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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27화 (27/125)

27화

잠에서 깬 것은 잠결에 연이어 귀를 괴롭히는 벨 소리 때문이었다. 현관 벨 소리가 몇 번 울려도 몸과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무시했더니 이번에는 전화벨이 울렸다.

“…으으….”

현관 벨과 전화벨이 동시에 울리니 도무지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김민석은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들어 보니 ‘준서 형’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예상하건대 현관 벨을 누르고 있는 사람도 아마 동일인일 것이다.

“여보세요….”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예요. 잠이 깊이 들었었나 보네. 현관 벨을 아무리 눌러도 도통 반응이 있어야 말이지. 어서 문 열어 줘요. 맛있는 거 사 왔어요.

자기 할 말을 다 한 하준서가 전화를 뚝 끊었다. 그리고 현관 벨을 계속 눌러 댔다.

“하아….”

김민석은 한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함께 잠들었던 최상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갔다. 그야말로 기절해서 푹 자 버린 모양이었다.

어제 섹스 후에 바로 잠든 탓에 완전히 헐벗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골반이며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엉덩이는 얼얼한 데다 쓰리기까지 했다.

어젯밤의 격렬한 섹스를 떠올린 김민석은 뜨거워진 볼을 손등을 쓸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바지와 셔츠를 대충 끄집어내 입었다. 그 와중에도 현관 벨은 연신 울리고 있었다.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현관문을 열자, 하준서가 빙긋 웃으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커피 두 잔이 꽂힌 트레이와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비닐 봉투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에 반응해서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잔 거예요? 그러다 몸 상해요.”

하준서가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장난스레 타박했다. 그는 곧장 식탁에 커피와 비닐봉지 속의 샌드위치를 세팅했다. 식탁 의자까지 빼 주고는 멀뚱히 서 있는 김민석을 끌어다 자리에 앉혔다.

“얼른 먹어요.”

열정적인 권유였다. 김민석은 잠시 자신의 앞에 놓인 샌드위치를 응시하다가 집어 들어 먹기 시작했다.

입 안에 씹히는 빵은 부드러웠고 채소는 상큼하고 아삭아삭했다. 햄과 치즈, 소스의 맛이 잘 어우러졌다. 한입 씹어 삼키고 빨아 당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적당한 쌉쌀함과 산미가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김민석은 그때부터 숨도 쉬지 않고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어 치웠다.

“맛있어요?”

“…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를 깨끗이 먹어 치운 후였다.

“난 아침 먹었으니까 이것도 먹어요.”

하준서가 작게 웃으며 자신의 샌드위치도 내밀었다. 김민석은 어느새 든든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배불러요.”

“흐음- 그래요. 하긴 과하게 먹어서 좋을 건 없지.”

하준서가 다시 샌드위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식탁에 턱을 괸 채 생글생글 웃으며 김민석을 바라보았다. 김민석은 민망하고 난감해졌다. 바로 어제 하준서와 차에서 이런저런 짓을 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최상혁에게 끌려간 후에 무슨 일을 했을지 충분히 예상하고 남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상혁한테 박혔어요?”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 먹던 김민석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만 사레가 들렸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니 하준서가 혀를 차며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김민석은 그가 내민 티슈를 입에 댄 채 몇 번이나 기침을 한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결국 따먹혔나 보네. 어땠어요? 좋았어요?”

“…….”

김민석은 침묵을 택했다. 하준서는 아쉬운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커피에 꽂힌 빨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탄하듯 말했다.

“기억을 잃어서 정신적으로 처녀나 다름없는 상태잖아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고민한 줄 알아요? 하윤 씨 처녀 구멍을 따먹고 싶기는 한데, 내 입장이 좀 그렇잖아요. 아무래도 최상혁보다는 내가 뒤에 만났으니 따지고 보면 내연남 아니겠어요? 본처 몫인 처녀 구멍까지 탐내는 건 욕심이 과한 거겠죠.”

처녀 구멍, 처녀 구멍 하는 소리에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았다.

“그… 이상한 단어 좀 안 쓰면 안 돼요?”

