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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8화 (18/125)

18화

택시를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하얀색 포르쉐가 다가와 멈춰 섰다. 보는 순간 김민석은 운전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자 보이는 것은 역시나 하준서였다.

“어디 가요?”

“…네.”

김민석은 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하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권했다.

“타요. 가는 데까지 데려다줄게요.”

“됐어요. 택시 타고 갈게요.”

김민석은 딱 잘라 거절했다. 하준서는 처음부터 시종일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침대 위에서 겪었던 사이코 기질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포르쉐를 피해 뒤쪽으로 몇 걸음 걸으니 차가 후진을 했다. 이번에는 앞으로 피하니 앞으로 쫓아왔다.

빵-! 빵-!

하준서 때문에 길이 막힌 차들이 연신 짜증 섞인 클랙슨을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길옆에 선 하얀 포르쉐와 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김민석에게 쏠렸다.

“타요, 시간 끌지 말고.”

하준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김민석이 곤란해지는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김민석은 결국 포르쉐에 올라탔다. 하준서가 다정하게 안전띠를 매어 주었다.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안전띠까지 매 준 하준서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노량진이요.”

“갑자기 웬 노량진?”

“…….”

김민석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김민석의 집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노량진 어디로 가면 돼요?”

하준서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그냥 노량진 아무 데나 세워 주면 돼요.”

김민석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준서가 운전하다가 이따금 힐끗거리며 시선을 던졌지만, 김민석은 모른 체했다. 그러다 결국 하준서 쪽에서 말문을 텄다.

“나한테 화났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런 게 어딨어요. 화가 났으면 난 거고, 안 났으면 안 난 거지.”

김민석은 그 말을 듣고 하준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침내 자신을 쳐다봐 주는 게 기쁘다는 듯 하준서가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연한 섬세한 미남의 눈웃음은 참으로 그럴듯했다.

“그쪽이 날 묶어 놓고 희롱했잖아요. 강간하려고 했고.”

“희롱이라니…. 심지어 강간이라뇨.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을 하니까 나도 섭섭하네….”

하준서가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저 기억을 잃은 하윤 씨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 노력했을 뿐인데요. 실제로 엄청 좋아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엉덩이 맞으면서 잔뜩 싼 거.”

“아, 제발 그런 얘기는 좀 하지 마시죠! 벌건 대낮부터.”

“부끄러워요? 그런 거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요.”

하준서의 말에 애써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뒤로 묶인 손목과 엉덩이를 치켜든 채 침대에 처박힌 수치스러운 자세. 그리고 엉덩이를 후려치던 하얀 손. 엉덩이를 맞을 때마다 묘한 쾌감에 몸을 떨던 자신. 그리고 격렬했던 절정….

“말해 봐요. 좋았죠?”

하준서가 손가락으로 김민석의 손등을 은밀하게 문지르며 물었다.

남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몽땅 내려 둔 채 까놓고 말하자면…. 그래, 솔직히 좋았던 것 같다. 그런 걸 좋아한다니 말도 안 되는 취향이지만 일단 좋았다. 아마도 김민석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건 다 서하윤의 몸이 야해 빠져서 그런 거다. 엉덩이를 얻어맞으면서도 성기를 빳빳이 세운 채 앙앙 울다니. 다 이 몸이 야한 탓이었다!

김민석은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하준서는 그 마음 다 안다는 듯 빙긋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김민석은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팍 빼 버렸다.

차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김민석을, 하준서는 굳이 건들지 않았다. 하준서가 침묵하니 김민석은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생각이라 봐야 진짜 김민석의 몸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머리 복잡한 고민뿐이었다.

이대로 서하윤의 몸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도통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두 남자를 끼고 살아야 할 텐데 그건 어쩌지? 게다가 만약 두 남자가 떨어져 나가면 서하윤은 다시 빈털터리가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집 명의가 서하윤 앞으로 되어 있다고 했으니 그거 하나만으로도 평생 먹고살 수 있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한 김민석은 이내 표정을 찌푸렸다.

아니, 애초에 이건 나 혼자 생각인 거고…. 서하윤의 입장은 어떨까? 만약 서하윤이 진짜 김민석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태라면 그는 자신의 몸을 되찾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다. 생긴 것도 그저 그런 외모에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어, 집이라고 있는 건 좁아터진 고시원 한 칸. 가족도 없어, 제대로 된 친구도 없어, 제대로 된 직장도 없어. 그런 몸을 가진 채 계속 살고 싶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김민석이 이대로 서하윤으로 남고 싶어 해도, 진짜 서하윤이 자신의 몸을 내놓으라고 하면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주인이 내놓으라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돌려줘야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어쩌면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김민석은 점점 노량진에 가까워지는 도로를 바라보는 것이 괴로워졌다. 이대로 진짜 서하윤을 마주쳐서 몸을 뺏은 도둑 취급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표정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하준서가 물었다. 그는 조용히 운전하는 와중에도 시시때때로 김민석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어디 아프냐고 묻는 하준서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그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가슴속에 작은 감동이 퍼졌다.

