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35화 (35/125)

35화

드르르르-….

진동이 울렸다. 최상혁 앞에 서서 보고하던 김 실장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최상혁은 책상 서랍을 열어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액정에 크게 금이 간 핸드폰 위에 전화를 건 이의 번호가 떠 있었다.

최상혁은 말없이 전화 진동이 울리는 것을 보기만 했다. 한참을 울린 끝에 진동이 끝났다. 몇 초 후,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 메시지가 떴다.

그 핸드폰 주인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누가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약간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최상혁은 김 실장을 앞에 세워 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같은 번호에서 온 문자를 쭉 올려 읽었다.

저는 김민석입니다. 지금 핸드폰 가지고 계신 분 연락 주세요.

핸드폰 주인입니다.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몇 번이나 보았던 문자를 차근차근 읽은 최상혁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서하윤이 쇼를 하는 거로 생각했다. 뛰어내려도 겨우 3층에서 뛰어내리다니, 자신에게 시위하는 거로밖에 안 보였다. 서하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기억 상실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하준서의 존재를 들킨 사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얄팍한 장난질로 보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계속 얘기해 봐.”

최상혁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서하윤 씨가 입원했던 병원을 다시 조사해 봤지만, 김민석이라는 사람은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몰라서 입원하기 한 달 전부터 어제까지의 기록을 뒤져 봤지만 내원한 내역도 없습니다. 물론 의식 불명으로 입원해 있는 환자 중에도 없었고요.”

“서하윤과 생년월일이 똑같다고 했어. 보육원에서 자랐고, 노랑진에 있는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고 했지. 해당 사항이 맞아 들어가는 사람 중에 김민석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예, 알겠습니다.”

“서하윤 아비라는 작자도 조사해 보고.”

“예.”

최상혁은 손짓으로 김 실장을 내보냈다. 그러다 습관처럼 서하윤의 핸드폰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평소에는 서하윤이 손도 못 대게 했던 핸드폰이다. 물론 서하윤이 경계를 하든 말든 딱히 들여다볼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던 걸까? 서하윤을 제대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게 옳았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다른 새끼에게 다리를 벌리고 다니거나, 아비라는 구멍 뚫린 독에 돈을 들이붓는 멍청한 짓은 하지 못했을 거다.

최상혁은 자칭 김민석이라고 주장하는 서하윤에게서 온 문자 창을 끄고 다른 문자 창을 띄웠다. 수신자 이름은 씹새끼로 저장되어 있었다.

하윤아. 이번 달 생활비가 안 들어왔다. 말도 없이 이러면 곤란하지.

하윤아. 급하니까 일단 천만 원만 보내 줘라.

서하윤. 왜 전화도 안 받니. 지금 이 아빠를 피하는 거니? 보는 즉시 연락해라.

서하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후회하는 수가 있어. 당장 연락해라.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진짜 연락 안 해? 너 이러면 확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

서하윤에게 온 문자는 대체로 협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까발리겠다, 라….”

최상혁은 서창섭의 문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돈 욕심 많고 이기적인 서하윤이 자신의 아비라고 해서 고분고분 돈을 퍼다 줄 리가 없다. 적어도 최상혁이 아는 서하윤은 그랬다. 그렇다면 뭔가 약점이 잡힌 게 있다는 거다. 문자 내용을 봐도 그건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최상혁이 준 카드로 온갖 값비싼 물건을 사들여 댔으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렸다며 중고로 팔아 치우길 반복해 댄 것이…. 그리고 하준서를 꾀어 만나며 값비싼 선물을 넙죽넙죽 받아 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서하윤….”

최상혁은 서하윤의 이름을 입 안에 굴리듯 중얼거렸다. 그의 이름은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났다.

서하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퍼다 주면서까지 서창섭의 입을 막으려고 한 건 무엇 때문일까?

본래라면 당장에 서창섭을 잡아다 서하윤의 비밀을 털어 내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서하윤은 어쨌든 지금 자신이 김민석이라는 남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 김민석처럼 행동하는 서하윤이, 최상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시점에서 굳이 서하윤의 비밀을 캐내어 알고 싶지 않았다. 현재의 관계가 마음에 들어, 그것이 깨지는 걸 보기 싫다는 쪽이 맞으리라.

“한심하군.”

최상혁은 자조했다.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서하윤.

돈과 섹스에 환장하는 서하윤.

상대를 기만하는 데 서슴없는 서하윤.

타고나기를 남자를 꼬여 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서하윤.

