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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29화 (29/125)

29화

하준서는 한참이나 말없이 김민석을 보듬어 주었다. 따로 위로의 말은 건네지 않았지만, 그의 품과 손길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내 몸이 죽은 거라면 진짜 서하윤은 어디 있는 걸까요.”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낸 김민석은 이내 흠칫했다. 서하윤의 몸은 자신이 차지하고 있다. 만약 김민석의 몸이 죽은 상태라면 서하윤의 영혼은 갈 곳이 없다. 혹시… 서하윤은 이미 죽고 없는 게 아닐까?

“미, 미안해요.”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사과했다. 서하윤을 사랑하는 하준서 앞에서 그런 끔찍한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찾아가 볼까요?”

하준서가 문득 말했다. 그의 품을 벗어나 시선을 마주치자, 하준서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덧붙였다.

“김민석이 살던 고시원. 한번 가 볼까요?”

하준서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살아 움직이는 김민석을 보는 것도 겁났고, 죽어 있는 김민석을 보는 것도 겁났다. 분명 확인을 하긴 해야 하는데, 막상 당장 가 보려니 무서웠다.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하니까….”

김민석은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듯 중얼거렸다.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반박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라 진료 못 보잖아요. 오후 진료 봐야 하니까 그사이에 다녀오면 되죠.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그의 말에 반박할 핑계를 찾지 못한 김민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래, 어차피 확인은 해야 했다. 매일같이 고민하고 두려워하느니, 한시라도 빨리 현실을 대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자, 그럼 말 나온 김에 출발하죠.”

하준서가 상큼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석은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며 느릿하게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나란히 현관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하준서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김민석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최상혁 씨한테 미리 말해 두려고요. 혹시 어제처럼 또 쫓아오면 안 되잖아요.”

“아, 그렇지. 개목걸이가 있었지.”

하준서의 말에서는 최상혁에 대한 유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김민석은 그것을 모른 체하고 최상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잠시 외출해요. 외출한 김에 병원도 들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문자를 찍어 보낸 김민석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하준서를 따라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들어선 하준서가 다가간 차는 포르쉐가 아니었다. 하얀색 마세라티였다.

“차가 바뀌었네요?”

“아, 포르쉐는 최상혁이 구겨 놨길래 고치려 보냈어요.”

김민석은 그제야 어제 지나가며 보았던, 움푹 들어간 포르쉐 트렁크를 떠올렸다.

“설마 새로 샀어요?”

“아뇨. 새 차가 하루 만에 나올 리가 있나요. 그냥 원래 있던 차예요.”

“차가 두 대나 있어요?”

김민석은 조금 전까지의 무거운 기분도 잊어버린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값비싼 차를 한 대도 아니고 두 대나 가지고 있다니. 역시 부자는 달랐다.

김민석의 그런 반응을 본 하준서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아, 정말 귀엽다니까.”

하준서가 김민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요즘 세상에는 워낙 외제 차가 많아서 벤츠며 BMW 따위는 강남의 소나타 정도로 불릴 정도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있어서 외제 차란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꿈의 차였다.

“마세라티까지 타 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김민석은 약간 흥분한 채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준서가 옅게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차는 다시 노량진을 향해 출발했다. 차 구경을 끝낸 김민석은 묵직한 가슴속을 느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살아 움직이는 김민석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만약 김민석이 죽어 있으면 어떡하지?

두 가지의 가정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었다. 하준서는 김민석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는 듯 평소와 달리 말을 걸거나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차라리 일찍 도착해서 현장을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늦게 도착해서 현실과 맞닥뜨리는 시간을 늦추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러는 동안 차는 부지런히 달려 어느덧 노량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디예요?”

하준서가 물었다. 김민석은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이내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어….”

김민석이 멍한 목소리를 흘리자 하준서가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하윤 씨?”

표정이 이상한 걸 확인한 하준서가 차를 갓길에 대고 그를 불렀다. 김민석은 연신 눈을 끔뻑이며 꼬인 실타래처럼 엉겨 있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자신의 고시원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고시원 이름이 뭔데요?”

하준서가 핸드폰의 내비 앱을 켜며 물었다. 김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다음 느릿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네?”

“기억이… 안 나요.”

하준서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아마 김민석의 표정도 비슷할 터였다.

“이름이 기억 안 나면… 대략적인 위치는 기억나요?”

“아니요. 기억이 안 나요. 노량진인데… 분명히 노량진에 있는 고시원인데…. 갑자기 이름도 생각 안 나고 위치도 생각이 안 나요.”

김민석은 마치 자신이 귀신에 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김민석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노량진 거리를 응시했다. 어떤 낯익은 풍경이라도 포착해 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낯익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기억이 안 나죠? 아니, 왜 기억이 안 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죠?”

김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윤 씨….”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하준서가 조용히 손을 겹쳐 잡았다.

“나, 나는 김민석이에요. 진짜 김민석인데, 내가 사는 고시원이 어딘지 이름도 기억이 안 나요. 나 갑자기 왜 이래요? 혹시 서하윤 몸에 있을수록 내 기억이 없어지는 걸까요?”

“하윤 씨.”

하준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요? 이대로 기억이 다 없어져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김민석은 사라지는 거예요?”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솟고 숨통이 턱 막혔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김민석은 어느새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고 있었다.

“진정해요. 하윤 씨 지금 패닉 상태예요. 숨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뱉고… 옳지. 그렇게.”

김민석은 하준서의 차분한 목소리와 등을 쓰다듬는 침착한 손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가 말하는 대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한참. 꽉 막혔던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했다. 몸의 떨림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준서는 인내심 있게 김민석을 달래고 또 달랬다. 그의 속삭임은 김민석이 완전히 안정을 찾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디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 한잔할래요?”

“…네.”

한참 만에 겨우 안정을 되찾은 김민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기 말고요.”

“그래요. 일단 노량진부터 벗어나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김민석의 마음을 읽은 하준서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곧 유턴해서 노량진을 등 뒤에 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 ❖ ❖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후, 김민석은 하준서를 설득해 먼저 보냈다. 그런 후 아파트 근처의 정신의학과를 검색해 가까운 곳을 하나 찾아냈다. 본래는 퇴원했던 큰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김민석의 몸이 거기에 없다니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기억 상실이나 해리성 장애로 오해받을 수 있겠지만, 자신 스스로는 그저 몸이 바뀌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전 노량진에서의 일로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에게는 분명 뭔가 문제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한 김민석은 한참이나 병원 간판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들어가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서 대체 뭐라고 할 것인가. 조금 전 하준서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모조리 털어놓으면 의사는 뭐라고 할까? 만약 내가 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한참이나 길거리에 선 채 병원 간판을 올려다보던 김민석은 결국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 하준서가 이상한 거다. 아니, 대단한 거다. 만약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장 병원에 가 보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병원에서 뇌 MRI까지 찍어 본 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서 뇌부터 검사해 달라고 했을 거다. 뇌에 이상이 있지 않고서야 김민석 자신의 기억까지 지워지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만한 물건은 김민석의 핸드폰뿐이었다. 그 전화에 연결음이 울린다는 것은 김민석이 실존함을 의미했다. 핸드폰이 꺼져 있지 않고 계속 켜져 있는 걸 보면 누군가 꺼지지 않게 충전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저는 김민석입니다. 지금 핸드폰 가지고 계신 분 연락해 주세요.

김민석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다시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그러고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막상 걸어서 가려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지만 빨리 아파트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고 집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싫어서 계속 걸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마침내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서하윤의 집을 올려다보자니 마음이 또 복잡해졌다.

아파트 입구를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하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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