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40화 (40/125)

40화

“너무하네. 난 매일같이 밥이며 먹을 것 해다 바치며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나한테는 철벽 치면서 최상혁한테는 잘도 벌려 주네요?”

“그건….”

“치사하잖아요. 나도 애인인데. 왜 최상혁한테만 벌려 주는 건데요. 나한테도 해 줘야지. 안 그래요?”

“하준서 씨는… 좀….”

“아하, 감히 첩 주제라 그거죠?”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항상 너그럽게 굴던 사람이 갑자기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드니 당황스러웠다. 하준서가 대놓고 말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하준서도 서하윤의 애인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자면서 자신은 거부하는 모습에 질투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미안해요.”

김민석은 결국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다.

“흐음….”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김민석을 빤히 응시했다.

“말해 봐요.”

“뭘요?”

“최상혁이 좋아요?”

“네?”

김민석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상혁을 좋아하느냐니,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윤 씨는…. 아니, 민석 씨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랑도 막 섹스하고 다니는 그러는 사람이에요?”

“아니거든요!”

“그럼 최상혁이 좋아서 섹스했단 말이에요?”

“그건…! …그건….”

김민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 최상혁이 싫어요?”

“…아니요.”

“그럼 좋아요?”

“……모르겠어요.”

“흠….”

“어제는… 하준서 씨 집에 놀러 가겠다고 허락해 준 게 고마워서, 고맙다고 했는데. 최상혁 씨가 갑자기….”

“고마우면 섹스해 주는 거예요? 그럼 나한테는 안 고마워요? 맨날 와서 놀아 주고 밥도 해 주는데.”

“그건… 고맙죠.”

“그럼 나랑도 해야겠네요.”

“그건 아니고요.”

김민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준서가 눈을 풀지 않고 김민석의 볼을 꼬집었다.

“역시 제멋대로에 아주 못됐다니까, 서하윤은.”

“음….”

김민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뭐, 좋아요. 아까 말한 대로 감히 첩 따위가 이렇게 따지고 들 주제는 못 되니까.”

“하준서 씨….”

“대신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어제 약속한 대로 우리 집에 놀러 가요. 그건 괜찮죠?”

“네. 최상혁 씨도 괜찮다고 했고….”

“쉿.”

하준서가 손가락을 김민석의 입술에 댔다. 그러고선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오늘은 더 이상 최상혁 이름은 꺼내지 말기예요. 안 그럼 나도 심술부릴 거니까 꼭 기억해 둬요. 알았죠?”

“알았어요.”

김민석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씻고 옷 갈아입고 와요. 밥은 우리 집에 가서 먹게요.”

“네.”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자, 김민석은 안도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쏜살같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가자 하준서가 앞장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하준서가 1층을 눌렀다. 김민석은 의아한 눈으로 하준서를 보았다. 주차장은 지하에 있는데 왜 1층을 누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차장은 지하인데요?”

“알아요. 차 안 타고 걸어서 갈 거예요.”

“걸어서요?”

“네.”

하준서는 더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김민석은 산책이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말없이 서 있었다. 1층에서 내린 하준서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의 등을 보며 따라 걷던 김민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삑삑삑삑-

하준서가 바로 옆 동 입구의 전자 키패드를 누르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하준서가 걸어 들어갔다. 김민석이 가만히 서 있자, 하준서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뭐예요?”

“뭐가요?”

“왜 옆 동으로 들어가요?”

“우리 집이 여기거든요.”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네?!”

김민석은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옆 동에 살았다고요?!”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 전에는 다른 곳에 살았는데 그제 이쪽으로 이사 왔어요. 마침 집이 하나 나와 있더라고요.”

“아….”

김민석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옆 동에 사는 남자랑 바람피운 건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과 기억 잃은 애인 집 바로 옆 동으로 이사를 온 하준서에 대한 당혹감이 반반이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하준서가 현관 키패드를 누르고 집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서하윤의 집과 똑같은 집 구조가 보였다. 같은 평수, 같은 구조인 것 같았다. 어쩐지 조금 소름이 끼쳤다.

“어서 들어와요.”

