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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36화 (36/125)

36화

하준서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지 잠시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자는 걸 다 했다는 건, 분명 변태적인 성행위를 얘기하는 것일 터였다. 김민석의 얼굴이 썩어 버린 것은 당연했다.

“쭉 들어 봐도 별로 호감 가는 타입은 못 되네요. 결국, 장점은 외모밖에 없다, 그 말 아니에요?”

“섹스도 잘하죠.”

“그래요. 외모, 그리고 섹스. 두 가지네요. 그래서 그거에 홀랑 넘어간 거예요?”

“설마요.”

하준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러곤 손을 뻗더니 김민석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윤 씨 외모나 분위기가 확실히 독보적이기는 하죠. 하지만 대한민국에 그 정도 되는 사람이 하윤 씨밖에 없는 건 아니야. 근데 말이에요. 그 정도 되는 사람 중에 그쪽 취향을 타고난 사람, 난 아직 하윤 씨밖에 못 봤거든.”

“그쪽 취향이요?”

김민석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걸 말하는 건가?

하준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김민석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 더 바짝 붙어 앉더니, 은밀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SM이 뭔지 알아요?”

“…아니요!!!”

김민석은 반 박자 뒤에 버럭 외쳤다.

사실은 알았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야동도 보고 야한 만화도 보고 뭐 그러지 않는가. 거기에 가끔 등장하는 것들이 있다. 끈으로 묶고 때리고 촛농을 떨어뜨리고, 뭐 기타 등등….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알고 있는 거 내가 아는데.”

하준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김민석의 귓불을 의미심장하게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내가 하윤 씨 처음 봤을 때 말이에요. 한눈에 알아봤거든. 아, 이 사람 M이구나. 내가 그런 건 또 찰떡같이 잘 알아맞히거든요. 그래서 간을 좀 봤더니 역시나 맞더라고. 내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얼마나 황홀했게요.”

“그렇…군요….”

김민석은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김민석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응시하는 하준서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마치 애무하듯 눈으로 김민석의 얼굴을 핥고 있었다. 야하고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 그럼 하준서 씨는 그…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사람이군요.”

“네, 맞아요.”

하준서는 부끄러움이나 스스럼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SM 플레이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히다니, 역시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였다.

“지금은 기억 못 하니까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가지 플레이에 꽤나 능숙해요. 나하고 한번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내가 한번 놀아 주겠다고 하면 고마워서 내 발이라도 기꺼이 핥을걸요.”

“…….”

하준서의 나른한 속삭임에 어쩐지 몸이 살짝 달아올랐다. 하준서에게 엉덩이를 후려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서하윤의 몸은 분명히 반응했다.

“하윤 씨랑 처음 플레이할 때가 떠오르네요. 살짝 겁먹은 주제에 아닌 척 앙칼지게 구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내 손에 굴복해서 울면서 가 버리던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저는 서하윤이 아니니까 그런 거 꿈도 꾸지 마세요.”

김민석은 경계심을 곧추세우며 경고했다. 하준서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귓바퀴를 살짝 깨물고는 속삭였다.

“그렇지만 기분 좋았잖아요. 엉덩이 맞는 거. 맞으면서 질질 쌌던 거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죠?”

하준서의 속삭임에 순간 엉덩이를 맞았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아랫도리가 찡해졌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민석 씨도 그런 취향이었든지, 아니면 몸 취향에 따라가는 거든지…. 평범한 사람은 절대 엉덩이 맞으면서 그렇게 세우지 못하거든요. 심지어 질질 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건… 서하윤의 몸이라서, 아마 그래서 그런가 보죠.”

김민석은 애써 핑계를 댔다.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런 몸이니까, 기왕 그런 거 한번 만끽해 보는 건 어때요? 최상혁이랑 하는 것보다 더 좋을걸요? 아니고서야 왜 나랑 계속 바람피웠겠어. 솔직히 말해 봐요. 얼마나 좋을지 궁금하지 않아요?”

최상혁과의 관계에서도 마치 죽었다 깨어난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쾌감이라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뇌가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있다는 어엿한 남자로서 살짝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다. 하지만 김민석은 기특하게도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하준서를 밀어냈다.

