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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31화 (31/125)

31화

얼마나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냥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김민석이 정신을 차린 것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현관문 센서 등이 켜지며 컴컴한 집 안을 밝혔다. 퍼뜩 정신을 차린 김민석은 소파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최상혁을 맞이했다. 그는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컴컴한 집을 슥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거실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한 불빛이 밝혀지자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질끈 감겼다. 몇 번이나 실눈을 뜨며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빛에 적응이 되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는 거야?”

최상혁이 김민석의 턱을 쥐고선 말했다. 그는 검은 눈으로 김민석의 안색이며 표정 따위를 살피고 있었다.

“밥은?”

“…아까 먹었어요.”

“언제?”

“점심쯤에요.”

김민석의 대답에 최상혁의 눈매 끄트머리가 살짝 굳어졌다.

“병원은?”

“…안 갔어요.”

한 박자 늦게 대답한 김민석은 핑계를 대듯 덧붙였다.

“가려고 했어요. 가려고 병원 앞까지 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간다고 고쳐질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요.”

“…….”

“기억 상실이나 뭐 그런 게 약 먹는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돌아올 수도 있고, 안 돌아올 수도 있고 복불복이죠, 뭐.”

“그럼 너는?”

최상혁이 물었다.

“네?”

그가 뭘 묻는지 파악하지 못한 김민석이 되물었다.

“너는 어떠냐고. 지금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겠어?”

“…아….”

뜻밖의 물음에 김민석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소파에 앉아 여태 생각한 게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 서하윤으로 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김민석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아니, 만약 서하윤이 나타나 이 몸을 돌려 달라고 하면 자신은 기꺼이 이 몸을 내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대로 김민석으로서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모르… 모르겠어요. 나는 모르겠어요, 최상혁 씨.”

김민석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마치 호소하듯 계속 중얼거렸다.

“기억이 없어진 것 같은데… 김민석의 기억이요. 오늘 원래 살던 곳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노량진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나머지는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한참이나 생각해 봤거든요. 내가 살던 고시원,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내가 자란 보육원 이름까지….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것만 쏙 빠져서 기억이 안 나요. 그래서….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김민석은 마지막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최상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민석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최상혁 씨는… 안 믿는 거죠? 내가 김민석이라는 거.”

“네가 서하윤이든 김민석이든 상관없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너고, 네가 내 거라는 점은 변함없을 테니까.”

일견 무심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무게에 김민석은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누군가의 ‘것’이라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다니….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렇지 않겠지.

김민석은 속으로 자조했다.

최상혁이 핸드폰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 이리저리 만지더니, 곧 핸드폰을 소파에 던지고 양복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밥 시켰으니까 도착하기 전에 씻어.”

짧게 말한 최상혁은 와이셔츠 단추를 툭툭 풀며 욕실로 향했다. 밥을 시켰다는 말에 그제야 허기가 좀 느껴졌다. 일어난 후로 샌드위치 달랑 하나 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민석은 최상혁의 말대로 안방 욕실로 향했다.

샤워하고 나오니 최상혁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드레스 룸에서 잠옷을 찾아 입은 김민석과 달리, 그는 브리프 한 장만 걸친 채였다. 덕분에 단단한 근육질 몸매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같은 남자로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훌륭한 몸이었다.

저런 남자와 섹스했다니….

김민석은 일순 스치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지난밤의 격렬한 정사가 머리를 스쳤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이며 수치심, 그리고 그 모든 걸 다 덮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던 쾌감까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육체로 그런 쾌감을 끌어내 만끽할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제까지는 여색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는다든가 복상사한다든가 하는 일이 먼 나라 일로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제의 그 강렬한 쾌감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김민석은 자신이 최상혁의 근육질 몸을 마치 핥듯이 감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최상혁이 그 시선을 보고 피식 웃었다는 것도 말이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최상혁이 마시던 생수통을 내려놓고 김민석을 향해 걸어왔다. 심상치 않은 접근에 몸이 절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띵동-

현관 벨이 울렸다. 배달시킨 밥이 도착한 것이다.

“쯧.”

최상혁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더니 현관으로 향했다. 브리프 한 장만 입은 맨몸으로 배달 음식을 받으러 가는 모습에 김민석은 기겁했다. 그를 붙잡아 말리고는 자신이 대신 현관문을 열어 배달 음식을 받았다.

최상혁이 배달시킨 것은 초밥이었다.

비싸서 몇 번 먹어 본 적도 없는 초밥의 찬란한 자태에 김민석은 혀에 절로 침이 고였다. 김민석은 재빨리 포장을 뜯고 식탁 위에 상을 세팅했다. 그리고 얼른 자리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최상혁도 반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자요. 어서 먹어요.”

김민석은 잘 뜯은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최상혁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나무젓가락을 잠시 쳐다보더니 느린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김민석은 신이 나서 제 몫의 나무젓가락도 뜯은 다음 초밥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한입에 쏙쏙 들어가게 만든 초밥은 맛이 기가 막혔다. 간장에 푼 와사비의 맛이 알싸하게 입 안에 퍼져 나갈 때마다 더더욱 입맛이 돌았다. 초밥을 먹은 후 초생강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김민석은 어느새 아까까지 하던 어두운 생각은 몽땅 잊어버린 채 초밥을 먹어 치우는 데 전념했다.

“…맛있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최상혁이 물었다. 먹는 데 정신이 팔렸던 김민석은 그제야 최상혁이 아직 젓가락을 든 채 초밥 하나도 먹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자신은 이미 초밥을 반 이상 먹어 치운 상태였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치솟았다.

“네. 맛있네요. 초밥은 몇 번 안 먹어 봤거든요. 그나마 먹어 본 것도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초밥이라서… 이렇게 맛있는 초밥은 처음 먹어 봐요.”

김민석은 자신이 김민석임을 거리낌 없이 내세우며 말했다. 그런 다음 권했다.

“최상혁 씨도 얼른 드세요.”

최상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길을 보내다 곧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민석은 다시 초밥을 먹는 대신 잠시 최상혁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이 굵은 미남이 초밥 먹는 모습을 깔끔하고 시원시원했다. 김민석은 다시 자신의 초밥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는 것만으로도 머릿속 혼란이나 두려움, 걱정 따위가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정말 단순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초밥이 하나씩 하나씩 입 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김민석은 약간 힝, 하는 마음이었다. 배가 불러오기는 하는데 워낙 맛있어서 더더더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김민석은 일부러 입 안의 초밥을 느릿하게 씹으며 최대한 맛을 음미하려고 했다.

남은 두 개 중 하나를 집으려던 참이었다. 커다란 손이 나타나더니 김민석의 접시를 슥 들고 가 버렸다. 깜짝 놀라 눈을 들자 최상혁이 자신의 접시와 김민석의 접시를 바꾸어 내려놓았다.

“어…. 배 안 고프세요?”

김민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민석 앞으로 옮겨진 접시에는 초밥 두 개를 빼고 나머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서 먹어.”

최상혁이 대답 대신 말했다.

“하지만….”

김민석이 망설이자 최상혁이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네까짓 게 감히 내 말을 안 들어? 하는 눈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김민석은 더는 사양할 것 없이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남은 초밥의 개수가 많아지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조금 전처럼 아껴서 깨작깨작 먹는 대신 와구와구 먹어 치우는 행위가 매우 행복했다. 역시 인간은 단순한 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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