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뭐 하는 거야?”
짧은 침묵 후.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최상혁은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맞을 준비를 하는 김민석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내가 널 때리기라도 할까 봐?”
“그, 그게…. 화가 나 보여 나도 모르게 그만….”
“하-!”
최상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 바람에 잘 정리되어 있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김민석이 자신을 때릴 거라 오해한 데에 몹시 화가 나 보였다. 그 반응으로 볼 때, 아무래도 최상혁은 서하윤에게 손을 댄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모양이다.
애인에게 손을 대는 사람으로 오해한 꼴이 되어 버렸다. 김민석은 곱빼기로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
최상혁이 대번에 반문했다. 김민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비록 자신이 한 짓은 아니지만 어쨌든 서하윤은 최상혁을 두고 바람을 피웠고, 그걸 들켰고, 들킨 후에도 하준서와 이런저런 짓을 벌였다. 심지어 애인을 패는 사람 취급까지 했다.
“말해 봐. 대체 뭐가 미안한데?”
최상혁이 다시 캐물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꼬였다.
“그, 그냥 다요. 다 미안해요.”
“하-! 진짜….”
최상혁이 다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화나고 답답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끼어들었다.
“적당히 해 두지? 하윤 씨가 곤란해하잖아.”
“끼어들지 마.”
최상혁이 말했다. 거의 동시에 김민석 역시 끼어들지 말라는 뜻으로 하준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여기서 하준서가 끼어들어 봐야 최상혁의 화만 더 돋우는 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떻게 알고 쫓아온 거야? 한창 즐기고 기분 좋았는데 다 잡쳐 버렸잖아.”
하준서가 말했다. 김민석은 그제야 의문을 떠올렸다. 이곳은 서울 외곽 국도의 이름 모를 샛길이었다. 그런데 최상혁이 어떻게 귀신처럼 알고 나타난 걸까?
“아, 참. 그새 개목걸이를 채워 놨더만. 그걸로 쫓아왔군.”
하준서가 금세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목걸이 같은 건 없었다. 의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하준서가 귓가에 속삭였다.
“핸드폰.”
“아….”
김민석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최상혁이 준 새 핸드폰. 거기에 위치 추적 앱을 깔아 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갈 때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당부했었지….’
김민석은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최상혁을 슬그머니 살폈다. 그러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한쪽 눈썹을 살짝 들썩인 그가 손을 슥 내밀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몸을 움찔거리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최상혁은 내민 손으로 김민석의 팔뚝을 낚아채 자신의 옆으로 잡아당겼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하준서의 팔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따라와.”
그는 짧게 명령조로 말하며 하얀 포르쉐 뒤에 주차된 검은 차를 향해 걸었다. 김민석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미소 지으며 서 있는 하준서와, 뭔가로 세게 내리친 듯 트렁크 부분이 움푹 파인 하얀 포르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최상혁의 뒷모습을 차례로 보았다.
최상혁이 김민석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차 유리창 앞으로 하얀 포르쉐와 하준서가 보였다. 하준서가 잘 가라는 듯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손을 마주 흔들려고 하다가 최상혁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른 손을 아래로 감추었다.
차가 서울 시내로 접어들 때쯤에는 이미 밖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차 안에는 내내 침묵만 감돌고 있었다. 김민석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 장난을 치거나, 조수석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거나 하며 딴청을 부렸다.
마침내 아파트에 도착해서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김민석은 더는 딴청을 부리거나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최상혁이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잡고 선 채 김민석을 응시해 왔기 때문이다.
최상혁의 강렬한 눈빛 아래, 김민석은 마치 벌거벗겨진 느낌이었다.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온몸의 감각 역시 민감해졌다.
아까 하준서가 거칠게 다룬 유두가 셔츠에 쓸려 아릿하니 아팠다. 손가락으로 들쑤셔진 뒤 역시 최상혁의 검은 눈에 노출될 때마다 멋대로 옴찔거렸다. 아랫도리를 벗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으니 사정한 건 당연히 알아챘을 테고…. 설마 뒤를 쑤신 것까지 들키진 않았겠지?
김민석은 속으로 최상혁이 어디까지 눈치챘을지에 대해 가늠했다. 뭐랄까…. 서하윤이 최상혁과 먼저 2년이나 관계를 맺다가 하준서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일까. 김민석에게 있어 최상혁은 본처 같은 느낌이었다. 본처에게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벗어.”