하준서가 권했다. 김민석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인테리어는 서하윤의 집과 딴판이었다.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놓여 있고,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

김민석은 커다란 피아노를 보며 감탄했다. 문외한인 김민석이 보기에도 아주 비싸고 좋아 보이는 피아노였다.

“앉아요.”

하준서가 자리를 권했다. 김민석은 조심스레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냈다. 반으로 숭덩숭덩 자르더니, 그걸로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중에 파는 오렌지 주스도 아니고 생오렌지로 갓 짜낸 오렌지 주스라니. 역시 부자는 다르구나. 김민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스 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고 고운 손가락으로 오렌지를 짠 후, 예쁜 유리컵을 꺼내 거기에 주스를 쪼르륵 따르는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았다.

섬세한 미모에, 장신의 키, 보기 좋은 몸, 피아니스트라는 멋진 직업에 부자라는 점까지. 취향이 좀… 아니, 좀 많이 변태적이라는 것만 빼면 정말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준서가 금세 오렌지 주스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김민석은 하준서가 내미는 주스 잔을 받아 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뭐 찾아요?”

“고양이요.”

“아, 그 녀석들. 그제 막 이사하는 바람에 예민해져서 구석에 숨어 있을 거예요. 나도 어제 오늘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요.”

“아… 그죠, 고양이는 겁도 많고 예민하니까요.”

“그래도 하윤 씨가 왔으니까 금세 나오지 않을까요? 조금 기다려 보죠.”

“네.”

“어서 마셔요.”

하준서가 권했다. 김민석은 오렌지 주스를 꼴깍꼴깍 마셨다. 시중에 파는 오렌지 주스와 맛이 크게 다를 것 같았는데 뜻밖에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 짜내는 걸 봐서 그런지 굉장히 건강한 맛처럼 느껴졌다.

눈이 자꾸 거실 한쪽에 떡하니 놓인 피아노로 향했다. 워낙 덩치가 큰 피아노라 그런지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자꾸 피아노로 향하는 시선을 본 하준서가 말없이 웃으며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색소 연한 섬세한 미남이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미 그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 곡 쳐 줄까요?”

“네!”

김민석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직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바로 코앞에서 직접 듣게 되다니. 그것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연주였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었다.

김민석의 열렬한 반응에 작게 소리 내 웃은 하준서가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그는 건반 위에 양손을 올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쪽으로는 완전 문외한이라 무슨 곡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준서의 평소 성격만큼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곡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치 마음이 어루만져지는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연주에 푹 빠져들었다. 피아노 건반 위로는 하얗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넓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연한 갈색 머리칼과 속눈썹을 비추니 마치 사금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연주에 집중한 섬세하고 하얀 얼굴은 부드러운 연주곡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저렇게 아름답고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다니…. 마치 꿈같은 일이었다.

애옹-

연주가 한창 이어지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바로 옆에서 고양이 소리가 났다. 퍼뜩 정신을 차린 김민석이 옆을 보니, 어느새 젖소 무늬 고양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다가와 있었다.

“어…. 안녕?”

김민석은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고양이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고양이는 손을 피하는 대신 그 손에 자신의 머리를 툭 비비고는, 이내 김민석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어…. 우와….”

김민석은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와 그르렁대기 시작하는 고양이를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어느새 연주를 멈추고 다가온 하준서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젖소 고양이의 머리를 긁었다.

“하윤 씨가 오니까 많이 반가웠나 보네요. 이틀간 구석에 숨어서 꼼짝도 안 하더니.”

“고양이가 서하윤이랑 많이 친했나 봐요. 이렇게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고양이는 처음 봤어요.”

“애들이 하윤 씨를 많이 따르죠. 하윤 씨도 애들을 워낙 귀여워했으니까.”

“나는 서하윤이 아닌데… 하준서 씨나 최상혁 씨, 거기다 이 고양이들 애정까지 대신 받고 있네요.”

김민석은 조금 처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그게 싫어요?”

“…아뇨.”

“그럼 좋아요?”

“…솔직히 그래요. 그래서 죄책감이 느껴져요. 내 것이 아니니까요.”

애옹-

갑자기 축 처져 버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젖소 고양이가 김민석의 가슴팍에 고개를 이리저리 비벼 댔다. 김민석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떠올랐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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