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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3화 (13/125)

13화

“윽…!”

곧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가 쏟아졌다. 입술의 살점을 씹어 먹을 듯이 깨물고 뜨거운 혀로 입 안을 거칠게 범했다. 입술을 떼어 내려 했지만, 턱을 쥔 우악스러운 손 때문에 키스를 피할 수도,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으읏… 읍!”

거칠긴 해도 단지 키스였다. 하지만 그 키스 하나만으로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 돈에 몸을 파는 창녀가 된 것 같은 비참함이 밀려왔다. 결국, 눈가가 불로 지진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결국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쥔 손을 적셨다. 잡아먹을 것 같은 거친 키스를 쏟아붓던 최상혁이 움찔하더니 입술을 떼어 냈다. 그의 묵직한 눈이 축축하게 젖은 김민석의 눈과 얼굴에 꽂혔다. 최상혁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너….”

최상혁이 입을 떼는 순간, 김민석은 손을 날렸다.

철썩-!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이 씹새끼야.”

김민석은 손등으로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거칠게 닦아 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최상혁은 혀로 볼 안 살을 훑으며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김민석을 응시하는 최상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놈의 주먹에 몇 대만 얻어맞으면 그대로 골로 갈 것 같은 위협감이 들었다. 하지만 김민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최상혁의 가슴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왜? 싸대기 맞으니까 기분이 더러워? 그럼 쳐! 한번 쳐 봐! 오늘 존나게 얻어맞고 깽값이나 벌어 보게!”

김민석이 치라는 듯 얼굴을 들이밀자 최상혁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까불지 마, 서하윤.”

최상혁은 주먹을 날리는 대신 조용히 경고했다. 지금껏 지켜만 보고 있던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를 잡아 소파에 주저앉히며 그를 뜯어말렸다.

“진정해요, 하윤 씨. 그러다 진짜 맞아서 이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내 얼굴도 아닌데 흉이 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자, 자. 진정하고….”

하준서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김민석을 달랬다.

“하-!”

헛웃음을 토해 낸 최상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 성질을 억지로 참아 누르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김민석은 내심 확신했다. 최상혁이 성질은 더러워도 서하윤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제로 키스하고 겁탈은 할지언정 말이다.

최상혁이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더니 생수병을 꺼내 들이켰다. 김민석은 그사이 젖은 눈가를 깨끗이 닦아 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연신 자신의 등을 도닥이며 달래는 하준서도, 그리고 성질도 입도 더러운 최상혁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 둘을 떨쳐 내고 자신의 본래 몸을 찾아 돌아가야 했다.

“하준서 씨도 안 믿어요, 내 얘기?”

김민석은 사이코 변태지만 겉으로는 친절하고 상냥한 하준서에게 물었다. 하준서가 잠시 웃는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사실이어도 문제, 사실이 아니어도 문제일 것 같아서 뭐라고 말하기가 힘드네요.”

“두 사람이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내가 서하윤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서하윤 역할을 강요하지 마세요. 서하윤 놀이 해 줄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칠 것 없이 현관을 향해 걸었다. 그런 김민석을 하준서가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요?”

“제집에요.”

“여기가 하윤 씨 집이에요.”

“네. 여기는 서하윤 집이죠. 전 김민석이니까 김민석 집으로 갈 거예요.”

하준서가 김민석의 손목을 붙잡은 채 최상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최상혁과 하준서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하준서든 최상혁이든 힘으로는 이겨 먹을 수가 없었다. 김민석은 잡힌 손목을 떼어 내며 부탁하듯 말했다.

“저 그냥 보내 주세요. 어차피 서하윤 기억도 없잖아요. 두 사람은 잘생긴 데다 돈도 많으니까 괜찮은 애인 찾는 거 쉬운 일일 거 아니에요. 굳이 제정신도 아닌 서하윤일 필요가 있어요?”

“말했잖아요. 사랑한다고.”

하준서가 말했다. 사이코 변태 새끼기는 하지만 지금 하는 말만은 제법 진심으로 들렸다.

“당신이 사랑하는 서하윤은 지금 여기 없어요. 진짜 사랑하면 진짜 서하윤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 눈앞에 이렇게 서하윤이 있는데 굳이 그래야 하나요? 난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요.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하윤 씨가 이렇게 서 있네요.”