김민석이 썩은 표정으로 말하자, 하준서가 재밌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처녀 구멍을 처녀 구멍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김민석은 하준서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저 하얗고 섬세한 미모로 그런 상스러운 말을 잘도 주절거리는 것이 신기했다.

“아무튼… 어제 하윤 씨 구멍 맛만 살짝 보고 떠나보낸 후에 밤새도록 얼마나 후회했게요. 어차피 기억도 없는 마당에 본처면 어떻고 내연남이면 어때. 먼저 따먹는 놈이 임자지. 그냥 차에서 확 덮쳐서 처녀 구멍 따먹어 버리는 건데, 하면서 후회했어요. 이제는 이미 늦어 버렸지만….”

하준서가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길게 가지 않았다. 그는 이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어쨌든 최상혁한테 처녀 딱지 떼는 건 양보했으니까 나도 이제 안 참아도 되는 거죠?”

“안 돼요.”

김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어제 어쩌다 보니 최상혁과 끝까지 가 버렸지만…. 그리고 하준서와도 여러 가지를 해 버렸지만, 그 이상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다. 최상혁과 해 버린 건 원래 그와 애인 사이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바람을 피우다 들킨 상대와 또 잔다니! 절대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 안 돼요? 최상혁한테는 대 줬잖아.”

하준서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최상혁 씨는…. 원래 내 애인이었다면서요. 하준서 씨는 내 바람 상대고요. 바람피우다가 들킨 것도 미안할 일인데, 지금 와서 또 하준서 씨랑 그런 짓을 하면 내가 완전 쓰레기죠.”

“이미 바람피운 시점부터 쓰레기인 건 확정인데요? 그리고 하윤 씨가 먼저 나 꼬셨잖아요. 먼저 자자고 들이댄 것도 하윤 씨였는데….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요?”

“…내가 먼저 꼬셨다고요?”

“그래요. 하윤 씨가 가만히 있는 나한테 접근해서 유혹했어요. 난 거기 홀랑 넘어가 버렸고. 그렇게 하윤 씨한테 푹 빠져서 몸도 마음도 바치고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다 바쳐 가며 충성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나오면 내가 가슴이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하준서는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가볍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선물도 열심히 갖다 바쳤는데 알고 보니 바람 상대였다. 거기에서 이미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준서가 서하윤을 두들겨 패거나 뺨을 후려갈기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등의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건…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김민석은 자신이 서하윤이 아님에도 일단 진심으로 사과했다. 서하윤의 몸에 들어 있다 보니 괜스레 죄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 미안해요.”

고개까지 숙이며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자, 하준서가 잠시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사과한다고 내가 떨어져 나가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요.”

“…그렇다고 이렇게 지낼 수도 없잖아요. 계속 서하윤 바람 상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 하준서 씨, 잘생기고 능력 있고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왜 고작 바람이나 피우는 서하윤한테 묶여 있으려고 해요? 세상에 멋지고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김민석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준서는 좀 변태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잘생기고 능력 있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 남자라면 원하는 사람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사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바람 상대가 되어 가며 서하윤에게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왜요. 바람 상대인 거 알게 됐는데도 이렇게 하윤 씨한테 매달리는 거, 구질구질해 보여요?”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알아요. 구질구질한 거. 그래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요.”

“…….”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뱉는 고백에 김민석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돈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고, 본처도 따로 있고, 감히 나 정도 되는 남자를 바람 상대로 써먹는 서하윤인데…. 그래도 사랑하게 돼 버렸는데 어쩌겠어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기라도 해야죠.”

“하준서 씨….”

하준서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정리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에는 성적인 뉘앙스 대신 다정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얘기했었지만… 나는 진짜 서하윤이 아니에요. 아마 내 몸을 찾으면 어떻게 방법을 찾아서 다시 돌아가게 될 거예요. 이후 하준서 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진짜 서하윤이 돌아오면 그때 의논할 일인 것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제삼자로서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준서 씨. 서하윤 같은 사람한테 미련 가지지 마세요. 하준서 씨 말대로 돈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고, 바람이나 피우는 나쁜 사람이잖아요. 하준서 씨는 더 좋은 사람 만날 자격 있어요.”

“…….”

하준서가 말없이 손을 뻗어 눈물점과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키 어려운 깊은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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