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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30화 (30/125)

30화

“하윤아?!”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중년 남자 한 명이 노골적으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표정으로 봐서 서하윤과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다.

“하윤아! 괜찮았구나! 다행이다! 내가 얼마나 걱정하고 기다린 줄 아니? 왜 이렇게 만나기가 힘들어? 연락은 또 왜 안 받고?”

주름이 많고 안색이 시커먼 중년 남자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김민석의 손목을 부여잡고 연신 질문을 쏟아부었다. 당연하게도 김민석은 중년 남자를 처음 보았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왜 그래? 괜찮니?”

질문을 쏟아 내던 남자가 김민석의 표정을 보고 한 발 물러났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한데 누구시죠?”

“…뭐?!”

중년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민석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실은 제가 며칠 전에 큰 사고를 당해서 머리를 다쳤거든요. 그래서 기억을 다 잃어버렸어요. 핸드폰도 그때 부서져서 새로 만들었고요.”

“뭐?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어?!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해?!”

남자가 다그쳤다.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서하윤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김민석의 물음에 남자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김민석의 얼굴과 눈빛을 살피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네 아빠다.”

“……아…빠요?”

“그래. 정말 기억 안 나니?”

다시 묻는 남자의 눈이 진실을 가늠하려는 듯 김민석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김민석은 그 시선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으나,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이 몸의 부친이라는 것에 놀라서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네… 기억을 잃어서요….”

김민석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몸이 바뀌었니 어쩌니 해 봐야 병원에 끌려갈 일밖에 없으니, 기억 상실이라고 둘러대는 게 편할 터였다.

“어쩐지, 아무리 연락을 해도 안 받더라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난 네가 일부러 연락을 안 받는 줄로 오해했지 뭐니.”

중년 남자, 서하윤의 부친이 굳었던 얼굴을 풀며 말했다.

그의 눈은 김민석의 눈치를 살피듯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색이 약간 뿌옇게 변해 있어서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김민석은 남자를 보며 그가 서하윤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서하윤의 빼어난 외모는 아마도 모친 쪽의 유전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버님께 연락이 안 갔을까요? 핸드폰에 저장이 안 되어 있나?”

김민석은 솟구치는 의문을 곧장 입으로 내뱉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의식 불명 상태의 환자가 실려 왔으면 보통 가까운 가족을 호출하지, 애인을 호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핸드폰 연락처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락했을 터인데, 불려 온 사람 중에 이 남자는 없었다.

“제가 기억을 잃어서 죄송한 얘기지만, 진짜 서하윤 씨 아버님 맞으세요?”

“맞지! 내가 서하윤이 아빠지! 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남자가 격하게 반응했다. 김민석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남자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니 지나가던 사람이며 경비실의 경비원이 모두 시선을 보냈다.

“자, 봐라. 내가 네 아빠 맞다.”

남자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펼쳤다. 신분증에는 서창섭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같은 서 씨였다. 가까이 선 남자에게서는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어쩐지 그것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리고 자, 여기 이것도 봐라.”

남자가 지갑 안쪽에서 낡은 종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는 종이를 펼치자 낡은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남자와 그의 앞에 선 아이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오래전 사진이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환하게 피어난 아이의 비범한 외모를 보니 영락없는 서하윤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기억이 없다 보니 사람들 말을 믿는 게 쉽지가 않아서요.”

김민석은 사과하며 사진을 돌려주었다. 서창섭은 사진을 받아 다시 지갑에 소중히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아무 말이나 덥석덥석 믿고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병원에는 가 봤냐? 기억은 언제 돌아온대?”

“그건… 알 수가 없대요. 당장 한 시간 뒤에 돌아올 수도 있고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네요.”

김민석은 TV에서 보았던 기억 상실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며 대충 둘러댔다.

서창섭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서 있다가, 김민석의 팔뚝을 잡아 길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은밀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 기억을 잃었으면 그것도 기억 못 하겠구나.”

“무슨….”

“이 아빠가 말이다.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일을 못 하지 않니. 그래서 네가 병원비랑 생활비를 대 주고 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김민석은 서창섭의 첫인상이 이해가 갔다.

서창섭은 좋게 말하면 고생해서 본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가령 술이나 마약, 혹은 도박 같은 것에 말이다. 한마디로 눈빛이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이 몸의 주인인 서하윤은 그런 부친도 혈육이라고 돈을 대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서하윤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서하윤은 지금 직업도 없고 돈도 못 버는 백수예요. 제 통장 체크카드가 하나 있기는 한데 비밀번호를 몰라서 그 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파악한 상황으로 봐서는 아마도 아버님께 드릴 금액은 안 들어 있을 것 같네요.”

