨는 의외로 사이가 나쁘지 않은가 봐요?”
김민석의 물음에 하준서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이런 식으로 인상을 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왜요? 어딜 봐서요?”
“아니…. 서하윤이 바람피우다가 딱 걸려서 둘이 마주친 거잖아요. 그럼 둘 다 감정이 좋을 리가 없는데, 딱히 싸우는 것도 본 적 없고, 내가 매일 두 사람 마주치는 거 알면서도 서로 크게 관여 안 하잖아요.”
“…….”
“그리고 둘이 말하는 거 봤을 때는 친한 건 아니라도 영 모르는 사이 같지도 않은 게 꼭…. 원래 알던 사이처럼… 혹시 둘이 친구였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말끝을 흐렸다.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하준서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하준서 씨, 지금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이에요.”
“왜냐하면 똥 씹은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아….”
김민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똥 씹은 표정으로 쳐다보던 하준서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뭐, 알던 사이인 건 맞아요.”
“…진짜 알던 사이였어요?!”
“친한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친척이에요.”
“……. 네?!”
김민석은 뜻밖의 말에 기겁했다.
“친척 관계라고요?!”
“그렇죠. 뭐, 단순한 친척 관계라기에는 좀 더 복잡하긴 한데….”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영 껄끄럽다는 표정이었다.
“둘이 하나도 안 닮았는데….”
“형제도 아닌데요, 뭘.”
“아니…. 그럼 서하윤은 최상혁 친척을 꼬드겨서 그… 바람을 피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죠.”
“설마 모르고 그랬겠죠. 두 사람 봐서는 절대 친척 관계라고는 믿기지 않으니까.”
“아마 알았을걸요? 우리 둘이 피가 섞였다는 건 좀 유명한 얘기라서.”
“…알고도 그랬다고요? 맙소사….”
김민석은 이마를 짚었다. 안고 있던 폭탄이 터진 기분이었다. 어쩐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아… 너무 굉장한 이야기를 들어 버려서 그런지 좀 어질어질하네요.”
김민석은 소파에 축 늘어져 앉았다. 그러고 보니 몸에서도 힘이 쭉 빠졌다. 흐물흐물한 오징어가 된 기분이었다.
“어지러워요?”
“네, 조금.”
“몸에 힘도 없고요?”
“네….”
김민석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별로 좋지 않았던 하준석의 표정이 마치 거짓말처럼 변했다. 어느새 그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하준서 씨,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여요.”
“기분이 좋거든요.”
“네?”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걸 잔뜩 할 테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죠.”
김민석은 잠시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맹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하준서가 작게 웃었다.
“약 좀 먹었다고 그런 맹한 표정도 짓네요. 귀엽게시리.”
“약이라니요?”
김민석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하준서가 주스 잔을 힐끗했다. 김민석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지나치게 흐물흐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지친 것이나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약을 먹였어요?! …읏.”
김민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옆으로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런 김민석의 몸을 하준서가 가뿐하게 받아 냈다.
“내가 오늘 최상혁 이름 한 번만 더 꺼내면 심술부리겠다고 얘기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건…. 아니, 그렇다고 약을 먹여요? 그게 무슨 심술이에요. 범죄지.”
“우리 사이에 범죄라니요.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죠. 어쨌든 기대해요. 내가 잔뜩 귀여워해 줄 테니까.”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김민석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좋지 않은 예감에 몸에 힘을 주려 애썼다. 하지만 점점 더 늘어질 뿐이었다.
“내가 이 방 꾸미면서 얼마나 설레었는지 몰라요. 우리 하윤이 잔뜩 귀여워해 줄 방이니까 얼마나 정성껏 꾸몄게요.”
하준서가 그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김민석은 방 안에 보이는 풍경을 보고 기함을 했다. 안 그래도 어찔어찔하던 정신이 홀딱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아, 안 돼….”
김민석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리자, 하준서가 소리 내 웃었다. 둘이 들어간 방의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