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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2화 (12/125)

12화

김민석은 잠시 드레스 룸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거울 속 서하윤은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살짝 찡그린 눈가에는 절정의 여운과 수치심이 엉망으로 뒤엉킨 채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너무나 잘난 서하윤의 얼굴은 이 와중에도 기가 막힌 미모를 자랑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촉촉이 젖은 눈동자에는 은은한 색기가 묻어 나오고, 묶였던 자국이 남은 손목의 흔적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색정적인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지.’

김민석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거울에서 시선을 팩 돌려 버렸다.

드레스 룸에서 나가는 데는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다. 김민석은 숨을 깊이 몰아쉬며 평정심을 되돌리려 애썼다. 하지만 아랫도리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쾌감의 여운이 정신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김민석은 잠시 선 채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하준서와 단둘이 집 안에 있었다면 쉽지 않았겠지만, 최상혁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거실로 나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쏟아졌다. 최상혁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고, 하준서는 소파에 앉아 음료를 따르고 있었다.

“목마르죠? 이거 마셔요.”

하준서가 상냥하게 말하며 음료 잔을 내밀었다. 김민석은 유감을 한껏 담아 빈정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난 하윤 씨랑 장난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단 한 번도요.”

하준서는 타격이라고는 전혀 받지 않은 얼굴로 말하며 음료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놀아나더니 꼴좋게 됐군, 서하윤.”

최상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검은 눈은 손목을 물들인 붉은 자국에 꽂혀 있었다. 수치심이 올라왔다. 김민석은 소매를 아래로 잡아당겨 손목의 흔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손목이 감추어진다고 수치심도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피해자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폭력의 일종이에요. 최상혁 씨.”

김민석은 최대한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폭력?”

최상혁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네깟 게 폭력이 뭔지 알기나 아냐는 얼굴이었다.

“이만 나가 주시죠.”

김민석은 하준서를 향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최상혁에게도 시선을 보내며 덧붙였다.

“두 사람 다요.”

최상혁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번에도 네깟 게? 하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 당한 일로 보면 하준서도 상종 못 할 개새끼였지만, 표정만으로도 사람을 무시하고 드는 최상혁 역시 만만치 않게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서하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딴 인간들과 사귀었던 걸까. 설마 외모만 보는 스타일인가? 아무리 인물이 잘났어도 최소한의 인격과 상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김민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서하윤.”

최상혁이 묵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이렇게 정면으로 이름이 불린 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에 긴장이 빡 들어갔다. 김민석은 긴장한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세요.”

김민석의 재촉에, 최상혁이 피식 웃고는 느릿하게 입을 뗐다.

“네가 아직 상황 판단이 전혀 안 되는 모양인데….”

거기까지 말한 최상혁이 하준서를 힐끗 보며 말했다.

“상황 파악을 시키라고 같이 놔뒀더니 쓸데없는 짓거리나 하다니.”

최상혁이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김민석을 다시 보며 말했다.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는 검고 무거웠다.

“서하윤. 너는 내가 사 준 집에서 살면서 내 돈으로 먹고 노는 주제에 부잣집 도련님 놀음을 하며 저 새끼랑 붙어먹었어.”

최상혁이 느릿하게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리를 거세게 후려쳤다.

“그러니 말해 봐. 그런 날 배신하고 딴 새끼랑 몰래 붙어먹은 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요?”

“굳이 말하면 네 집인 건 맞지. 네 앞으로 등기를 쳐 줬으니까.”

“최상혁 씨가 서하윤한테 사 준 집이라는 건가요?”

“그래.”

“내 생활비도 최상혁 씨가 다 대 준 거고요?”

“맞아.”

“나는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백수 신세고요?”

“그런 주제에 돈 뿌리고 다니며 부잣집 도련님 행세하는 게 유일한 취미지.”

최상혁의 대답에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의 몸에 들어온 것이 하늘이 내려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 몸은, 서하윤은 애인이라는 핑계로 다른 남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었다.

서하윤이 게이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든 아니든 간에 놀고먹기 위해 딴 남자에게 빌붙어 다리를 벌렸다. 그런 몸에 들어와서는 좆도 모르고 부잣집 도련님입네 설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하준서가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김민석은 하준서의 손을 뿌리칠 정신도 없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서하윤은… 진짜 집은… 학교는… 가족은….”

김민석은 멍하니 더듬거렸다.

“너한테는 나뿐이야. 네 살길은 나 하나뿐이라고.”

최상혁이 마치 판사가 선고를 내리듯 말했다. 그의 말이 귓전을 땅땅 때렸다.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김민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늘이 내린 행운으로만 느껴지던 이 몸이 갑자기 끔찍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김민석은 홀로 외롭고 가난하게 살지언정 남에게 빌붙어 먹고사는 쓰레기는 아니었다. 적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간다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몸은… 서하윤은….

