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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4화 (14/125)

14화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고소한 버터 향과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김민석은 몸을 뒤척이며 입 안에 잔뜩 고인 군침을 삼켰다. 절로 쩝쩝 입맛이 다셔졌다.

맛있겠다…. 맛있겠다….

김민석은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속으로 연신 중얼거리며 군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보니 점점 정신이 맑아졌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돌아본 김민석은 그제야 이곳이 자신의 고시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몸이 바뀌었지.’

새삼 깨달은 김민석은 모던한 감성의 안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활짝 열린 안방 문밖에서 밝은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밖에서는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아주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들어오고 있었다.

김민석은 의아한 얼굴로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걸어 안방 문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그리고 갈색 머리칼까지….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준서였다!

“하준서 씨?”

김민석이 작게 부르자, 하준서가 고개를 돌리더니 빙긋 웃었다.

“일어났어요? 이리 와서 아침 먹어요.”

하준서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접시 위에는 버터가 올라간 식빵과 계란 오믈렛, 방울토마토가 예쁘게 세팅돼 있었다. 하준서는 김민석이 뭐라 할 틈도 없이 의자를 빼주고 자리에 앉힌 뒤, 우유를 따라 주었다.

잠에서 막 깬 뒤라 정신이 조금 멍했다.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김민석도 점점 정신이 맑아졌다.

“하준서 씨.”

“왜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김민석은 제법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준서가 하하 웃더니 거실 쪽을 눈짓했다.

“비밀번호가 바뀌었는지 안 열리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최상혁이 와서 열어 줬어요.”

김민석은 그 말을 듣고서야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기겁하고 말았다. 거실 일인용 소파에 최상혁이 다리를 꼰 채 앉아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최상혁 씨?”

김민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르자, 최상혁이 태블릿 PC에서 눈을 들어 시선을 한번 맞추고는 다시 눈을 내렸다. 태블릿을 연신 훑어 내리고 두드리는 것이 매우 바빠 보였다.

“최상혁 씨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김민석이 묻자, 최상혁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내가 사 준 집에 내가 못 들어갈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김민석은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전자식 키패드에도 마스터키가 있었다. 비밀번호를 뭐로 바꾸든 그것만 갖다 대면 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설마 용의주도하게도 최상혁이 그걸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치사하게….”

김민석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작은 목소리가 거실까지도 들렸는지 최상혁이 코웃음을 쳤다.

“툭하면 혼자 열받아서 현관 비밀번호를 바꾼 게 한두 번이었어야지.”

아무래도 서하윤도 곧잘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현관 마스터키를 가진 것이 최상혁 한 사람뿐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준서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밤에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거다.

“쓸데없는 방법 쓰지 말고 현관 벨을 눌러요. 벨을. 그러라고 있는 벨이잖아요.”

김민석은 들으란 듯 투덜거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얼굴 두꺼운 김민석으로서도 조금 민망해졌다. 일단 먹을 게 있으니 먹어서 나쁠 것 없었다. 김민석은 포크를 집어 들고 하준서가 차려 준 아침을 빠르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버터가 사르르 스며든 식빵은 고소했고, 오믈렛도 부들부들하니 맛있었다. 중간중간 방울토마토를 콕 찍어 입에 넣고 씹으니 상큼하기 그지없었다. 시원한 우유를 곁들이니 마치 고급 호텔 조식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김민석은 우유까지 탈탈 털어 마신 후에야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 싶은 만큼 양껏 자고, 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음식을 먹고 나니 몸도 마음도 못내 만족스러웠다. 거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갔다. 이 시간까지 늘어져라 늦잠을 잘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인생이었다. 물론 저 두 남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잘 먹었어요.”

김민석은 인사를 하고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 두려 했지만, 하준서가 먼저 선수 쳤다. 결국 할 일이 없어진 김민석은 일단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했다. 얼굴에 찬물을 연거푸 끼얹고 폭풍 같은 양치질을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김민석은 화장실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켜 뱃속에 용기를 가득 채웠다. 저 두 남자를 상대하는 데는 확실히 용기가 필요했다.