그런 서하윤이 지금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해리성 장애로 자신이 김민석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게 진실일까. 혹시 김민석인 척 본래 핸드폰에 문자와 전화를 해 대는 것도, 최상혁을 속여 먹기 위한 술수는 아닐까?

그 작고 영악한 머릿속을 직접 열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서하윤에게 몇 번이고 기만당했으면서도, 최상혁은 이번에는 진짜이길 바랐다. 가엾게도 머리를 다쳐 김민석이라는 인물이 되어 버린 거라고 말이다. 김민석이라는 존재가 서하윤 속에 감춰져 있던 순수와 진실이라 믿고 싶었다. 그렇게 순수함을 되찾은 서하윤과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관계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서하윤인지, 아니면 김민석인지… 시간이 지나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최상혁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며 금이 간 핸드폰을 서랍 속에 돌려놓았다.

❖ ❖ ❖

그 핸드폰 주인 김민석이라고 합니다. 누가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문자를 보낸 김민석은 소파에 기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이렇게 연락을 시도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냥 복잡한 생각이나 양심 따위는 모두 던져 버린 채 이대로 사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 던져 준 기회인 게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뭘 또 그렇게 생각해요?”

하준서가 물으며 생딸기 우유를 내밀었다. 김민석은 대답 대신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아서 한 모금 삼켰다. 딸기와 우유를 넣어 방금 갈아 낸 음료에서는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맛있어요?”

“네. 맛있어요.”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딸기 우유를 꼴깍꼴깍 삼켰다. 비싼 생딸기를 갈아 만든 딸기 우유를 마신다니, 김민석 인생에는 없던 호사였다.

“우리 하윤 씨는 뭐든 잘 먹네.”

하준서가 흐뭇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는 김민석에게 먹을 걸 갖다 바치고 그걸 지켜보는 걸 상당히 즐거워했다. 상대방이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하다니. 김민석의 상식선에서, 그건 찐사랑이나 다름없었다.

“하준서 씨는 안 먹어요?”

그러고 보니 하준서 몫의 컵이 아예 없었다.

“난 딸기 싫어해요. 우유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런데 왜 딸기를 사 왔어요. 같이 먹을 수 있는 걸 가져오지.”

“하윤 씨가 딸기를 좋아하니까 사 왔죠.”

“그래도 혼자만 맛있게 먹으면 미안하니까요.”

김민석의 말에 하준서의 눈웃음이 조금 진해졌다. 그가 손가락으로 김민석의 볼을 부드럽게 훑었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기억 상실인지, 해리성 장애인지, 아니면 혼이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나쁘진 않네요. 이렇게 착한 서하윤도 겪어 보고.”

“착해요? 겨우 이게요?”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자고 했을 뿐인데 착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평소 서하윤의 성격은 대체 어느 정도였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이 몸의 주인인 서하윤은 어떤 사람일까. 돈 좋아하고 섹스 좋아한다는 건 뭐…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서하윤에게도 여러 가지 면이 있을 터였다.

“서하윤은 어떤 사람이에요?”

김민석은 조심스레 물었다.

“음….”

하준서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돈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고….”

“…윽….”

최상혁에게 들었던 말이 고스란히 나오는 걸 듣고 김민석은 혀를 깨물고 말았다. 맙소사, 서하윤. 도대체 얼마나 돈을 좋아하고 섹스를 좋아하면 두 남자 모두에게 저런 평가를 받는 거니.

“예민한 데다 성격도 나쁘고, 이기적인 데다 앙칼지고, 눈은 높아서 자기 눈에 안 차는 인간은 인간 취급도 안 하고….”

“…하준서 씨, 지금 자기 애인 얘기하는 중인 거 맞죠?”

줄줄이 나열되는 단점에 김민석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하준서가 피식 웃었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일단 예쁘고 섹시하죠. 남자든 여자든 마음만 먹으면 홀랑 꼬드겨 벗겨 먹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고요. 자기 기분만 좋으면 사람 마음 녹진녹진하게 녹여 버릴 만큼 달콤하게 굴 때도 있고… 외로움을 많이 타서 사람 옆에 들러붙는 것도 좋아하고…. 특히 비싼 선물을 해 주면 행복해하는 모습에 내 기분도 좋아지죠.”

“…단점 얘기 아닌 거 맞아요?”

“비싼 선물일수록 더 기뻐하니까 점점 더 비싼 걸 사 줄 수밖에 없었죠. 특히 나 몰래 팔아먹어 버린 시계를 줬던 날에는 내 자지를 얼마나 정성껏 빨아 주던지…. 그날은 내가 하자는 건 무조건 다 해 줘서 너무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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