“너무 겁주지 말지, 최상혁. 하윤이가 무서워하잖아.”

하준서가 김민석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어깨를 도닥이며 속삭였다.

“난 괜찮아요, 하윤 씨. 하윤 씨가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하며 나를 꼬셨을 때도 그 뻔한 거짓말이 귀엽고 깜찍하게만 보였지 화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내가 고르고 골라 선물한 비싼 시계를 팔아먹었을 때도 그냥 귀엽기만 하더라고. 물론 하윤 씨가 저 새끼한테 가랑이를 벌려 가며 빌붙어 먹고사는 걸 알았을 때는 화가 좀 났지만…. 나는 우리 하윤이를 사랑하니까 참고 넘어갈 수 있어요.”

상냥하고 다정하게 속삭인 하준서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혹시 저 새끼랑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요. 집이 필요하면 집을 사 주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줄게요.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하윤 씨는 지금까지처럼 재밌게 즐기며 살면 돼요.”

“…최상혁 대신 당신한테 가랑이 벌리면서 빌붙어 살라고요?”

“네.”

하준서가 화사하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조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하준서의 제안은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김민석은 다리 위에 올린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서하윤이 아니에요. 내 이름은 김민석이에요. 사고를 당해서 정신을 잃었다가 병원에서 깨어나니 이 몸 안에 들어와 있었어요. 아마 진짜 서하윤 씨는 건물에서 떨어졌을 때 죽었거나… 아니면 혹시 내 몸, 김민석 몸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요.”

거기까지 말한 김민석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최상혁과 하준서를 번갈아 보았다. 최상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고, 하준서의 눈은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둘 다 전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머리 다친 게 도졌구나, 하는 그 정도 반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나도 알고 있어요. 나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진짜 김민석이고, 서하윤이라는 사람은 알지도 못해요.”

“…….”

“솔직히 서하윤이 엄청 부자고 생긴 것도 장난 아니라서 이 몸으로 계속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어요. 그런데 두 사람 말을 들어 보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몸이 아닌 것 같네요. 일단 본래 제 몸 먼저 찾아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도로 몸을 바꿀 거예요. 그러니까 서하윤한테 받을 빚은 진짜 서하윤이 이 몸에 돌아오고 나서 계산하세요.”

“서하윤.”

“하윤 씨.”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불렀다. 김민석은 고개를 내저었다.

“전 서하윤이 아니에요. 진짜 서하윤이 만나고 싶으면 두 사람이 나를 좀 도와주세요. 내 본래 몸을 찾으면 서하윤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하준서 씨, 내가 병원에서 했던 부탁 기억하죠? 그 병원에 김민석이라는 환자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거.”

하준서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의사한테도 이대로 얘기했어요. 아무래도 몸이 바뀐 것 같다고. 전혀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난 사실을 얘기한 거예요. 내 이름은 김민석이고, 22살이에요. 어릴 때부터 고아였고, 보육원에서 살다가 퇴소해서 지금은 고시원에서 살고 있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취직자리 알아보고 있었고요. 물론 게이도 아니에요.”

성큼성큼 걸어온 최상혁이 김민석의 턱을 쥐고 들었다. 악력이 얼마나 센지 턱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하지만 김민석은 아픈 티를 내는 대신 눈을 치켜뜬 채 최상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최상혁이 그런 김민석을 잠시 응시하다가 입을 뗐다.

“이 작은 머리로 생각해 낸 해결책이라는 게 고작 그거야? 기억 상실에 해리성 장애? 다른 사람과 몸이 바뀌어? 서하윤이 아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그것도 속아 줄 만해야 속아 주지.”

“…….”

물론 타인이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최상혁의 반응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김민석은 진지했다. 이대로 서하윤으로는 살 수 없었다. 서하윤의 인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네가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어처구니없는 연극질을 하는 건지, 아니면 머리를 다쳐서 진짜 돌아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하윤. 하나는 분명해. 넌 내 것이고, 그 사실은 네가 어떻게 발버둥 친다고 해도 변할 수가 없어. 그러니 쓸데없는 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얌전히 나한테 가랑이나 벌리면서 빌어먹고 살아. 그게 네가 이제껏 살아온 방법이니까.”

최상혁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 말이 자기 자신이 아닌 서하윤에게 하는 말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김민석은 어마어마한 모멸감에 몸서리쳤다.

“뭐? 가랑이나 벌리면서 빌어먹고 살라고? 이 개새끼야. 좆같은 새끼.”

모멸감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설을 내뱉자, 최상혁이 허리를 숙이더니 갑자기 입술을 세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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