하준서는 아까 말과는 달리 이 몸 안에 있는 것이 서하윤이라고 확신한다는 투였다.

그래. 역시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어 줄 리가 없지.

김민석은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됐어요. 애초에 믿어 줄 거라 기대도 안 했어요. 아무튼, 난 김민석이고, 집에 가야겠으니까 비켜 주세요.”

“그렇게는 안 돼요.”

“안 돼.”

하준서와 최상혁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빈 생수병을 손으로 잡아 으스러뜨린 최상혁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김민석은 나란히 선 최상혁과 하준서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두 사람은 칼로 찔러도 안 들어갈 것 같은 단단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을 겪었고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했다. 빨리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쉬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을 절대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쉽게 떨어져 나갈 인사들도 아니다. 그건 확실했다. 이럴 때는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그럼 좋아요. 여기 있을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최상혁이 기분 나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들어 보죠.”

하준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은 이 집을 떠나거나 하지 않을게요. 대신 두 사람은 이 집에서 나가 주세요. 두 사람 말에 의하면 여기는 일단 내 집이니까요.”

“이 집은….”

최상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김민석은 얼른 그의 말을 잘랐다.

“네. 네. 이 집은 최상혁 씨가 서하윤한테 사 준 집이니 맘대로 드나들 권리가 있으시겠죠. 물론 나가기 싫으면 안 나가셔도 됩니다. 대신 제가 나가면 되니까요. 내가 나갈지, 최상혁 씨가 나갈지, 둘 중 하나만 고르세요.”

“까부는군.”

최상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뜻밖에 아주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하준서는 방금 전 말의 어디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 다 서하윤의 애인이고 죽어도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하시니, 이 집에 놀러 오는 건 막지 않을게요. 하지만 일단 오늘 밤은 돌아가 주세요. 혼자 조용히 좀 쉬어야겠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눈에 힘을 바짝 준 채 덧붙였다.

“물론 아까처럼 강제로 키스하거나 섹스하려고 들면 더 이상 손님으로 취급 안 할 겁니다.”

결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까 한 짓이 떠오른 듯 하준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얄미운지 몰랐다.

최상혁과 하준서가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고개를 끄덕인 건 하준서였다.

“그래요. 퇴원하고 첫날인 데다 기억도 온전하지 않으니 혼란스럽고 피곤하겠죠.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어요. 내일 다시 올게요.”

하준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민석은 이번에는 최상혁을 쳐다보았다. 최상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굳은 얼굴이었다. 그는 김민석을 빤히 쳐다보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뗐다.

“오늘은 그냥 가 주지.”

대단한 은혜라도 베푼다는 말투였다. 상당히 거슬렸지만 일단 두 사람을 보낼 수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였다. 김민석은 속으로는 크게 안도하면서도 차분한 안색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녕히들 가시고 좋은 밤 되십시오.”

김민석은 내친김에 현관으로 가서 현관문을 손수 열어 주었다. 최상혁은 그 모습이 고깝다는 눈빛으로, 하준서는 눈웃음을 치며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김민석은 두 사람을 향해 성의 없이 손을 두어 번 흔들어 주고는 얼른 현관문을 닫았다.

닫힌 현관문에 등과 머리를 기대고 선 김민석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을 진짜 내보냈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김민석은 현관문에 기대선 채 현관 키패드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완전히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밀번호를 바꿀 생각이었다.

김민석은 그대로 현관문에 기대선 채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 됐다 싶을 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좋았어.”

김민석은 흥겹게 중얼거리고는 현관문 키패드 뚜껑을 열었다. 적혀 있는 방법대로 비밀번호를 바꾸어 버렸다. 이제 두 사람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김민석은 일단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빈 병을 싱크대 위에 올려 두고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점프했다. 조금 아까 이 침대 위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달콤한 휴식이었다.

김민석은 이불을 목까지 올린 채 이리저리 꾸물거리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값비싼 침대와 침구는 그 값을 확실히 했다. 마치 깃털 더미에 파묻힌 듯 온몸이 편안했다. 눈을 감자 곧바로 정신이 까무룩 잠겨 들었다.

잠에 빠져드는 순간 김민석은 생각했다. 혹시 자고 일어나면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긴 잠에서 깨어나 본래의 고시원 좁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건 아닐까?

결과는 자고 일어나 보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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