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17화 (17/125)

17화

“혼자 실컷 싸고 튀려고?”

최상혁이 눈으로 욕을 하며 물었다. 김민석은 그사이 재빠르게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아 완벽한 방어진을 구축했다.

“너, 너무 급하게 진도를 빼면 관계 형성에 좋지 않아요.”

김민석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너무 빨리 불타면 빨리 꺼진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최상혁이 눈으로 욕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

최상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코피 터지게 섹시했다.

김민석은 이불 김밥이 된 채 저도 모르게 최상혁의 근사한 근육질 상체를 눈으로 더듬었다. 저런 몸이라니…. 남자로서 부러운 건 둘째 치고, 방금 전까지 야한 짓을 했으면서도 저걸 맘껏 만져 보지 못한 것에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 설마 게이였나….’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먹고살기 바빠 연애 한 번 해 본 적이 없다.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데 유난히 거부감이 덜한 걸까?

“화났어요?”

김민석은 눈으로 욕하고 있는 최상혁을 향해서 달래듯 물었다. 잠시 빤히 쳐다보던 최상혁이 코웃음을 치더니 옆으로 내팽개쳤던 와이셔츠를 집어 꿰어 입기 시작했다.

“됐어. 어차피 잠시 들렀던 거라 건드릴 생각도 없었어. 네가 먼저 해 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회의에 늦었는데, 본게임까지 들어갔다가는 오늘 하루 스케줄은 다 펑크 나겠지.”

김민석은 최상혁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딱히 건드릴 생각도 없던 사람을 꾀어내서 야한 짓을 하느라 회의에도 못 가게 만든 꼴이 되어 버렸다.

“최상혁 씨가 먼저 건드렸잖아요….”

김민석이 항변하자, 최상혁이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며 피식 웃었다.

“겨우 키스 한 번에 앞뒤로 젖은 채 싸게 해 달라고 애원한 게 누군데.”

“아, 진짜. 그런 말을 꼭 해야겠어요?”

김민석은 손을 뻗어 최상혁의 입을 막아 버렸다. 최상혁이 한쪽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네까짓 게 지금 내 입을 막느냐는 얼굴이었다.

본래라면 얼른 손을 떼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조금 전의 신체 밀접한 야한 짓 때문인지 최상혁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려도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얼른 옷이나 입어요.”

김민석은 침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양복 조끼와 상의를 주워 주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옷도 찾아서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 낑낑대며 입었다.

속옷과 바지, 셔츠까지 입고 나서야 이불을 벗어 던졌다. 그새 빈틈없는 양복 차림이 된 최상혁은 침대 옆에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김민석이 우물거리고 있자, 최상혁이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내밀었다.

“받아.”

“어… 핸드폰이네요? 제 거예요?”

“그래. 본래 쓰던 건 박살이 나서 새 걸로 샀어.”

“고, 고마워요.”

박살 난 핸드폰 대신 새 기계를 사다 주다니 최상혁의 첫인상과는 영 다른 세심함이었다.

최신 기종의 핸드폰을 손에 넣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모르게 웃으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최상혁이 그의 턱을 잡고 들었다.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그거, 비밀번호 걸지 마. 때마다 검사할 거니까.”

핸드폰에 비밀번호를 걸지 말라니. 심지어 검사를 하겠다니….

“완전 사생활 침해인데요?”

“내 돈으로 샀잖아.”

“아니, 그래도….”

반박하려던 김민석은 최상혁이 또 그 특유의 검고 무거운 눈동자로 욕을 하는 걸 보고 얌전히 입을 닫았다.

“밤에는 돌아올 테니까 나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렇게 말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상혁은, 잠시 생각하는 눈으로 김민석을 응시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 새끼 오면 절대 문 열어 주지 말고.”

여기서 말하는 그 새끼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준서였다.

“네….”

뭐 일단 이 집을 사 주신 집주인이시니까 말을 듣는 게 좋겠지. 그 변태 사이코랑 단둘이 있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다.

최상혁을 배웅한 김민석은 일단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를 정리했다. 야한 짓을 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꼴을 도무지 눈 뜨고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침대가 깨끗해지고 나니 마음이 한결 정갈해진 느낌이었다.

침대를 정리한 후에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샀다고 하더니 완전히 공기계였다. 서하윤은 일단 연락처를 열었다. 딱 하나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최상혁이었다. 그 외에 다른 연락처나 데이터는 일절 없었다.

어쩐지 재미가 없어졌다. 서하윤이 사용하던 핸드폰이었다면 이런저런 사생활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통화나 문자, 메신저 등으로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내 핸드폰!”

김민석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작게 외쳤다. 자신의 핸드폰, 그리니까 김민석의 핸드폰이 있지 않은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핸드폰은 몸과 함께 있을 것이다. 전화를 걸어 보면 누군가 받을지도 몰랐다.

김민석은 신이 나서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

핸드폰을 귀에 대자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화를 누가 받을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약간 무섭기도 했다. 만약 이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가 김민석 자신의 목소리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몸이 바뀐 상대와 통화를 하는 거니까 말이다. 그러면 장소를 정해서 만난 다음, 이 일에 대해 의논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 진짜 김민석의 몸속에 들어간 서하윤이 전화를 받으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몸을 다시 바꿀 방법은 있는 걸까? 만약 다시 몸을 바꾸게 되면 그 이후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좆도 없이 혼자 사는 인생, 그대로 쭉 가는 거지 뭐….”

김민석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하윤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그의 성장사나 개인사 따위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어쨌든 다른 남자에게 빌붙어 먹고살고 있다. 그렇다고 그에 비해 김민석의 인생이 낫다고 할 수가 있을까?

애정을 주고받을 상대도, 우정을 주고받을 상대도, 하다못해 자신이 쓰러지거나 죽으면 달려와 줄 상대도 없는, 말 그대로 외톨이 인생. 가진 것도 좆도 없고 꿈도 희망도 없는 삶. 자신이 죽으면 아마 고독사로 처리될 것이다. 그런 인생이었다. 그에 비해 서하윤은…. 적어도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자신이 일구지 않았을지언정 풍요롭게 누릴 것이 있다.

rrrrr---

“내가 대체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거야?”

김민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김민석으로 돌아가느니 서하윤으로 사는 게 좋을 것 같다니.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안 될 말이었다.

전화는 결국 받는 이 없이 끊어졌다.

핸드폰 주인입니다. 사례할 테니 연락 주세요.

김민석은 자신의 번호로 문자를 보낸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길게 누운 채 팔로 눈을 가렸다.

머릿속이 못 견디게 복잡했다. 차라리 서하윤이 처음 알던 것처럼 금수저 재벌집 아들이었으면 이런 고민,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진짜 서하윤이 나타나 몸을 내놓으라고 해도 줄행랑을 쳤겠지.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김민석은 머리를 거칠게 흐트러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팔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그만 소파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김민석은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를 문질렀다. 그러고 있다 보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일단… 집으로 가보자.”

김민석은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 준비는 간단했다. 드레스 룸에서 재킷을 하나 잡아 걸치고 지갑과 차 키를 챙겼다. 그러고 집을 나서려던 김민석은 잠시 멈칫한 뒤, 차 키를 다시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운전은 할 줄 안다. 하지만 비싼 외제 차를, 그것도 남의 차를 몰고 서울 거리를 누빌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갑에 카드가 세 개나 있는 데다 그중 두 개는 부자 애인들의 것이 아닌가. 택시비 정도는 잘 긁힐 것이다.

김민석은 아파트 정문을 나서 큰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이 못내 복잡했다. 이대로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반, 그래도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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