“전 괜찮아요. 하나도 안 궁금해요.”

“거짓말. 민석 씨는 하윤이랑 달리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사람 코앞에 두고 잘도 거짓말하는 거 보면.”

하준서가 놀리듯 말했다. 거짓말한 건 사실이기에 김민석은 살짝 난감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김민석 핸드폰에 또 전화를 걸어 봤어요.”

“거짓말 들키니 말 돌리기에요?”

하준서가 대번에 정곡을 찔렀다. 크흠. 김민석은 헛기침하며 못 들은 체했다.

“역시나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문자도 보냈는데 답이 없고요. 전화가 꺼지지 않고 계속 켜져 있는 거 보면 지속적으로 충전을 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대체 누가 가지고 있는 걸까요?”

“흠….”

하준서는 김민석의 술수에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네?”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면 그땐 어떻게 할지는 생각해 둔 거예요?”

언제나 김민석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했다.

“…아니요….”

김민석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계속 연락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일단 본인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먼저 결정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

김민석은 말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대번에 심란함이 떠올랐다.

“저라고 그걸 생각 안 해 봤겠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답이 안 나와요.”

“어떤 점에서요?”

“…그건….”

김민석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서하윤의 몸을 이대로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반쯤은 있다는 이기적인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눈앞의 남자는 서하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였다.

“하윤 씨. …아니, 민석 씨.”

부르는 하준서의 눈이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진지한 눈이었다.

“…네.”

김민석은 약간 긴장한 채 대답했다. 하준서가 잠시 김민석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냥 이대로 지내는 건 어때요?”

“네?”

“지금처럼 말이에요. 꼭 원래 몸을 찾아야 하나요? 김민석은 고아에다 고시원에서 사는 아르바이트생이라면서요. 가족도 없고, 가난하고, 특별히 연락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없는 걸 보면 그리 친한 지인도 없는 것 같고…. 그런 김민석의 몸으로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

하준서의 말이 마음을 깊게 들쑤셨다. 그는 김민석의 고뇌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꼭 그 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거나, 꼭 그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아니면 그냥 지금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하지만….”

“이것 봐요. 서하윤이 얼마나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예쁜 몸을 가졌는지. 게다가 서하윤은 부자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도 있어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뭐가 안 된다는 건데요?”

“서하윤이요. 가진 게 많잖아요. 내가 봐도 홀딱 넘어갈 것 같은 외모에, 이 커다랗고 비싼 아파트에, 외제 차에,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아마 가족도 있는 것 같고…. 그렇게 가진 게 많은 서하윤의 몸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빼앗아서 쓸 수가 있겠어요. 지금 서하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자기 몸을 되찾고 싶을 거예요. 그런 사람한테서 몸을 빼앗는다니, 그거 나쁜 짓이잖아요.”

“흐음…. 너무 착해져도 문제네.”

하준서가 김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다시 물었다.

“그런 거 다 떠나서 본인 마음은 어떤데요? 요 며칠 살아 보니 어땠어요? 김민석 인생보다 좋았어요, 나빴어요?”

“……낯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좋았어요.”

김민석은 솔직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서하윤의 몸을 빼앗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럼 뭘 그렇게 고민해요. 그냥 이대로 살면 되지.”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이건 내 몸이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막 빼앗아서 써요? 게다가 하준서 씨, 서하윤 사랑한다면서요. 사랑하는 사람 몸을 이렇게 내가 빼앗아 버렸는데 그게 용납이 돼요? 서하윤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김민석 몸에 들어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네. 나는 하윤이 사랑해요. 많이요. 그래서 알 수 있어요. 하윤이 지금 행복해요. 예전보다 훨씬 더 마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내 욕심 채우는 것보다 하윤이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이대로도 나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하준서는 확신에 찬 눈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준서 씨 지금 서하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는 거 알아요?”

“음…. 글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감이라고 해 두죠. 사랑의 초능력이랄까?”

“뭐예요, 그게.”

김민석은 불퉁하게 말했다. 하준서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낮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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