한참을 침묵하며 응시하던 최상혁이 난데없이 명령했다. 김민석은 흠칫 놀라며 동그란 눈으로 최상혁을 쳐다보았다.
“벗으라고 했어.”
최상혁이 다시 묵직하게 말했다. 김민석은 마치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셔츠 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물었다.
“뭐, 뭐를 벗어요?”
말을 하면서도 바보처럼 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다.”
최상혁이 짧게 말했다. 말은 그것뿐이었지만 강렬한 눈빛이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벗으라고 말이다.
“지, 지금요?”
“…….”
“여기서요?”
“…….”
“전부 다요?”
“…….”
더듬더듬 물어도 최상혁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죽고 싶냐는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물론 최상혁이 서하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오늘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때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최상혁의 명령과 눈빛은 거부하기가 어려웠다. 그에게서는 그만큼 강력한 포스가 느껴졌다.
김민석은 한참을 망설이다 셔츠 자락을 잡았다. 그러면서도 최상혁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벗겨 줘야겠어?”
최상혁이 마침내 물었다. 김민석은 최상혁이 옷을 벗겨 주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아뇨. 제가 벗을게요.”
김민석은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꾸물꾸물 셔츠를 벗었다.
툭.
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최상혁의 눈이 유독 새빨갛게 부풀어 있는 한쪽 젖꼭지에 꽂혔다. 하얀 가슴 위에 자리 잡은 두 개의 젖꼭지 중에 하나만 유독 새빨갛게 부푼 이유야 자명했다. 김민석은 이유 모를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며, 손바닥으로 석류알처럼 빨개진 젖꼭지를 가렸다.
“바지.”
최상혁이 다시 명령했다. 김민석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생각하며 입술을 씹었다. 그래도 최상혁에게 거역할 용기는 없었다. 실제로 서하윤은 최상혁에게 죄인이었고, 죄인을 벌하는 건 피해자의 권리였다.
김민석은 최대한 꾸물거리며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런 다음 바지를 발밑으로 끌어 내려 벗었다. 이제 남은 건 속옷 하나였다. 김민석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못 이겨 얼굴을 붉혔다. 한 손으로는 석류알처럼 붉어진 젖꼭지를, 나머지 한 손은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가린 채 최상혁에게 물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너야말로 딴 새끼한테 다리 벌리는 짓은 그만하면 안 되나?”
최상혁이 빈정거렸다. 김민석은 해명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서 벗어. 내가 찢어서 벗겨 버리기 전에.”
분명 최상혁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묘한 믿음은 굳건했다. 그러면서도 또 묘하게 타고 오르는 두려움과 이 상황이 주는 긴장감에 몸이 옅게 떨렸다. 김민석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내려 속옷마저 벗어 버렸다.
완전히 나신이 된 채, 김민석은 몸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며 최상혁을 쳐다보았다.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최상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서 헐벗은 김민석의 나신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의 검은 눈이 유독 도드라지게 빨간 한쪽 젖꼭지와 흠뻑 젖었던 흔적이 적나라한 성기를 차례로 스쳤다. 김민석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괜히 서러워졌다. 눈가가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새끼랑 뭐 했는지 말해 봐. 하나도 빼놓지 말고.”
최상혁은 이쯤에서 봐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명령에 김민석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가는 더욱 뜨거워져서 이를 악문 채 눈물을 참아야 했다. 서하윤의 몸으로 있는 이상 최상혁에게 잘못한 것이 분명함에도 괜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하준서 씨가 입으로 해 줬어요.”
간신히 말문이 터졌다. 거의 속삭이듯 웅얼거렸지만 조용한 집 안이라 최상혁에게는 충분히 잘 들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하준서 씨가 자기도 입으로 해달라고 해서…. 해 줬어요.”
자신이 아까 한 짓을 고스란히 고해바치며, 김민석은 마치 자신이 부모에게 야단맞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세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쾌감을 느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입으로 해 주는데 하준서 씨가 갑자기 뒤를 손가락으로…. 그리고 젖꼭지를 세게 꼬집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성기가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경악했다. 자신이 남과 저지른 부정을 고백하며 흥분하는 몸이라니.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