화장실을 나선 김민석은 드레스 룸에 들어가 편한 옷을 대충 골라 입었다. 드레스 룸을 나서자 하준서는 보이지 않고 대신 최상혁의 모습만 보였다.

“하준서 씨는요?”

김민석이 거실이며 부엌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최상혁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갔어.”

“갔다고요?”

“그래.”

“아니, 이렇게 갈 거면 오기는 왜 왔대….”

하준서가 스스로 간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아침만 차려 먹이고 바람처럼 사라지니 묘하게 어색해졌다. 김민석은 그사이 깨끗하게 정리된 식탁과 싱크대를 슥 훑어보고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상혁과 한 공간에 단둘이 남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변태 사이코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대하기 편한 하준서와 달리 최상혁은 함께 있기 부담스러운 분위기의 남자였다. 이대로 안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일단 손님이라고 왔으니 거실 소파에 앉아 있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최상혁이 우물쭈물하고 서 있는 김민석을 불렀다. 시선은 태블릿에 고정한 채였다. 자꾸 명령조로 얘기하니 반발심이 들었지만, 김민석은 일단 소파로 가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김민석을 옆에 앉혀 두고도 태블릿을 바쁘게 두드리던 그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옆에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바쁘신가 봐요.”

“꽃뱀을 먹여 살리려면 부지런히 벌어야 해서 말이야.”

“지금 말하는 꽃뱀이 설마 저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최상혁의 말에 기가 막혔다.

아니…, 물론 들은 바에 의하면 서하윤은 약간 꽃뱀 같기는 했다. 남자한테 빌붙어 먹고살면서도 돈을 펑펑 쓰고 다니질 않나, 비싼 시계며 차를 아무렇지 않게 선물 받지를 않나…. 심지어 사는 집까지 얻어 쓰고 있다. 이런 걸 꽃뱀, 아니, 제비라고 하기는 한다.

“꽃뱀인 거 뻔히 알면서 옆에 붙어 있는 이유가 뭐예요? 이런 어마어마하게 비싼 집까지 사 주질 않나, 펑펑 쓰고 다닌다는 생활비를 대 주질 않나. 혹시 호구세요?”

맨 끝에 호구냐고 물은 것은 어디까지나 입이 멋대로 뱉어 낸 실수였다. 예상치 못한 말실수에 아차 한 김민석은 슬며시 최상혁의 눈치를 살폈다.

최상혁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든 눈이었다.

“아니, 호구라는 말은 실수였….”

“그래. 호구지. 서하윤 한정해서는 호구가 따로 없지.”

최상혁이 깔끔하게 인정하고 나섰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남자가 그런 말을 하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개같이 번 돈 들이부어 가며 호강시켜 줬더니 딴 새끼나 꾀어내서 붙어먹질 않나. 들키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호구 운운하질 않나. 그런 너를 한 대 패지도 않고 이렇게 곱게 돌보고 있으니 그게 호구라면 호구겠지.”

대단히 슬픈 말인데, 정작 최상혁은 특유의 나직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여상히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은 서하윤이 아닌데도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이런 비싼 집에 비싼 돈 들여가며 먹여 살려 놨더니 딴 남자랑 붙어먹질 않나, 그걸 들키고도 기억이 없다고 뻗대질 않나. 최상혁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어…. 제가 진짜 서하윤이었다면 최상혁 씨한테 너무 미안해서 벽에 머리 박고 죽었을 것 같네요. 아니면 적어도 무릎 꿇고 바짓가랑이 잡은 채로 잘못했다고 싹싹 빌든가요. …물론, 그 전에 그럴 일을 만들지도 않았겠지만.”

훗.

최상혁이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항상 인상 쓰거나 무게 잡는 모습만 보다가 옅게나마 웃는 소리를 들으니 그나마 좀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웃으니까 좀 사람 같네요.”

김민석은 숨김없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상혁이 손을 뻗어 김민석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얽은 채 손가락 끝으로 손목 안의 연한 살을 살살 문질렀다. 그 간질간질한 감각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손깍지만 더욱 세게 잡혔을 뿐이다.

“간지러워요.”

“앙탈 부리기는.”

최상혁이 중얼거리며 김민석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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