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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37화 (37/125)

37화

‘너만 아니었으면 내 꼴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빤히 응시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원망과 자조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김민석은 그 사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서하윤…?’

하지만 그 사람은 김민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김민석은 눈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미모, 눈 밑의 눈물점까지. 거울 속에서 보았던 서하윤과 찍은 듯 닮아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눈깔 돌려, 기분 더러우니까!’

눈앞의 사람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김민석은 그제야 그 사람이 서하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얼굴은 정말 똑 닮았으나 서하윤보다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였고, 얼굴의 선도 조금 더 부드럽고 여성스러웠다. 하늘거리는 슬립을 입은 몸에는 가슴이 봉긋 솟아 있고, 외치는 목소리도 분명 여성의 것이었다.

‘더러운 놈. 너도 네 아비를 닮아서 피가 더러운 거야. 그 사기꾼하고 똑 닮은 눈으로 쳐다만 봐도 속이 울렁거려. 그러니까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고 제발 좀 방구석에 처박혀 있어! 고아원에 갖다 버리기 전에!’

서하윤을 똑 닮은 여자가 히스테릭하게 외치며 철썩 뺨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싸대기에 고개가 확 돌아간 듯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작은 손이 올라와 맞은 뺨을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엄마, 미안해요.’

김민석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완전히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서하윤을 닮은 여자를 쳐다보는 각도가 완전히 아래였다. 엄마…. 아마도 여자는 아이의 엄마인 모양이었다.

‘그딴 말 필요 없으니까 빨리 방구석으로 기어들어 가!’

여자가 한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눈빛에 증오가 떠올라 있었다. 김민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아이는 그녀의 자식일 터인데, 어린아이가 대체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증오까지 떠올리는 걸까.

‘하지만, 밥은….’

아이가 우물거리며 말하자, 여자가 외쳤다.

‘굶어!!!’

‘…….’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몸을 돌려 작은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김민석은 아이의 엄마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엄마의 말대로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는 작은 자동차 모형을 조물거렸다. 딱히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꼬르륵-

아이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아이의 시선이 방문 쪽을 향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민석은 아이의 손이 장난감 차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이 괴상한 꿈에 대해 생각했다. 뜬금없이 서하윤과 똑 닮은 여자가 엄마로 등장하는 꿈이라니. 그렇다면 자신의 시점으로 보이는 이 아이는, 아마도 어린 서하윤일 것이다.

서하윤의 어린 시절을 보게 되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서하윤의 뇌 속에 저장된 기억을 읽고 있는 걸까? 영혼이 바뀌었다고 해서 기억마저 모조리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일까? 이렇게 자신은 서하윤의 기억을 읽어 들이면서 김민석의 기억을 잃게 되는 걸까?

어느덧 창밖이 컴컴해져 있었다. 어둠에 잠긴 방 안에서 아이는 방구석에 조용히 처박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별안간 닫혀 있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하윤아.’

이번 목소리는 조금 낯이 익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김민석은 그의 얼굴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서창섭이었다.

‘우리 하윤이 또 엄마한테 맞았나 보구나.’

아이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서창섭은, 전에 보았던 것과 달리 젊고, 제법 잘생긴 외모를 하고 있었다.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네 엄마가 아주 아파서 그래.’

‘왜 아픈데요?’

아이, 서하윤이 물었다. 서창섭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엄마 자궁에 암이 생겼대. 엄마는 그게 다 하윤이 친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해. 하윤이 친아빠가 더러운 병을 엄마한테 옮긴 거로 생각하고 있어.’

‘그럼 우리 엄마 죽어요?’

서하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서창섭이 잠시 침묵했다. 어린 서하윤은 두려운 듯 서창섭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서창섭이 그런 서하윤을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혹시 엄마가 죽어도 이 아저씨가 계속 아빠가 돼 줄 테니까. 우리 예쁜 하윤이 절대 고아원에 버리지 않을 거야.’

‘정말요?’

‘그래, 정말.’

어린 서하윤이 서창섭의 품에 안겼다. 서창섭은 그런 서하윤을 보듬어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

스르륵 눈을 뜬 김민석은 잠시 꿈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마치 실제로 겪은 것 같은 생생한 꿈이었다. 김민석은 생각했다.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분명 서하윤의 기억이었다.

대체 왜 서하윤의 기억을 엿보게 된 걸까. 원래 기억이란 뇌 속에 저장되어 있으니, 이 몸을 사용하는 이상 기억조차 공유하게 되는 걸까? 그럼 이렇게 차츰차츰 서하윤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하윤아?”

옆에서 하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리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돌리자 침대 옆에 나란히 누워 있는 하준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잠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낮잠 자자고 하더니, 하준서 씨는 안 잔 거예요?”

김민석은 막 잠에서 깨어나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잠깐 잤어요. 그리고 먼저 일어나서 우리 하윤 씨 자는 모습 구경하고 있었죠.”

“자는 모습 보는 게 뭐가 재밌다고요.”

“나는 재밌는데요?”

“역시 하준서 씨는 취향이 이상해요.”

김민석의 말에 하준서가 옅게 웃었다.

“방금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이요?”

김민석은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느리게 입을 뗐다.

“서하윤 꿈이요.”

“하윤이 꿈이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서가 조금 심각해 뵈는 눈으로 김민석을 빤히 응시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눈이었다.

“꿈에서 내가 서하윤이었는데, 어린아이였어요. 손 크기로 봐서는 5살? 6살? 아니면 7살? 아무튼, 어렸어요.”

“그래서요?”

“서하윤 시점으로 보이는데, 아마 서하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나오더라고요. 서하윤 아빠도 나왔고요. 아빠라는 사람이 말하는 거로 봐서는 양아버지 같았는데…. 그 사람은 알아보겠더라고요.”

“알아보다니요?”

김민석은 하준서의 의아함이 담긴 물음에 그제야 서창섭에 대해 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어제 집에 들어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쳤거든요. 아마 서하윤이 연락이 안 되니까 집 앞에서 기다렸던 모양이에요.”

“하윤이의 가족이라…. 가족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네요.”

하준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땠어요? 하윤 씨 아빠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김민석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서하윤이 하준서의 선물을 서창섭에게 줘 버렸다는 얘기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흠…. 그랬군요. 그래서, 꿈 얘기 계속해 봐요.”

“서하윤 엄마는… 서하윤하고 거의 똑같이 생겼어요. 정말 미인이더라고요.”

“하윤이가 엄마를 닮았군요.”

“네. 눈물점까지 똑같았어요. 처음에는 서하윤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서하윤 엄마는 서하윤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미워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하기는 좀 그랬다.

“저런….”

하준서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김민석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치 위로라도 하는 것 같았다. 진짜 위로받을 상대는 자신이 아닌 서하윤인데 말이다.

“그런데 서하윤 엄마는 아픈 것 같더라고요. 암이라고 했어요. 자궁암. 서창섭이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로 얘기했으니까 아마도… 일찍 죽지 않았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 내가 서하윤 몸속에 있다 보니 너무 생각이 과해져서 개꿈을 꾼 것일 수도 있고….”

김민석은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그럴 수도 있죠.”

하준서는 뭐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민석은 현실처럼 생생했던 꿈을 되짚어 보느라 잠시 멍하니 누워 있었고, 하준서는 그런 김민석의 머리칼이며 얼굴을 매만지며 감상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하윤 씨.”

“왜요?”

“우리 키스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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