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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28화 (28/125)

28화

“씻고 나올게요.”

김민석은 하준서의 눈빛과 다정한 손길을 감당하기 어려워 자리를 피했다.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켜고 뜨거운 물살 아래로 들어갔다.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어젯밤의 흔적이 물살 아래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김민석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줄줄 내려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미쳤구나, 김민석.”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어제 최상혁과 섹스해 버린 것도, 방금 하준서의 눈빛에 마음이 살짝 흔들려 버린 것도, 모두 미친 짓이었다. 이건 자신의 몸도 아니고,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두 남자의 애정도 김민석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서하윤의 것이었다.

“애정 결핍도 정도가 있지….”

김민석은 자조했다. 애정 결핍.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조금만 애정만 주어져도 거기에 죽자 사자 매달리게 되는 것. 그 애정에 흠뻑 취해 정신이 나가 버리는 것. 물론 김민석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최상혁과 하준서의 관심과 애정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신의 것도 아닌데.

어쨌든, 오늘에야말로 진짜 몸을 찾아볼 때였다. 설혹 서하윤의 몸을 빼앗긴다고 해도 일단 자신의 몸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몸을 찾은 후에 어떻게 할지는… 일단 찾고 난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김민석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커먼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몸을 만났을 때, 선택할 여지도 없이 저절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게 되어 버린다면…. 지금 누리게 된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면….

‘과연 나는 김민석의 몸으로 남은 인생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김민석은 치솟는 암담함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하준서는 과일을 예쁘게 깎아 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어서 먹어요.”

하준서가 권했다. 마침 뜨거운 샤워를 한 뒤였기에 시원한 과일이 당겼다. 김민석은 사양하지 않고 과일을 찍어 먹기 시작했다. 하준서가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하준서는 서하윤에게 이것저것 챙겨 먹이는 게 상당히 즐겁고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서하윤을 사랑한다고 하더니, 그가 하는 행동이나 눈빛을 보면 절대 빈말로는 안 보였다.

‘좋겠다, 서하윤.’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능력이나 외모를 떠나서, 누군가의 마음과 애정을 얻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서하윤은 그런 사람을 둘이나 가지고 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오늘은 뭐 하고 놀까요?”

“어…. 전 오늘 병원에 가야 해요.”

“병원? 어디 아파요?”

“아뇨. 최상혁 씨가…. 정신과에 다녀오래요.”

“…아하….”

“그… 기억 상실인지 해리성 장애인지 어쨌든 고쳐야 한다고…. 아무래도 최상혁 씨는 몸이 바뀌었다는 내 말은 안 믿나 봐요.”

김민석은 무거운 눈으로 말하며 하준서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하준서라고 그 말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흠….”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김민석을 빤히 응시하다 입을 뗐다.

“그래서, 본래 이름이 뭐라고요?”

김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들어줄 태도를 취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막상 이야기하려니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서하윤의 인생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반, 그래도 몸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이 반이었다.

김민석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뗐다.

“저는… 김민석이라고 해요. 올해 스물두 살이고, 신기하게도 서하윤이랑 생일이 똑같아요.”

“김민석이요…. 그럼 김민석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어디 살고요? 가족은 있어요?”

“김민석은…, 저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라 가족이 없어요. 노량진에 있는 고시원에 살고요. 취업하려고 노력하면서 아르바이트해서 먹고살아요. 생긴 건…. 서하윤처럼 이렇게 잘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해요.”

“그렇군요. 그래서 그때 노량진으로 가 달라고 했군요.”

“네. 맞아요.”

김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준서의 표정을 살폈다. 미소가 지워진 그의 얼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웠다.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읽을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상대방이 진지하게 들어주니 용기가 생겼다. 김민석은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쩌다가 서하윤 몸에 들어왔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병원에서 깨어나니까 이미 이 몸이었어요. 서하윤이 건물에서 떨어져서 의식 불명이었다고 하니까, 아마 내 몸도 그쯤에 사고 같은 걸 당해서 의식 불명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같은 병원에 혹시 내 몸이 입원해 있나 찾으려고 했는데….”

“때마침 최상혁과 내가 들이닥친 거군요.”

“네. 맞아요.”

“그러고 보니 그때 나한테 부탁했었죠. 같은 병원에 김민석이라는 환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김민석은 반색했다. 하준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알아봤었어요, 그거.”

뜻밖의 대답에 김민석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막상 자신의 몸의 행방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시커먼 두려움이 마음을 덮쳤다.

“그래서… 거기 있어요?”

김민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준서가 잠시 그런 김민석을 응시하다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없었어요.”

“응급실에 들어오거나, 입원해 있거나, 아니면 이미 퇴원했다거나….”

“다 알아봤어요. 하윤 씨가 병원에 실려 들어간 시점부터 시작해서 퇴원할 때까지. 적어도 그동안은 김민석이라는 환자는 없었어요.”

“…그렇…군요….”

김민석은 바짝 움츠렸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이 탁 풀리며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냥… 복잡했다.

“전화를 한번 해 보지 그래요.”

“네?”

“김민석 핸드폰에 전화는 해 봤어요?”

“해 봤어요.”

김민석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걸어도 안 받더라고요. 그래서 핸드폰 주인이니 연락 달라고 문자도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네요.”

김민석은 최상혁이 준 새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새로운 전화나 문자 등은 일절 없었다. 김민석은 핸드폰을 보며 다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지금 다시 걸면 혹시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었다.

“한번 다시 걸어 봐요.”

하준서가 마음을 읽은 것처럼 권했다.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준서가 보는 앞에서 본래 자기 핸드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살짝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만약 김민석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긴장을 풀라는 얘기 같았다. 김민석은 크게 호흡하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다.

결국 성과는 없었다.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은 채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안 받네요.”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지금 안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러게요. 안 받네요. 그런데 그게 김민석 전화번호라고요?”

하준서가 핸드폰에 떠 있는 번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서가 묘하게 웃었다.

“아마 못 받을 상황이거나 하겠죠.”

하준서가 안심하라는 듯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김민석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오늘 병원에 갔다가 김민석의 행방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병원에는 없었다고 하니 찾을 길이 막막해졌다. 역시 고시원으로 가 봐야 하는 걸까? 하지만 만약 김민석의 몸이 멀쩡하게 고시원에 있다면 핸드폰을 안 받을 리가 없는데….

혹시… 김민석의 몸속에 서하윤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김민석의 몸은 이미 죽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졌다.

머릿속에 고시원 침대 위에 고독사해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났다.

그래, 찾아올 사람도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는 김민석의 몸이라면 침대 위에서 돌연사한다고 한들 누가 알아차리겠는가.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서 연락은 몇 번 오겠지만,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만두려나 보다 하고 금세 포기해 버릴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몸은 좁고 낡은 고시원 침대 위에서 부패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민석은 그런 상상을 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윤 씨. 하윤 씨? 괜찮아요?”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에게 반쯤 끌어안긴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만약에… 내 몸이… 김민석이 이미 죽은 거면 어떡하죠?”

김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두려움을 토로했다.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양팔로 김민석을 꽉 끌어안았다. 위로하듯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너무 포근하고 다정해서, 김민석은 그의 품에 파고들다시피 한 채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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