‘나는 진짜 정에 굶주린 놈이구나.’

김민석은 속으로 자조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호의가 진짜 내 것이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잃게 될지라도 조금만 더 누려 보고 싶다고 말이다.

“…배고파요.”

김민석은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듯 말했다. 다 큰 사내가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조금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팠어요? 진작 말을 하지. 우리 뭐 먹으러 갈까요? 뭐 먹고 싶어요?”

하준서가 기쁜 듯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먹고 싶다고 하면 뭐든 다 사 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음….”

김민석은 곧장 고민을 시작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형편으로는 먹어 볼 일이 없었던 값비싼 음식들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한우나 스테이크, 파스타, 피자 따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점심부터 고기 먹자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려나? 파스타는 데이트할 때 많이 먹는 음식 아닌가? 남자 둘이 앉아서 피자만 먹는 것도 좀 그렇고….’

“소고기 어때요? 점심부터 좀 이른 것 같기는 하지만 하윤 씨 몸보신도 좀 할 겸.”

하준서가 제안했다. 소고기라니! 마음에 쏙 드는 제안이었다.

“조, 좋아요.”

김민석은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광대가 살짝 승천한 것이 티가 났던지, 하준서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김민석은 민망함에 못 이겨 손등으로 볼을 문질렀다. 그제야 겨우 승천했던 광대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준서가 차를 돌렸다. 아는 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우일까? 하준서는 부자니까 당연히 한우겠지?’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비싼 소고기에, 심지어 한우라니!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김민석 인생 22년 동안 한우를 먹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자의 뇌란 단순해서, 한 가지 욕망에 꽂히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 법이다. 벌써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김민석은 안달 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목적지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커다란 한옥 앞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식당이었다. 역시나 한우 전문점이었다!

척 보기에도 최고급 식당이었다. 생활 한복을 입은 종업원이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마룻바닥을 걸어 종업원이 열어 준 창호 문을 넘어 들어선 곳은 아담하게 장식된 한옥식 방이었다. 이런 곳은 TV에서나 보았지 직접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김민석은 초짜 티를 내지 않고 담대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하준서가 메뉴판을 내밀면 어쩌나 살짝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자신이 알아서 주문했다. 내심 안도한 김민석은 하준서가 치워 놓은 메뉴판을 슬쩍 펼쳐 보았다. 그리고 메뉴판에 써진 숫자를 보고 기겁하고 중얼거렸다.

“졸라 비싸네….”

김민석의 중얼거림에 하준서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머쓱해진 김민석은 메뉴판을 본래 자리에 돌려놓으며 입을 비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상 가득 음식이 차려졌다. 상차림 하나하나가 다 군침이 돌았다. 뒤이어 소고기가 나오자 입에 고이는 군침이 절정에 달했다. 김민석은 젓가락을 쥐었다 놓았다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하준서가 눈웃음을 치며 구경하고 있었다.

치익-

불에 고기 익는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다.

“얼른 먹어요.”

하준서가 불판에 올린 고기를 뒤집는가 싶더니 이내 김민석의 접시에 놓아 주었다. 소고기는 원래 겉만 살짝 익혀 먹는 걸 알고는 있었다. 김민석은 사양할 것도 없이 얼른 고기를 집어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우물, 우물, 우물.

딱 세 번 씹으니 고기가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 사라졌다. 혀에 남은 감칠맛 가득한 고기 맛과 육즙이 침샘을 자극했다.

“어때요? 맛있어요?”

“맛있어요!!”

김민석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풋-!

하준서가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잘게 들썩이며 웃는 것을 보니 웃음이 제대로 터진 것 같았다.

“왜요. 맛있는 거 맞잖아요.”

김민석은 속으로 자존심이 좀 상하면서도 아닌 척 불퉁하게 말했다.

“네. 맛있는 거 맞죠.”

하준서가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기 한 점을 불판에 앞뒤로 구운 다음 김민석의 접시에 올려 주며 권했다.

“많이 먹어요. 그래야 몸보신이 되죠.”

하준석은 그 이후로 고기 굽는 데 열중했다.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김민석이 고기 한 점을 먹고 다른 밑반찬에 눈길을 슥 한번 주기만 하면 그걸 앞접시에 올려 주었다. 이리저리 손을 뻗거나 고기를 구울 필요도 없이 앞접시에 대령되는 것이, 마치 임금님 수라상을 받는 것 같았다.

“…하준서 씨는 안 드세요?”

한참을 우걱우걱 먹어 대던 김민석은, 배가 약간 불러 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김민석에게 고기를 구워 바치고 밑반찬을 덜어 주느라 그는 고기를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하윤 씨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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