김민석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말한 대로 서하윤은 직업도 없는 백수 신세였고, 고급 아파트에 외제 차가 있지만 그건 애인들에게 선물받은 것이었다. 먹고사는 것도 아마 모두 최상혁의 돈일 터였다. 그 와중에 가족의 병원비며 생활비까지 대 줄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윤이 너…!”

서창섭이 눈을 부라리더니 팔뚝을 꽉 잡아 비틀었다.

“아…! 아프잖아요!”

김민석은 작게 외치며 서창섭의 손을 억지로 떨쳐 냈다. 서창섭은 아들이 자신의 손을 떨쳐 낸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눈을 한층 더 크게 부라렸다.

“이 자식, 부모한테 뭐 하는 짓거리야? 이런 불효자식을 보았나.”

김민석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릿하게 아픈 팔뚝의 소매를 걷어 보았다. 얼마나 세게 잡아 비틀었는지 시뻘건 손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김민석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살피며 서창섭의 분노에 반응하지 않자, 그의 표정이 스르륵 가라앉으며 금세 변했다.

“하윤아. 하윤아. 나 좀 봐라. 아빠잖니. 아빠가 아파서 병원비가 급한데 내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너밖에 더 있니? 이것 봐라. 너 사는 아파트가 얼마나 비싼 줄은 아니? 돈이 없으면 저번처럼 네 그 비싼 시계 같은 거라도 하나 줘라. 그럼 그걸로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시계요?”

김민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 시계. 너 애인한테 선물받은 시계나 반지, 뭐 그런 거 제법 가지고 있을 거 아니냐. 그런 거라도 하나 줘 봐라, 응?”

김민석은 전에 하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외제 차보다 비싼 시계를 선물했는데 그걸 멋대로 팔아 치웠다고 했었지. 아마 서창섭 손에 쥐여 줬던 모양이다.

“그 시계, 억 소리 나는 외제 차보다 비싼 시계였잖아요. 못해도 몇 천만 원은 받았을 텐데 그걸 벌써 다 썼단 말이에요?”

김민석이 따지듯 묻자, 서창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애인이 준 물건이 어쩌고 하는데 내 애인이 누군지는 알아요?”

“그, 그래…. 그 있잖냐. 돈 많은 놈. 너한테 이 아파트도 사 주고 시계도 사 주고 먹여 살려 주는 놈 말이다.”

“…하-!”

김민석은 하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 아들이 남자 애인을 둔 것도 모자라 그에게 빌붙어 먹고사는데, 그걸 뜯어말리지는 못할지언정 그런 아들에게 다시 빌붙어 먹고사는 부친이라니.

갑자기 서하윤이 불쌍해졌다.

지금까지는 그를 인물 하나 믿고 애인에게 빌붙어 먹고사는 게으른 백수로만 여겼다. 그런데 자식을 뜯어먹지 못해 안달이 난 부친이 있었다니. 아마 그도 속앓이를 꽤나 했을 것이다.

“하윤아.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그래. 병원비로 다 날리고 돈이 없어.”

“몇 천만 원을 순식간에 날리다니, 암이라도 걸렸어요?”

“그, 그래. 암이라서 수술비가 어마어마해.”

“수술한 부위가 어딘데요.”

서창섭은 선뜻 대답을 못 했다. 그러더니 곧 왈칵 화를 냈다.

“아비가 다 죽어 간다는데 그따위 말이 나오냐?! 이 불효막심한 새끼!”

진짜 서하윤은 어땠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창섭과 하등 상관없는 김민석은 그런 그의 행동이 별반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요. 무슨 중독인지 모르겠지만, 병원이라도 가서 치료할 생각이나 하세요. 진짜 아파서 병원비가 필요한 거면 몰라도, 그것도 아닌데 애인 돈 뜯어다 바칠 생각. 적어도 저는 없으니까요.”

“이 자식이…!”

서창섭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움직임이 굼떠서 김민석은 아슬아슬하게 뺨 맞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서하윤!”

뺨을 후려갈기는 데 실패한 서창섭이 분노해서 눈을 부라렸다. 희뿌연 막이 살짝 깔린 눈이 희번덕거리는 모습이 영 혐오스러웠다.

“가세요.”

김민석은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몸을 돌렸다. 서창섭이 뒤에서 팔을 낚아챘지만 세게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큰 소리가 나니,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경비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덩치가 좋은 경비가 물어보니 서창섭이 멈칫했다.

“잡상인이에요. 자꾸 붙잡네요.”

김민석이 말하자 경비가 서창섭의 앞을 막아섰다. 김민석은 그 틈을 이용해 아파트 안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서창섭이 뭐라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지금 자신의 상황도 혼란 그 자체인데, 자식 뜯어먹고 사는 남의 부모까지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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